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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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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정(二程)이란 북송(北宋) 이학(理學)의 창시자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두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정전서》는 87만여 자에 달하는 정호와 정이의 언론(言論)을 한데 모아놓은 저작으로 명대(明代)에 간행되었다. 이정은 이학의 발전사에서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천리론(天理論), 거경함양설(居敬涵養說), 성인관(聖人觀) 등의 학설이 그만큼 이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후로 《이정전서》는 이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입문서이자 유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2. 저자

(1)성명: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頤)(1033~1107).
(2)자(字)·별호(別號):정호는 자(字)가 백순(伯淳), 아명(兒名)은 연수(延壽), 시호는 순공(純公), 세칭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고 부른다. 정이는 자가 이천(伊川), 시호는 정공(正公), 세칭 이천선생(伊川先生)이라고 부른다.
(3)출생지역:호북성(湖北省) 황피현(黃陂縣)에서 태어났으나, 오랜 기간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서 강학하였다.
(4)주요활동과 생애
정호는 북송(北宋) 인종(仁宗) 명도(明道) 원년(1032)에 태어나서 신종(神宗) 원풍(元豊) 8년(1085) 7월 9일 향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가우(嘉祐) 2년(1057)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호현(鄠縣) 주부(主簿)로 제수되었다. 그 후 15년간 상원현(上元縣) 주부, 택주(澤州) 진성령(晉城令), 태자중윤(太子中允), 감찰어사(監察御使), 감여주주세(監汝州酒稅), 진녕군절도판관(鎭寧軍節度判官)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원풍 8년 철종(哲宗)이 종녕시승(宗寧寺丞)에 제수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이는 북송 인종 명도 2년(1033)에 태어나서 휘종(徽宗) 대관(大觀) 원년(1107) 10월 5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로는 비교적 장수한 편에 속하지만, 그 길었던 생애만큼이나 그의 삶 또한 파란만장하였다. 황우(皇祐) 2년(1050) 18세에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인종에게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권유하는 〈상인종황제서(上仁宗皇帝書)〉를 올렸다. 가우 원년(1056) 24세 때 태학(太學)에 입학하여 〈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을 지었는데, 호원(胡瑗)이 높이 평가하여 학직(學職)을 주었다. 그 후 여주(汝州) 단련추관(團練推官), 서경국자감(西京國子監) 교수(敎授) 등을 역임했다. 철종 원우(元祐) 원년(1086)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敎書郞)에 제수되었으나 굳이 사양하자 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로 임명되었다. 철종 소성(紹聖) 원년(1097) 당쟁에 휘말려서 사천(四川) 부주(涪州)(현 사천성(四川省) 면양시(綿陽市))로 편관(編管)되었다. 원부(元符) 원년(1100) 휘종이 즉위하자 협주(峽州)로 옮겨가고 관직도 잠시 회복되었다. 숭녕(崇寧) 원년(1102) 신법(新法)을 회복한 휘종은 다시 정이의 관직을 빼앗고 그의 모든 저작을 소급하여 불살라 버리도록 명령했다. 정이 사후에 당화(黨禍)로 인해 모든 친구와 문인들이 감히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직 장역(張繹), 범역(范域), 맹후(孟厚), 그리고 윤돈(尹焞) 네 사람만이 참여했을 뿐이었다.
경력(慶曆) 6년(1046) 정호의 나이 15세, 동생 정이의 나이 14세 때 부친인 정향(程珦)의 명을 받들어 주돈이(周敦頤)를 찾아가 사사했다. 이로부터 형제는 북송 이학의 창시자로서 세칭 이정(二程)이라고 불리며, 그들의 학문은 오랫동안 강학했던 곳의 지명을 따서 낙학(洛學)이라 칭하였다. 그들의 학설은 이학이라는 이름 아래 선진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시켜나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훗날 주희(朱熹)에 의해 다시 계승 발전되어 정주학파(程朱學派)를 형성했다.
(5)주요저작
정호가 직접 저작한 것으로는 《정성서(定性書)》, 《식인편(識仁篇)》 등이 있다. 그리고 정이의 저작으로는 《주역정씨전(周易程氏傳)》, 《하남정씨경설(河南程氏經說)》 등이 있다. 이밖에 두 형제의 언론을 모아 편집한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 《하남정씨문집(河南程氏文集)》, 《하남정씨수언(河南程氏粹言)》, 《하남정씨외서(河南程氏外書)》 등이 있다. 명대에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묶어 《이정전서》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3. 서지사항

