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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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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정(王禎)의 《농서(農書)》는 1313년에 완성된 것으로, 중국 농민의 경작경험을 토대로 북방 농업기술과 남방 농업기술을 종합적으로 서술하여 중국 농학의 전통체계를 제시한 농서(農書)이다. 이 책은 〈농상통결(農桑通訣)〉, 〈백곡보(百穀譜)〉, 〈농기도보(農器圖譜)〉 등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각자의 체제를 지닌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이후 한 책으로 통합하여 출판하게 되었다.

2. 저자

(1)성명:왕정(王禎)(1271?~1368?)
(2)자(字)·별호(別號):자(字)는 백선(伯善)
(3)출생지역:원대 산동(山東) 동평(東平)(지금 산동 東平縣)
(4)주요활동과 생애
왕정은 원대 농학가이며 활판인쇄술의 개척자였다. 생졸 연월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그의 저서 중에서 그가 원정(元禎) 원년(1295)부터 대덕(大德) 4년(1300)까지 안휘(安徽) 선주(宣州) 정덕(旌德)(지금 안휘 정덕)과 강서(江西) 영풍(永豐)(지금 강서 광풍현(廣豊縣))의 현윤(縣尹)에 부임하여 6년간 직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 화북, 화중을 다니며 대량으로 농업 문헌을 섭렵했으며, 농구 개량을 주장하여 당시 농업생산발전에 일정한 작용을 했다. 농업생산에 익숙하여 재임 기간에도 생활은 소박했고, 항상 농민에게 경종(耕種)을 지도했으며, 가난하고 힘든 병자에게 의약을 제공했다. 대덕(大德) 4년에 영풍현(永豊縣)에서도 그는 여전히 농업을 중시했으며 백성들에게 면화와 뽕나무 심기를 가르쳤다. 《왕정농서》는 그가 정덕(旌德) 현윤(縣尹) 때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영풍(永豐) 현윤(縣尹)으로 옮긴 후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대덕(大德) 8년(1304) 원 정부는 왕정에게 저술한 농서를 판각하여 간행하도록 명하면서, “영풍 현윤 왕정은 동로(東魯)의 명유(名儒)로서 나이도 많고 박학하며, 남북을 두루 전근한 경력도 있어 일찍이 〈농상통결(農桑通訣)〉, 〈농기도보(農器圖譜)〉 및 〈곡보(穀譜)〉 등을 저술하였다. 만약 지금 판각하여 유포하지 않는다면 아마 책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원 인종(仁宗) 황경(皇慶) 2년(1313)에 왕정은 《농서》의 서문을 지었지만, 간행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5)주요저작:미상(未詳).

3. 서지사항

《왕정농서》의 원각본이 발견되지 않아 원대에 간행되었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으며, 원대 각종 목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왕정농서》에는 명(明) 가정본(嘉靖本)과 청(淸) 사고본(四庫本)이 있다. 가정본은 우리가 지금 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각본으로, 책이 편집된 1세기 후에 《영락대전(永樂大典)》에 포함되었고, 또 백여 년이 지나 가정(嘉靖) 9년(1530)에 처음으로 산동 포정사(布政使)가 판각한 책이다. 이후 본서의 판각은 두 계통으로 구분되며, 판본은 모두 12종 이상이 있다. 그중 한 계통인 가정본(嘉靖本)을 친본(親本)이라고 하며, ‘명본(明本)’으로 간칭한다. 다른 한 계통은 건륭 연간에 《영락대전》 중에서 편집한 《사고전서》본으로, 간칭하여 ‘고본(庫本)’이라고 한다. 명본 계통은 전서가 36집이며, 고본 계통은 22권으로 되어 있다. 이 두 본은 권수가 상이한 것을 제외하고도 《왕정농서》의 순서, 배열과 삽도 등 세 방면에서 차이가 있다. 왕육호(王毓瑚)의 고증에 의하면, 고본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영락대전》의 면모를 유지하고 가정본보다 원래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하지만, 삽도를 보면 명본이 더 원본에 가까운 양상을 지녔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고본(庫本)의 원서가 원래 37집(명본은 36집 즉, 〈농상통결〉이 6집, 〈농기도보〉가 20집, 〈곡보〉가 10집이며, 왕정의 자서에도 ‘37집’이라고 함)인데, 이것을 22권으로 고쳐 종합·배열하는 과정에 착오가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계통은 제각기 장점을 지녔다. 왕육호는 고본(庫本)을 기초로 하고, 명본교점본(明本校點本)을 참조하여 농업출판사에서 1981년 《왕정농서》를 출판함으로써 사용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4. 내용

