1. 개요
《염철론(鹽鐵論)》은 중국 전한(前漢) 소제(昭帝) 시원(始元) 6년(B.C. 81)에 있었던 염철회의(鹽鐵會議)에 관한 자료를 선제(宣帝)(재위 B.C. 74~B.C. 49) 때 환관(桓寬)이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12권 60장으로 이루어졌다. 회의의 토론내용을 재현(再現)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엮었다. 이 책은 염철전매(鹽鐵專賣) 등 정책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사회·경제·사상 등에 관해서도 논급하고 있는 기본적 사료(史料)이다.
2. 저자
(1)성명:환관(桓寬)(?~?)
(2)자(字)·별호(別號):차공(次公)
(3)출생지역:전한(前漢) 시대 여남(汝南)(현 하남성 상채(上蔡))
(4)주요활동과 생애
한 선제(漢宣帝) 때 주로 활동하여 천거를 받아 낭(郞)이 되고, 여강태수승(廬江太守丞) 등을 지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뛰어났다. 학식이 깊고 문장을 잘 지었다. 소제(昭帝) 때 승상(丞相), 어사(御史) 및 여러 현량(賢良), 문학(文學)들이 함께 염철(鹽鐵) 관영(官營)의 문제를 논한 염철회의의 변론 기록을 집성하여 《염철론》을 만들었다.
(5)주요저작:〈수한편(水旱篇)〉, 〈산부족편(散不足篇)〉, 〈취하편(取下篇)〉 등
3. 서지사항
12권 60장으로 이루어졌다. 무제(武帝)가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던 염철전매, 균수(均輸), 평준(平準), 술 전매 등의 재정정책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하여 B.C. 81년에 조정에서 토론한 내용의 속기록인 《염철의문(鹽鐵議文)》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편찬자인 환관의 손에 의해 윤색되어 편찬된 것으로 회의의 충실한 기록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서문(序文)에 해당하는 60편 〈잡론(雜論)〉을 보면 선제(宣帝)의 법가적 통치에 대한 비판이 편찬의 한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무제는 외정(外征)과 내치(內治)를 강력히 펼쳐 고대제국의 중앙집권제를 완성함과 동시에 흉노(匈奴)·대완국(大宛國)·남월국(南越國)·서남이(西南夷)·위만조선(衛滿朝鮮) 등을 정벌하여 대영토를 확장했다. 대외정복사업으로 말미암아 국가재정이 궁핍하게 되어 새로운 경제정책이 필요하게 되자 중농억상주의(重農抑商主義)에 근거하여 경제의 중앙집권화를 진행했다. 상홍양(桑弘羊)이 새로운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그 시행을 담당하여 B.C. 119년에 염철전매가 시작되었다. 이어 B.C. 115년에는 균수법(均輸法)이 실시되고 B.C. 110년에는 평준법(平準法)이 실시되었는데, 이것은 정부가 직접 상품을 구입·수송·판매하고 물가를 조절하는 정책으로 역시 이전에 상인이 장악하고 있던 이익을 국가가 빼앗은 것이다. 또 증세조치를 취했으며 화폐의 주조권도 정부가 장악하게 되었다.
염철논쟁은 B.C. 81년 전국 각지에서 소집된 현량, 문학 60여 명과 승상 차천추(車千秋), 어사대부(御使大夫) 상홍양(桑弘羊)을 비롯한 관리들이 백성들의 경제적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놓고 토론한 것이다. 현량, 문학이 “소금·철·술 등을 국가의 주도하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근본을 망각하고 말리(末利)의 추구에만 몰두하니 소금, 철, 술의 전매제도와 균수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어사대부가 “흉노의 잦은 침범으로 변방의 재화가 부족하므로 소금, 철, 술의 전매제도를 시행하고 균수법을 실시해서 재정을 확충하여 변경 방비에 소용되는 비용으로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이러한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반론을 폄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서 현량, 문학이 흉노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는 정부의 태도를 다시 비판하자, 어사대부는 흉노 정벌의 불가피성을 역설함으로써 논쟁은 경제 정책에서 국방·외교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또한 어사대부가 염철전매를 통해 재원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호족의 세력을 억제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자 논쟁은 다시 사회·경제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양자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유가의 인의와 법술의 이론을 동원함에 따라, 논쟁은 유가와 법가의 사상 논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논쟁이 염철전매라는 특정한 경제 정책의 계속 시행 여부에 대한 논의에서 국방·외교·사회·경제·사상 등 당시의 국가와 사회가 안고 있던 제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점검하는 대논쟁으로 확대되어 무제 시대를 연장할 것인지, 아니면 문제(文帝) 시대로 회귀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역사 논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회의에서는 전매제도의 철폐를 결정했다.
