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명나라 성조(成祖)(재위 1402~1424) 영락(永樂) 원년(元年)에 요광효(姚廣孝)․해진(解縉) 등 봉칙찬(奉勅撰)의 유서(類書)이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백과전서(百科全書)’ 항목에서 《영락대전》을 ‘세계 역사상 최대의 백과전서’라고 일컬었다.
2. 편자
(1) 성명:요광효(姚廣孝)(1335~418)와 해진(解縉)(1369~1415) 등
(2) 자(字)·별호(別號):요광효의 유명(幼名)은 천희(天僖),사명(賜名)은 광효(廣孝),법명(法名)은 도연(道衍),자(字)는 사도(斯道),암호(庵號)는 독암(獨庵)(獨菴),호(號)는 독암노인(獨庵老人)․도허자(逃虛子)이다. 요도연(姚道衍)으로 통칭한다. 해진의 자는 대신(大紳),호는 춘우(春雨)·희역(喜易),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3) 출생지역:요광효는 평강로(平江路)(명나라 남직예(南直隷) 소주부(蘇州府)) 장주현(長洲縣)(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 사람. 해진은 강서(江西) 길수주(吉水州)(지금의 강서(江西) 길수현(吉水縣))사람.
(4) 주요활동과 생애
요광효는 중국 원나라 말, 의생(醫生)의 세가(世家)에서 태어나, 14세에 승려가 되었다. 천태종과 밀교를 익혔다가 마지막에 선문(禪門)으로 개종하여 임제종(臨濟宗)을 닦고, 법명(法名)을 도연(道衍), 호(號)를 독암(獨庵)이라고 했다. 도사(道士) 석응진(席應真)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 홍무(洪武) 연간에 주원장(朱元璋)이 유학의 경서(經書)에 밝은 승려로서 징소하여 예부(禮部)에서 시험하게 했으나 관직을 받지는 못했다. 홍무 15년에 고황후(高皇后)가 붕어한 이후 태조는 고승을 선발하여 친왕(親王)을 모시게 했을 때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모시게 되어 경수사(慶壽寺) 주지(住持)가 되었다. 혜제(惠帝)가 즉위하여 번왕의 권한을 축소하자, 주체에게 기사(起事)를 권했다. 건문(建文) 원년(1399) 10월, 주체는 도연(요광효)의 건책에 따라 거병하여 2대 황제이자 자신의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황제에 오른 주체는 연왕 시절 자신의 수도였던 북평(北平)을 북경(北京)(베이징)으로 개명하고 천도했다. 이후 주변국을 왕성하게 정벌해 국경을 넓히고, 확정지었다. 주체의 남경 함락에서 공이 제일 높았다. 주체의 즉위 후 《태조실록(太祖實錄)》의 중수(重修)를 주관하고, 해진 등과 함께 《영락대전》을 찬수했다. 영락(永樂) 16년(1418) 3월 경수사에서 84세로 타계했다. 추성보국협모선력문신(推誠輔國協謀宣力文臣)에 추증되고 영록대부(榮祿大夫)·상주국(上柱國)․영국공(榮國公)에 특진되었으며, 시호를 공정(恭靖)이라고 했다. 인종(仁宗)의 홍희(洪熙) 원년(1425)에 소사(少師)에 가증(加贈)돠고 성조(成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해진은 홍무 21년(1388) 무진과(戊辰科)에 진사(進士) 삼갑(三甲) 제10명(第十名)으로 합격했다. 서길사(庶吉士)를 제수받고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으며, 태조 주원장의 우대를 받았다. 영락 연간에 내각수보(內閣首輔), 우춘방대학사(右春坊大學士)에 이르렀다. 재주와 학문이 높고 직언을 좋아하여 기탄을 받아 자주 폄출(貶黜) 당했으며, 결국 ‘인신(人臣)으로서 예(禮)가 없다’는 죄목으로 하옥되었다. 영락 13년(1415) 겨울에 설퇴(雪堆)에 매장되어 동사했다. 성화(成化) 원년(1465) 조의대부(朝議大夫)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문장뿐만 아니라 서법(書法)에도 뛰어났다. 서위(徐渭), 양신(楊愼)과 함께 명조삼대재자(明朝三大才子)로 일컬어진다.
(5) 주요저작
요광효는 해진과 함께 《태조실록(太祖實錄)》의 중수(重修)를 주관했다. 저작(著作)으로 《도허지시집(詩集)》․속집(續集)․보유(補遺), 《도허유교(逃虛類稿)》, 《도여록(道餘錄)》, 《정토간요록(淨土簡要錄)》, 《불법불가멸론(佛法不可滅論)》, 《제상선인영(諸上善人咏)》 등이 있다.
