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유명록(幽明錄)》은 《유명록(幽冥錄)》 혹은 《유명기(幽冥記)》라고도 불리는, 신비롭고 기괴한 이야기 중심의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이다. 이 책은 남조(南朝) 송(宋)의 종실(宗室)인 유의경(劉義慶)이 문하(門下)의 문인들과 함께 편찬한 것으로, 원래의 30권은 이미 산실되었지만 노신(魯迅)에 의해 265조(條)의 이야기가 집록(輯錄)되어 전해지고 있다.
2. 저자
(1) 성명:유의경(劉義慶)(403~444)
(2) 자(字)·별호(別號):자(字)는 계백(季伯)
(3) 출생지역:경구(京口)(現 중국 강소성(江蘇省) 진강(鎭江))
(4) 주요활동과 생애
남조(南朝) 송(宋)의 종실(宗室)이었던 유의경(劉義慶)은 진(晉) 안제(安帝) 원흥(元興) 2년(403) 장사왕(長沙王) 유도린(劉道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에 남군공(南郡公)이라는 작위를 습봉(襲封)받았고, 17세에는 숙부 유도규(劉道規)의 뒤를 이어 임천왕(臨川王)에 책봉되었다. 임천왕에 책봉된 420년은 백부 유유(劉裕)가 송(宋)을 건국한 해로, 이후 유의경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단양윤(丹陽尹), 형주(荊州)와 강주(江州)의 자사(刺史) 등을 역임했다. 《송서(宋書)》 〈종실전(宗室傳)〉과 《남사(南史)》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상(上)〉에 실려 있는 그의 사적(事迹)에 따르면 유의경은 문학을 애호해 많은 문인들을 초빙해 환대하고 그들과 함께 여러 저작들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그는 만년에 불교를 신봉하였는데, 이에 대해 《송서》에서는 “만년에 승려를 봉양하였기에 지불한 비용이 상당하였다.[晩節奉養沙門 頗致費損]”고 했다. 이와 같은 유의경의 불교 신봉은 유송(劉宋)시기 제왕들의 불교문화와도 관계가 있다.
사서(史書)에 따르면 유의경은 “성품이 간소하고 무엇에 특별히 집착하거나 탐닉하지 않았다.[性簡素 寡嗜欲]”고 했으니, 그는 유송의 종실로서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성품도 훌륭하여, 일찌감치 백부 유유하게 인정받았던 출중한 제왕(諸王)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적은 《송서》 권51과 《남사》 권13에 실려 있다.
(5) 주요저작:《유명록》 30권, 《선험기(宣驗記)》 13권, 《세설신어(世說新語)》 8권 이외에 《서주선현전(徐州先賢傳)》 10권과 《강좌명사전(江左名士傳)》 1권, 그리고 《집림(集林)》 200권과 문집 8권이 있다.
3. 서지사항
‘유명(幽明)’이라는 서명(書名)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유명록(幽明錄)》에는 다양한 귀신 형상들이 등장하고 있어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사회현실과 가치관을 살펴 볼 수 있다. 유명(幽明)의 두 세계가 연계되고, 사람과 귀신이 함께 어우러져 인간세계와 귀신세계의 화복생사(禍福生死)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은 또 “유형무형의 상[幽明者 有形無形之象]”이나, 유형(有形)은 ‘명(明)’, 무형(無形)은 ‘유(幽)’로 풀이되기도 한다. ‘유명(幽明)’이 ‘유명(幽冥)’과 통용되어 《유명록(幽冥錄)》 혹은 《유명기(幽冥記)》로 불리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유명록》의 권수는 사서(史書)마다 차이가 있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는 21권이라 했고, 《구당서(舊唐書)》 〈경적지〉와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는 30권으로 적고 있으나, 그 원서는 이미 실전(失傳)되었다. 《유명록》의 일문(佚文)은 《설부(說郛)》, 《오조소설(五朝小說)》, 《구소설(舊小說)》 등에 몇 편이 전해지고, 《임랑비서총서(琳琅秘室叢書)》에는 162조(條)의 비교적 많은 편수가 기재되어 있다. 노신(魯迅)은 이와 같은 각종 유서(類書) 등에서 인용한 《유명록》의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 265조로 집록(輯錄)했는데, 이것은 현존하는 《유명록》의 가장 풍부한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정만청(鄭晩晴)은 《고소설구침》을 기초로 하여 노신이 누락시킨 부분을 보충하여 273편의 이야기를 《유명록》 본문에 싣기도 했다.