《이정전서》는 《하남정씨전서(河南程氏全書)》 또는 《이정자전서(二程子全書)》, 《이정선생서(二程先生書)》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저마다 다른 권수(卷數)에 여러 가지 판본으로 출간되었다. 명대와 청대(淸代)에 걸쳐 간행된 《이정전서》는 10여 종의 판본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만력(萬曆) 34년(1606) 서필달(徐必達)이 간행한 15책 68권본 《이정전서》로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되어 있다. 이 서적은 6종류, 즉 《하남정씨유서》 25권·《부록(附錄)》 1권, 《하남정씨외서》 12권, 《하남정씨문집》 12권·《유문(遺文)》 1권·《부록》 1권, 《주역정씨전》 4권, 《하남정씨경설》 8권, 《하남정씨수언》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정전서》에 구두(句讀)와 교감(校勘)을 가한 현행본 《이정집(二程集)》은, 왕효어(王孝魚)가 명청 시기에 유전하던 세 종류의 《이정전서》, 즉 청나라 도종영(涂宗瀛)의 《이정전서》를 저본으로 삼고, 명나라 서필달과 청나라 여류양(呂留良)의 《이정전서》를 참고해 점교(點校)한 것으로써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자료이다.

4. 내용

이 책은 《하남정씨유서》, 《하남정씨외서》, 《하남정씨문집》, 《주역정씨전》, 《하남정씨경설》, 《하남정씨수언》(이하 《유서》, 《외서》, 《문집》, 《역전》, 《경설》, 《수언》으로 각각 약칭함)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유서》는 이정의 제자들이 기록한 이정의 어록(語錄)으로 훗날 주희를 비롯한 허순지(許順之) 등의 공동 작업으로 교정하고 편찬하였다. 《외서》는 《유서》의 속편으로, 주희가 《유서》에 누락된 이정 어록을 채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외서》라고 부르는 까닭은 자료의 출전이 뒤섞여 너저분하고 신뢰성도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주희가 말했다. 《문집》은 이정의 시문과 잡저이다. 《경설》은 이정의 유가경전에 대한 해설이다. 《역전》은 전통적인 상수역(象數易)을 비판하면서 의리(義理)로써 주역(周易)을 새롭게 해석해낸 것이다. 《수언》은 양시(楊時)와 장식(張栻)에 의해 구어(口語)가 문어(文語)로 꾸며진 이정 어록이다.
송(宋)나라 때 《유서》와 《외서》는 개별적으로 출간되었는데, 순우(淳佑) 6년(1246) 이습지(李襲之)가 처음으로 《유서》와 《외서》를, 그리고 조사경(趙師耕)이 《유서》와 《외서》, 《문집》을 각각 합본해서 간행하였다. 그 후 장기(張玘)가 최초로 《유서》와 《외서》와 《문집》, 그리고 《경설》까지를 합본하여서 《정씨사서(程氏四書)》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원(元)나라 지치(至治) 3년(1323) 담선심(譚善心)이 《문집》을 간행하면서 이정의 유문(遺文)을 모아서 1권으로 만들고, 《주자변론호본착오서(朱子辨論胡本錯誤書)》를 《부록》 1권으로 덧붙였다.