《왕정농서》는 모두 약 13만 6천 자로 되어 있으며, 첫 부분 〈농상통결〉은 3가지의 ‘기본(起本)’과 16개의 편(篇)으로 이루어져 있어 농업의 총론에 상당한다. 이 중 〈농사기본(農事起本)〉, 〈우경기본(牛耕起本)〉과 〈잠사기본(蠶事起本)〉은 중국 농업의 역사와 그 전설을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수시(授時)〉, 〈지리(地利)〉 등 16편은 농업생산에 대한 각 기술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총결하여 쓰고 있다. 내용은 비록 앞 시대의 농서를 종합한 것이지만 도처에 남북경작방식의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둘째 부분인 〈곡보〉는 각론에 속하며, 곡식, 열매[蓏], 채소, 과일, 죽목(竹木), 잡류, 음식(구황(救荒)이 첨부)의 7류(類)에 따라 당시의 재배식물을 일일이 소개하고, 그 기원 및 재배, 보호, 수확, 저장 및 이용 등을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셋째 부분인 〈농기도보〉는 본서의 중심으로 그 분량이 책의 4/5를 점하며, 내용도 정치하여 경작, 수확, 농산품 가공, 저장, 관개, 잠상, 방직 등 각 방면의 농구 그림 270여 폭을 상세히 소개하고, 관련 도문(圖文)도 자세하다.

5. 가치와 영향

우선 《왕정농서》는 첫째, 남북 농업기술을 모두 논하여 비교적 완전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왕정은 북방인으로 남방에서 수차례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그가 저술한 농서 중에는 간혹 남북 농업기술을 대비하여 그 차이를 명확하게 제시해주는 부분이 있어 독자의 이해와 응용에 편리하다. 둘째, 기존의 농서에서 부족했던 생산수단을 삽도와 함께 사용방식까지 구체적으로 안내를 해줌으로써, 앞서 편찬된 《농상집요》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해주고 있다. 특히 전통 농구(農具)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창의적인 양상을 띤다. 이 같은 〈농기도보〉는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실제 명대 서광계(徐光啟)의 《농정전서(農政全書)》, 풍응경(馮應京)의 《황명경세실용편(皇明經濟實用編)》, 왕기(王圻)의 《삼재도회(三才圖會)》, 원황(袁黃)의 《보지권농서(寶坻勸農書)》와 청대의 《수시통고(授時通考)》 등에서는 일찍부터 《왕정농서》 중 관련 내용을 채록하여 쓰고 있다. 셋째, 기존의 농서와는 달리 남방농업생산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했으며, 특히 ‘전제문(田制門)’ 중에는 남방의 우전(圩田), 위전(圍田), 거전(柜田), 제전(梯田), 가전(架田), 사전(沙田), 도전(涂田) 등의 토지이용방식을 잘 소개하고 있다. 넷째, 책 중에는 또한 ‘수시지장활법지도(授時持掌活法之圖)’가 등장하는데, 수시도(授時圖)에는 1년 4계절 12개월 24절기 72후에 근거한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로서, 별의 궤도와 계절별 물후(物候) 등이 작물의 파종과 재배와 같은 농업활동과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토지에 거름 주는 것이 매입하는 것보다 낫다.[糞田勝如買田]” 〈농상통결(農桑通訣) 분양(糞壤)〉
• “밭을 갈고 써레질 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손을 대지 않는 것만 못하다.[耕而不勞, 不如作暴]”(〈농상통결(農桑通訣) 파로(耙勞)〉)
• “안읍에서 천 그루 대추나무를 심으면 천호(千戶)의 제후와 버금간다.[安邑千樹棗其人與千戶侯等]” 〈백곡보(百榖譜) 과속(果屬)〉
(2)색인어:농상통결(農桑通訣), 백곡보(百穀譜), 농기도보(農器圖譜), 수시(授時), 기보(祈報), 전제(田制), 지리(地利), 잠상(蠶桑), 역전(力田).
(3)참고문헌
• 中國農書槪說(惠富平·牛文智 著, 西安地圖出版社)
• 中國農學書錄(王毓瑚 編著, 中華書局)
• 農業古籍版本叢談(肖克之, 中國農業出版社)
• 麗元代의 農政과 農桑輯要(최덕경 외, 동강)
• 東魯王氏農書(王禎撰, 繆啓愉 외1 譯註, 上海古籍)

【최덕경】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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