《유명록》은 《수서》 〈경적지〉와 《구당서》 〈경적지〉에서 사부잡전류(史部雜傳類)로 분류되었다. 여기에는 《유명록》 이외에 간보(干寶)의 《수신기(搜神記)》, 도연명(陶淵明)의 《수신후기(搜神後記)》등도 포함되어 있다. 《수서》 〈경적지 잡전류(雜傳類)〉에서는 지괴(志怪)를 사관(史官)의 말류(末流)로 여기고 있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지괴소설(志怪小說)은 창작의 산물로서가 아닌 사적의 한 부류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신도 이런 관점에서 진(晉)나라에서 수(隋)나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많은 귀신 관련 책들 중 문인들이 편찬한 것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신성시하거나 선양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며, 그렇다고 이것들이 의식적으로 창작된 것이라 할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유명록》을 비롯한 지괴소설의 사전류 분류는 사람과 귀신이 모두 실존한다는 육조(六朝) 당시의 사회 풍조를 반영하여 기이한 일과 인간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일부 지괴소설들이 사관(史官)에 의해 기록된 것 역시 바로 이런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 내용
전쟁, 사망, 질병과 기아는 《유명록(幽明錄)》에서 중복되어 등장하는 주제이다.
특히 〈팽아(彭娥)〉는 그러한 묘사가 두드러진 작품 중 하나이다. 이것은 사회 혼란으로 도처에서 약육강식의 사태가 빈번했던 진대(晉代) 영가(永嘉)의 난 발생 당시, 산으로 몸을 피신해 목숨을 보존했던 여인 팽아(彭娥)의 이야기다. 이외 80여 편의 이야기에서는 여러 종류의 사망의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랑과 혼인도 《유명록》의 주된 제재 중 하나이다. 사랑과 혼인을 제재로 한 이야기는 ‘신(神) 혹은 선인(仙人)과 인간’, ‘요괴(정령)와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등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유신완조(劉晨阮肇)〉와 〈황원(黃原)〉은 ‘신 혹은 선인과 인간’의 사랑과 혼인 이야기의 대표작이다. 타계(他界)에서 이루어진 여신(女神)과 평범한 남성간의 혼인 이야기에는 당시 사람들이 추구하던 사랑과 혼인에 대한 갈망이 반영되어 있다. 〈순우긍(淳于矜)〉과 〈상추노(常醜奴)〉는 ‘요괴(정령)와 인간’의 사랑과 혼인 이야기의 대표작이다. 이야기 속 남성들은 구애의 대상이었던 여성의 정체가 요괴임을 알고 여성을 죽이거나 쫓아 버리는 박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여성들은 복수 대신 순종하는 비극적 여성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사회의 유가적 가치관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매호분녀(賣胡粉女)〉와 〈방아(龐阿)〉는 ‘인간과 인간’의 사랑과 혼인 이야기의 대표작이다. 사랑에 능동적이고 의사표현에 있어 거침이 없는 매호분녀의 모습에는 진보적 여성상이 반영되어 있다.
유가(儒家)의 충(忠) 역시 《유명록》의 이야기 제재 중 하나이다. 61조에서 양숙자(羊叔子)는 부친의 묘 자리에 제왕의 기운이 서려있음을 알고 스스로 묘를 파헤쳐 묘맥을 끊었고, 이로 인해 자신의 어린 아들까지 죽음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조금도 후회도 없었던, 왕에게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한 인물로 서술되었다.