해진은 《태조실록》의 중수,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 편찬 등을 총재했다. 저서에 《해학사집(解學士集)》, 《천황옥첩(天潢玉牒)》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본래 1404년 해진이 ‘문헌대성(文獻大成)’을 이루었는데, 성조가 이듬해 태자소사(太子少師) 요광효와 해진, 예부상서(禮部尙書) 정사(鄭賜)로 하여금 감수(監修)하게 하고 유계지(劉季篪) 등에게 중수(重修)하게 하여, 2,169명을 시켜 편사(編寫)하게 했다. 장용문(蔣用文)과 조동우(趙同友)가 총재와 부총재, 진제(陳濟)가 도총재(都摠裁)를 맡았으며, 남경(南京) 문연각(文淵閣) 장서를 활용했다. 1407년 ‘영락대전’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직접 서문을 작성했다. 1408년 겨울, 사본(寫本) 정본(正本) 1부가 완성되어 문연각(文淵閣)에 보관되었다. 가정제(嘉靖帝) 세종(世宗)(재위 1521~1566)이 화재로 인한 소실을 우려하여 중록본(重錄本) 1질을 더 필사하여 만들도록 하여, 1562년 부본(副本) 1부가 제작되었다. 부본은 청나라 건륭(乾隆) 38년(1772) 한림원(翰林院)에 수장(收藏)되고, 건륭제(乾隆帝)의 명에 따라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찬될 때 활용되었다. 하지만 당시 이미 2,422권이 망실된 상태였다.
명나라 말기에 혼란으로 화재와 도난 등으로, 1407년의 정본 1부를 제외하고 원본과 부본은 소실되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군에 의한 애로호 사건으로 상당 부분이 약탈되거나 소실되었으며, 1909년 의화단 운동 때도 소실되었다.
현재 중국 내외에 418책, 800여 권만 전하고 있다. 북경(北京) 중국국가도서관(中國國家圖書館)에 162책(冊), 대만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 62책, 미국 의회도서관(議会圖書館)에 41책,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에 34책 등이 전한다. 이것을 집성(集成)한 영인판(影印版)이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출판되었다. 하지만 이외에도 여러 곳에 영본(零本)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의 도서 중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때 수집된 구간도서(舊刊圖書) 가운데 증록본의 잔궐본(殘闕本) 1책 2권(권8782, 8783)이 있었으나, 현재는 그 등사본만 전한다.
《영락대전》의 서적은 외관이 미려하고 장중하다. 단책(單册)은 50.3cm×30cm(영조척(營造尺)으로 높이 1척(尺) 5촌(寸) 6분(分), 너비 9촌(寸) 3분(分))으로 약 50엽으로 이루어져 있다. 2권(卷) 1책(册), 1권 1책 혹은 3권 1책으로, 설백(雪白)의 수피지(樹皮紙)를 사용했다. 서의(書衣)는 여러 겹의 선지경표(宣紙硬裱)를 사용하고 외면에는 황견(黄絹)으로 감쌌다. 삽도는 백묘(白描) 수법을 채용했다. 주필(朱筆)로 변란(邊欄)과 계항(界行)을 그리고, 인용서적의 저자와 서명을 썼다. 묵필로 제명(題名), 권수(卷数), 문목(韵目), 정문(正文)을 쓰고, 회도(繪圖)를 그렸다. 권점(圈點)은 노(蘆), 죽(竹), 골(骨), 옥(玉)의 필관(筆管)에 주사(朱砂)를 묻혀 찍었다.
1959년 북경도서관(北京圖書館)이 수집한 《영락대전》 원본과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수집한 원본을 영인 출판했다. 수차례 증보 출판하여 총 797권을 영인했다. 대만과 일본에서도 영인본을 간행했다. 2002년 북경도서관출판사가 원본 크기의 《영락대전》을 영인하기 시작했다.
4. 내용
《영락대전》의 원본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의 고금의 도서(圖書) 7, 8천 종에서 자료를 뽑아 《홍무정운(洪武正韻)》을 강(綱)으로 삼아 단자(單字) 아래에 음운(音韻)과 훈석(訓釋)을 상주(詳註)하고 전(篆)․예(隸)․초(草)․해(楷)의 자체(字體)를 갖추어 기록한 후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의복(醫卜)․승도(僧道)․기예(技藝)․인사(人事)․명물(名物)․기문이견(奇聞異見)․시문사곡(詩文詞曲) 등 부류에 따라 재록(載錄)하였다. 본문 22,877권, 목록 60권을 1책당 2권으로 묶어 10,095책, 글자 수가 약 3억 7천만에 달하였다고 한다. 《영락대전》의 권수(卷數)에 대해,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권137 자부(子部) 47 유서류존목(類書類存目) 1에 22,877권, 목록(目錄) 60권,합계 22,937권이라고 했다. 《명태조실록(明太宗實錄)》 권54에는 22,211권이라 했으며, 《명사(明史)》 〈예문지(藝文志)〉는 22,900권이라 했다. 여기서는 《사고전서총목제요》의 기록을 따른다.