5. 가치와 영향

《이정전서》는 송나라 이래로 줄곧 이학의 보전(寶典)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 책 속에는 리(理)를 우주의 본체로 삼아 천지만물의 생성과 심신, 성명(性命) 등의 문제를 상세히 논술하고 있으며, 리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 체계를 정립하였다. 그 중에 정호의 식인(識人)과 정성(定性), 정이의 성즉리(性卽理)와 주경(主敬), 격물치지(格物致知), 정성(正性) 등의 중요한 철학 개념과 명제는 철학사에서 최초로 제시된 것으로 후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정호는 정(情)을 통해 만물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학설을, 그리고 정이는 정(情)으로부터 생겨나는 사욕을 소멸시킬 때 세계의 정연한 질서와 합치될 수 있다는 심성수양론(心性修養論)을 각각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이자 철학적 공통점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을 현실 속에서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조선에서 임진왜란을 비롯한 두 차례의 호란(胡亂)으로 기존의 질서가 크게 동요하자, 당시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성리학(性理學)을 더욱 강화하여 사상의 통일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정서분류(程書分類)》를 간행하였다. 이것은 이정의 학문이 성리학의 근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동시에, 조선에 이정의 학문을 널리 전파하고 또 이를 통해 성리학적 질서를 재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마음은 본래 비어 있는 것인지라, 외물을 응접해도 자취가 없다. 그런 자취 없는 마음을 붙잡는 요령이 있으니, 보는 것이 그 법도가 된다. 외물이 마음을 가리고 눈앞에 교차하면, 그 마음 또한 옮겨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밖에서부터 옳지 않은 외물을 제지하여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이렇게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극복하고 〈천부(天賦)의〉 예(禮)를 회복하려 오래도록 노력하면 참됨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心兮本虛 應物無迹 操之有要 視爲之則 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 克己復禮 久而誠矣]” 〈사잠(四箴) 시잠(視箴)〉
• “사람이 지닌 떳떳한 도리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에 근본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지각이 외물의 유혹을 받아 물욕으로 바뀌면, 마침내 마음이 지닌 그 본래의 바름을 잃게 된다. 뛰어난 저 선각자들은 멈출 줄을 알기에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밖으로부터의 사특함을 막고 참된 마음을 간직하여 예(禮)가 아닌 것은 듣지 않았다.[人有秉彝 本乎天性 知誘物化 遂亡其正 卓彼先覺 知止有定 閑邪存誠 非禮勿聽]” 〈사잠(四箴) 청잠(聽箴)〉
• “마음이 발동하면, 말을 통해서 그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말을 할 때 깊은 생각 없이 함부로 말을 하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전일하게 된다. 더욱이 말이란 모든 행위의 기틀이 되니,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친목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길흉과 영욕도 오직 그 말이 자초한 것이다. 말을 지나치게 경솔하게 하면 허황되고, 말을 지나치게 번잡하게 하면 지리(支離)하게 된다. 자기 멋대로 말을 하면 상대는 반발하게 되고, 도리에 거스르는 말을 하면 상대도 도리를 어기는 말로 대꾸하게 된다. 법도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이 훈계의 말씀으로 삼가고 반성해야 하리라.[人心之動 因言以宣 發禁躁妄 內斯靜專 矧是樞機 興戎出好 吉凶榮辱 惟其所召 傷易則誕 傷煩則支 己肆物忤 出悖來違 非法不道 欽哉訓辭]” 〈사잠(四箴) 언잠(言箴)〉
• “철인(哲人)은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찰나의 기미를 알기에 생각에서부터 참되고자 하고, 지사(志士)는 의로운 행위에 힘쓰기에 하는 일에서부터 의로움을 지키려한다. 천리에 순종하면 넉넉하고 여유가 있지만, 인욕을 좇으면 오직 위태롭게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비록 다급한 순간에도 이것을 유념해서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스스로의 몸을 지켜야 한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습관이 천성처럼 이루어지면, 성현과 그 돌아가는 곳이 같게 되리라.[哲人知幾 誠之於思 志士勵行 守之於爲 順理則裕 從欲惟危 造次克念 戰兢自持 習與性成 聖賢同歸]” 〈사잠(四箴) 동잠(動箴)〉
(2)색인어:정호(程顥), 정이(程頤), 이정전서(二程全書),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 하남정씨외서(河南程氏外書), 하남정씨문집(河南程氏文集), 하남정씨수언(河南程氏粹言), 주역정씨전(周易程氏傳), 하남정씨경설(河南程氏經說).
(3)참고문헌
• 二程集(王孝魚 點校, 中華書局)
• 諸儒鳴道(不著撰輯者, 山東友誼書社)
• 程書分類(宋時烈, 學民出版社)
• 二程治教錄(源正之, 壽文堂)
• 程伊川《春秋傳》通解稿及び補遺(齋木哲郎, 鳴門敎育大學學校敎育部社會系敎育講座倫理學硏究室)
• 이정의 신유학(서원화 지음, 손흥철 옮김, 동과서)
• 정명도의 철학(張德麟 지음, 박상리․이경남․정성희 옮김, 예문서원)
• 정이(안은수 지음,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 정명도와 정이천의 철학(A.C. 그레이엄 지음, 이현선 옮김, 심산)
• 〈二程語錄考證及思想異同硏究〉(金洪水, 南開大學 博士學位論文)
• 〈《二程佚文初編》〉(金洪水, 中國과 中國學 第1卷 1號)
• 〈《河南程氏遺書》·《河南程氏外書》·《河南程氏粹言》의 作者不明語錄 鑑別〉(金洪水, 東亞人文學 第28輯)

【김홍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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