현존하는 판본은 명(明)나라 장지상주의란당본(張之象注猗蘭堂本), 금반집본(金蟠輯本), 청(淸)나라 장돈인집본(張敦仁輯本) 등이 있고 《백자전서(百子全書)》, 《한위총서(漢魏叢書)》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서로는 청나라 노문초(盧文鋧)의 《염철론교보(鹽鐵論校補)》, 유월(兪樾)의 《독염철론(讀鹽鐵論)》, 양수달(楊樹達)의 《염철론요석(鹽鐵論要釋)》 등이 있다.
4. 내용
염철회의의 진행 과정과 토론의 내용을 생생하게 전하는 문헌이 곧 《염철론》이다. 이 《염철론》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는데, 그 제1부는 제1편 〈본의(本議)〉부터 제41편 〈취하(取下)〉까지로서 염철전매를 논한 본론이며, 제2부는 제42편 〈격지(擊之)〉부터 제59편 〈대론(大論)〉까지로서 흉노 문제를 다룬 여론(餘論)이다. 마지막 제3부는 제60편 〈잡론〉으로 자서(自序)의 형식과 내용을 취하여, 염철회의 전반에 대한 정보와 논쟁 당사자들에 대한 찬자의 평가를 싣고 있다.
이 가운데서 제1부는 제1차 염철회의를 전하고, 제2부는 제2차 염철회의를 전한다. 그러나 이 《염철론》의 내용이 염철회의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4가지가 있다.
⓵ 《염철론》의 편찬자 환관이 염철회의 당시의 인물이 아니라 선제 시기에 태수승(太守丞)이라는 지방관에 그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⓶ 염철회의의 ‘의문(議文)’ 즉 회의록을 상당히 조작하였다는 기록과, 《염철론》 각처에 찬자의 주관적 견해나 입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⓷ 그리하여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와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서 《염철론》을 ‘유가(儒家)’의 부류에 포함시켰다.
⓸ 《염철론》이 당시의 격렬한 토론 장면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지만, 실제 대화의 내용으로 믿기에는 너무나 논리가 정연하고 말씨가 정돈된 곳이 자주 발견되어, 윤색의 흔적이 강하게 감지된다.
그러나 《염철론》이 환관 개인이 만들어 낸 허구라든가, 염철회의의 진행과 토론 내용을 허위로 전하는 기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다소간의 ‘추연증광(推衍增廣)’과 윤색이 있었음은 사실이겠지만, 찬자 자신이 회의록을 직접 입수, 관람하여 정리한 것이어서, 그 사료적 신빙성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회의의 내용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며 당시 사회경제의 실정, 정치사상의 대립상태 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전편에서 현량, 문학과 승상, 어사들의 극적인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학작품으로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5. 가치와 영향
염철회의는 유법(儒法)의 이념 논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두 정치세력 혹은 사회계층의 길항이었다. 이 거대한 이념 논쟁과 계층적 길항의 결과는 염철전매제의 일부 수정이나 단순한 정변(政變)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법(儒法)의 절충과 융합을 통한 제3의 한대적(漢代的) 이념체계의 창출이었고, 문학지사(文學之士)와 문법리(文法吏) 계층의 교묘한 공존과 사회통합을 통한 중국적 관료조직과 사회구조의 정립이었다. 염철논쟁을 통해 유가와 법가는 ‘이유식법(以儒飾法)’ 혹은 ‘내법외유(內法外儒)’의 절충과 공존의 지혜를 배웠으며, 문학지사와 문법리는 관료조직의 상층부와 중추부를 각각 점거하여 동아시아 관료조직의 독특한 구조를 형성하였다. 소제(昭帝) 시기의 중국인들이 염철회의를 통해 얻은 결론은 무제 시기의 연장인가, 문제 시기로의 회귀인가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두 시기의 특성을 함께 아울러 새로운 성격의 시기를 여는 것이었다. 