5. 가치와 영향
《영락대전》의 정문(正文)은 망실된 서적의 집일(輯佚)에 이용되었다. 청나라 건륭 38년(1772)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건륭 46년(1781),800여 권의 잔본(殘本)으로부터 경부(經部) 66종, 사부(史部) 41종, 자부(子部) 103종, 집부(集部) 175종, 모두 385종, 합계 4,946권을 집일(輯佚)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문헌으로, 서진(西晉) 두예(杜預)의 《춘추석례(春秋釋例)》, 당나라 임보(林寶)의 《원화성찬(元和姓纂)》, 북송 설거정(薛居正)의 《구오대사(舊五代史)》, 남송 이심전(李心傳)의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系年要錄)》, 송나라 의학서 《소침양방(蘇沈良方)》, 《박제방(博濟方)》, 《상한미지(傷寒微旨)》 등이 있다.
사고관(四庫館)은 《영락대전》을 근거로 집일을 한 이후에, 가경(嘉慶) 연간에 《전당문(全唐文)》과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찬수하면서 《영락대전》의 사료를 사용했다. 특히 서송(徐松)은 《송회요(宋會要)》 500ᄀힵᆫ, 《송중흥예서(宋中興禮書)》, 《속중흥예서(續中興禮書)》, 《원하남지(元河南志)》 등을 집일했다. 이후 문정식(文廷式)은 《원대기사(元代記事)》, 《송장원급제도(宋狀元及第圖)》 등을 집록하고, 목전손(繆荃孫)은 《명노주지(明瀘州志)》, 《명영락순천부지(明永樂順天府志)》를 집록했으며, 동강(董康)은 《헌대통기(憲臺通記)》를 집록했다.
원나라 역사 연구 분야에서는 《원사(元史)》를 보완할 여러 문헌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영락대전》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자구탈락(字句脫落)과 음의천와(音義舛訛)가 없지 않았던 듯하다. 청나라 다라질군왕(多羅質郡王) 영용(永瑢) 등은 《영락대전》에 실린 설거정 등의 《오대사(五代史)》의 원문을 정정하기 위하여 《통감고이(通鑑考異)》․《통감주(通鑑注)》 등 통감류, 《필담(筆談)》․《용재오필(容齋五筆)》․《청상잡기(靑緗雜記)》․《직관분기(職官分紀)》 등과 함께 《태평어람(太平御覽)》․《태평광기(太平廣記)》․《책부원귀(冊府元龜)》․《옥해(玉海)》․《금수만화곡(錦繡萬花穀)》․《예문유취(藝文類聚)》․《기찬연해(記纂淵海)》 등의 유서를 활용하여 하였다.(乾隆四十年七月初三日多羅質郡王臣永瑢, 〈進舊五代史表〉).
6. 참고사항
(1) 명언:《영락대전》은 유서(類書)이고 잔권만 남은 상태이므로 명언보다는 한 예만을 뽑았다.
• “당(唐)나라 정관(貞觀) 말에 태종(太宗)이 정벌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총장(總章) 초에 이르러 고종(高宗)이 이적(李勣)에게 명해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도록 하여 마침내 그 성을 함락하고 땅을 나누어 군현으로 삼았다. 당 말년에 이르러 중원에 많은 일이 있자 고려가 마침내 스스로 군장을 세웠으니, 전왕(前王)의 성은 고씨(高氏)였다. 후당 동광(同光)과 천성(天成) 시기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唐貞觀末 太宗伐之 不能下 至總章初 高宗命李勣率軍征之 遂拔其城 分其地爲郡縣 及唐之末年 中原多事 其國遂自立君長 前王姓高氏 唐同光·天成中 累遣使朝貢]” ≪영락대전(永樂大全)≫ 권4441
(2) 색인어:요광효(姚廣孝), 해진(解縉), 유서(類書), 백과전서(百科全書), 문연각(文淵閣), 집일(輯佚), 사고전서(四庫全書)
(3) 참고문헌
• 《한·중 유서문화 개관》(최환, 영남대학교출판부, 2008)
• 《한국한문기초학사》(심경호, 태학사, 2012)
• 《한국에 전하는 영락대전:전존 경위와 내용(석오 역사연구자료 시리즈 1, 이태진, 태학사, 2018)
• 《永樂大全》 1~96(姚廣孝 等撰, 楊家駱 編, 台北 : 世界書局, 民國51[1962])
• 《永樂大典:全新校勘簡休橫排珍藏本》(北京時代文瑞文化傳播有限公司 總策劃, 劉尹 責任編輯, 北京:大衆文藝出版社, 2009)
• 永楽大典索引(衣川強 編, 白帝社, 2001)
• 《《永楽大典》流伝与輯佚新考(京師史学書系)》(張昇 著,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19)
【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