현학(玄學) 사상이 반영된 이야기도 있다. 156조는 간접적으로 현학 사상을 드러낸 이야기다. “진(晉)의 연주 자사(兖州刺史)인 패국(沛国) 사람 송처종(宋處宗)은 일찍이 장명계(長鳴鷄) 한 마리를 사서 애지중지하며 닭장을 늘 창가에 놓아두었다. 얼마 뒤 닭은 사람의 말을 하면서 송처종과 담론을 했는데 매우 현묘했다. 둘은 종일 토론했고 송처종도 이로 인해 말재주가 많이 늘었다.[晉兖州刺史沛國宋處宗 嘗買得一長鳴鷄 愛養甚至 恒籠著窗間 鷄遂作人語 處宗談論 極有玄致 終日不輟 處宗因此言功大進]” 이와 같은 해학과 풍자의 이야기는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당시 성행했던 현학의 풍조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 선양(宣揚)의 이야기들은 특히 편폭이 상당히 길다. 유송(劉宋)의 한 나라는 나찰(羅刹)이 사는 곳과 근접하여 나찰이 국경을 드나들며 수차례 사람을 잡아먹었다. 이에 그 나라의 왕은 나찰에게 이후로부터 각 집 마다 돌아가며 때가되면 사람들을 보낼 터이니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약정을 맺었다. 부처님을 모시는 어떤 가정에서 막 열 살이 된 아이가 순번에 따라 나찰에게 보내지게 되었다. 아이의 구명을 위해 종친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이 지성으로 염불을 드리자, 부처님의 크신 신력으로 인해 나찰은 아이에게 근접하지 못하여 아이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수조현가(水底弦歌)〉, 〈채릉녀(采菱女)〉, 〈이설경(狸说经)〉, 〈곽장생(郭长生)〉, 〈비승(费升)〉, 〈진아등(陈阿登)〉, 〈어복단문(鱼腹丹文)〉과 〈방산정매(方山亭魅)〉 등의 작품에서는 시가(詩歌)를 인용하기도 했다. 《유명록》은 전통적인 선괴(仙怪) 제재의 이야기를 계승하는 동시에 참신한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중 사람의 모습과 마음을 지닌 귀신이나 요괴(鬼怪)들의 인격화(人格化)된 묘사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훨씬 더 현실감 있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으니, 이런 측면의 성과가 바로 이전 작품들과 구별되는 《유명록》의 참신한 내용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총괄하여 말하자면, 《유명록》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짧고 간결하여 이야기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문장들은 문아(文雅)하고 섬세하게 묘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5. 가치와 영향
유송의 종실인 유의경은 육조시기 성행한 사전(史傳) 저작의 분위기나 동시대 혹은 전(前)시대의 다른 책에서 이야기를 채록하는 당시 저작풍토에서 휘하의 문인들과 함께 전후 시대를 아우르는 견문을 기록하여 《유명록》을 편찬했다. 특히 《유명록》은 사전의 서술 방식에 상상력이 기조가 된 소설 양식으로 전환을 시도하여 단편서술 보다는 좀 더 복잡한 구조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내용의 서사성이 강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편폭이 길어진 이와 같은 특징은 서술방식이 사(史)에서 문(文)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 작품은 분명히 이야기의 흥미와 완결성에 신경을 써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명록》에는 육조시기 다른 지괴소설처럼 사전의 서술 특징이 여전히 남아 있어 편찬자들의 견문이 그대로 기록되는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풍조와 가치관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유명록》의 많은 이야기들은 후세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유신완조(劉晨阮肇)” 이야기는 많은 문인들의 시사(詩詞)에 끊임없이 등장했을 뿐 아니라, 당대(唐代) 장작(張鷟)의 《유선굴(遊仙窟)》과 원대(元代) 왕자일(王子一)의 희곡 《유신완조오입도화원(劉晨阮肇誤入桃花源)》 등의 작품에서도 이야기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베개 속 이야기”의 제재는 후대에 끼친 영향이 훨씬 크다. 당대(唐代) 심기제(沈旣濟)의 《침중기(枕中記)》, 원대(元代) 마치원(馬致遠)의 《한단도성오황량몽(邯鄲道省悟黃粱夢)》, 명대(明代) 탕현조(湯顯祖)의 《한단몽(邯鄲夢)》과 청대(淸代) 포송령(蒲松齡)의 《속황량(續黃粱)》 등이 모두 이 제재를 계승한 것이다. 《유명록》의 “생사인연(生死因緣)” 제재는 탕현조의 《목단정(牧丹亭)》 이야기의 원형이며, “방아(龐阿)와 석씨(石氏)” 이야기는 당대 진현우(陳玄祐)의 《이혼기(離魂記)》, 원대 정광조(鄭光祖)의 《미청쇄천녀이혼(迷靑鎖倩女離魂)》의 바탕이 되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산을 하나 넘어가니 큰 계곡물이 나타났다. 