염철회의는 단순한 경제정책 논쟁이나 정치적 책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이념과 사회계층을 형성하는 것이었으니, 한대 아니 고대(古代) 중국의 사회와 국가의 전형적 모델은 진 시황(秦始皇) 시기나 한 문제 시기 혹은 무제 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염철회의가 진행된 전한 후기의 소선제(昭宣帝) 시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염철론》의 찬자가 어떠한 계기로, 어떻게 자료를 손에 넣어서 이런 책을 편찬하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단지, 《한서(漢書)》 〈공손하등전(公孫賀等傳)〉의 찬문(贊文)에서 “당시 서로 힐난하여, 그 회의록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선제 때에 이르러 여남(汝南) 지방 출신의 환관이……염철 논쟁을 부연하고 그 조목을 늘리는 한편, 그 논란을 극대화하여 책을 저술하였으니, 이 역시 치란(治亂)을 구명하여 일가의 법을 이루려 한 것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책은 염철회의록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찬자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다소간의 과장과 윤문, 그리고 체재상의 조정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염철론》은 대화체로 구성된 독특한 사상서의 하나로 읽힐 수도 있지만, 2천여 년 전에 중국의 최고급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가와 사회, 문화 등 광범한 주제를 놓고 고담준론을 주고받는 역사적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잘 정리된 형태로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임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특기할 것은 치열한 논쟁 중에 동아시아의 주변지역에 대한 견문이 다수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고조선과 위만조선에 관련된 사료가 다수 실려 있으며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6. 참고사항
(1)명언
• “지금 각 군국(郡國)에는 염관(鹽官)․철관(鐵官)․주각관(酒榷官)․균수관(均輸官) 등이 있어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고 있어서, 인정 많고 순박한 풍속을 해치고 탐욕스럽고 비루한 풍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백성들 중에 본업(本業)(농업)에 나아가는 자가 적고, 말업(末業)(상공업)을 좇는 자들이 많습니다. 대체로 꾸밈이 화려해지면 본바탕은 쇠미해지고, 말(末)이 성하게 되면 본(本)은 훼손되는 법입니다. 말업(末業)이 발전하면 백성은 사치하게 되고, 본업(本業)이 발전하면 백성은 근실하게 됩니다. 백성이 근실하면 경제가 넉넉해지고, 백성이 사치하면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이 생기게 됩니다. 소금․철․술의 전매제도와 균수법(均輸法)을 폐지하시길 바라오니, 본업을 진작시키고 말업을 물리쳐서 농업을 확대하고 이롭게 하는 방편입니다.[今郡國有鹽鐡酒榷均輸 與民争利 散敦厚之樸 成貪鄙之化 是以百姓就本者寡 趨末者衆 夫文繁則質衰 末盛則本虧 末修則民淫 本修則民慤 民慤則財用足 民侈則饑寒生 願罷鹽鐡酒榷均輸 所以進本退末 廣利農業便也]” 〈본의(本義)〉
• “조선(朝鮮)이 변경을 넘어 연(燕)의 동쪽 땅을 겁탈하였다.[朝鮮踰徼 劫燕之東地] 〈비호(備胡)〉
(2)색인어:환관(桓寬), 염철론(鹽鐵論), 염철회의(鹽鐵會議), 전매(專賣), 균수(均輸), 평준(平準), 유가사상(儒家思想), 법가사상(法家思想), 염철론교보(鹽鐵論校補), 독염철론(讀鹽鐵論), 염철론요석(鹽鐵論要釋)
(3)참고문헌
• 鹽鐵論校注(王利器, 古典文學出版社)
• 鹽鐵論簡注(馬非百, 中華書局)
• 新譯鹽鐵論(盧烈紅, 三民書局)
• 鹽鐵論(환관 저, 김한규, 이철호 역, 소명출판)
【서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