그곳에 있던 빼어난 자태와 용모의 두 여인은 그릇을 들고 나오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유신, 완조 두 낭군께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릇을 가져오셨군요.’라고 말했다.……여인들의 집 지붕은 동기와가 얹혀 있었고, 집의 남쪽 벽과 동쪽 벽 쪽에는 각각 큰 침대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비단장막이 드리워져 있고, 장막 귀퉁이 쪽에는 방울이 달려 있었다. 침대에는 금방울과 은방울이 섞여 있었다.……저녁이 되자 그들에게 각각의 장막에 들어가 쉬게 하고, 두 여인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머물렀다. 여인들의 맑고 부드러운 말소리에 유신과 완조 두 사람도 근심을 잊어버렸다. 열흘이 지나고 두 사람이 돌아가기를 청하자 여인들은 ‘당신들께서 이곳에 오신 것도 운명에 따른 것일진대 어찌 돌아가려 하시는지요?’라고 말하니, 두 사람은 반년을 더 머무르게 되었다.[得度山出一大溪 溪邊有女子 資質妙絶 見二人持杯出 便笑曰 劉阮二郞 捉向所失流杯來……其家銅瓦屋 南壁及東壁各有一大床 皆施絳羅帳 帳角懸鈴……至暮 令各就一帳宿 女往就之 言聲淸婉 令人忘優 十日後欲求還去 女云君已來是 宿福所牽 何復欲還邪 遂停半年]” 〈유신완조(劉晨阮肇)〉
‧ “방아는 외모가 준수하고 태도가 의젓한 사람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석씨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집안에서 그를 보고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다. 얼마 후 방아는 석씨 딸이 자기를 찾아온 것을 보게 되었다. 방아 처는 질투가 매우 심한 여인이여서 이 사실을 듣고 여종을 시켜 석씨 딸을 결박해 그녀 집으로 끌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도중에 석씨 딸은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져버렸다.……방아 처는 이후로 경계를 더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석씨 딸이 방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직접 그녀를 잡아 석씨 집으로 끌고 갔다. 석씨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방금 내가 안채에서 나왔을 때에도 내 딸은 어미와 함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찌 지금 이곳에 있단 말입니까?’라 하며 즉시 종들을 시켜 안채에서 딸을 불러오게 하니, 방금 전까지 묶여있던 딸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석씨는 이것은 필시 무슨 연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아내를 시켜 딸에게 따져 물어보게 하였다. ‘예전 방아님이 와서 대청에 앉아 계실 때 소녀가 몰래 훔쳐본 적이 있었지요. 그 후로 그 분을 뵈러 꿈속에서 찾아갔던 것 같은데, 그 댁에 들어가다가 그 분 처에게 결박당한 것 같아요.’라고 석씨 딸은 대답했다. 석씨는 ‘어찌 세상에 이런 이상한 일이 있단 말이냐! 진정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혼령이 자기도 모르게 나타났을 것이니, 사라진 것도 아마 혼령일 것이야!’라며 탄식했다. 이후로 석씨 딸은 다른 이에게는 시집가지 않기로 맹세했는데, 이듬해 방아 처가 몹쓸 병에 걸려 약을 먹어도 효험이 없어 죽자, 방아가 석씨 집에 납폐를 보내 석씨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有龐兒者 美容儀 同郡石氏有女 曾內睹阿 必悅之 未幾 阿見此女來詣阿 阿妻極妬 聞之 使婢縛之 送還石家 中路遂化爲煙氣而滅……阿婦自是常加意伺察之 居一夜 方値女在齋中 乃自拘執 以詣石氏 石氏父見之愕眙 曰我適從內來 見女與母共作 何得在此 卽令婢僕於內喚女出 向所縛者奄然滅焉 父疑有異 故遣其母詰之 女曰昔年龐阿來廳中 曾竊視之 自爾仿佛卽夢詣阿 及入戶卽爲妻所縛 石曰天下遂有如此奇事 夫精情所感 靈神爲之冥者 滅者蓋其魂神也 卽而女誓心不嫁 經年 阿妻忽得邪病 醫藥無徵 阿乃授幣石氏女爲妻]” 〈방아석씨(龐阿石氏)〉
(2) 색인어:유명록(幽明錄), 유의경(劉義慶), 노신(魯迅),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 지괴소설(志怪小說), 신기괴이(神奇怪異), 인물야담(人物野談), 전설(傳說), 불교(佛敎), 도교(道敎), 세설신어(世說新語)
(3) 참고문헌
‧ 古小說鉤沈 手稿(魯迅, 浙江古籍出版社)
‧ 幽明錄(劉義慶 著, 鄭晩晴 輯注, 文化藝術出版社)
‧ 唐前志怪小說輯釋 修訂本(李劍國 輯釋, 上海古籍出版社)
‧ 唐前志怪小說史(李劍國, 人民文學出版社)
‧ 幽明錄(장정해 역주, 살림)
【이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