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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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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경집전(詩經集傳)》은 송(宋)나라 유학자 주희(朱熹)가 효종 15년(1177)에 쓴 《시경》 주석서로서 《시집전(詩集傳)》이라고도 한다.

2. 저자

(1) 성명:주희(朱熹(1130.10.18.~1200.4.23.))
(2) 자(字)·별호(別號):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이다.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고정선생(考亭), 운곡(雲谷), 창주(滄州), 둔옹(遯翁)이다. 시호는 문(文)이어서 주문공(朱文公)으로도 불린다.
(3) 출생지역:본적은 휘주부(徽州府) 무원현(婺源縣(강서성(江西省) 무원(婺源)))이고, 남검주(南劍州) 우계(尤溪(복건성(福建省) 우계현(尤溪縣)))에서 태어났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송나라 고종(高宗) 소흥(紹興) 18년(1148)에 19세의 나이로 진사(進士)에 급제해, 좌적공랑(左迪功郎)을 제수받고 천주동안현(泉州同安縣)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그 후 48년 동안 관직 활동을 했으며, 벼슬은 직보문각(直寶文閣)에 이르렀고 무원현(婺源縣) 개국남(開國男)의 식읍(食邑) 삼백호(三百戶)에 봉해지고 비각수창(秘閣修撰) 등의 직을 겸하였는데, 치적이 탁월하였다. 남송 영종(寧宗) 경원(慶元) 6년(1200)에 건양(建陽) 고정(考亭)의 창주정사(滄州精舍)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학문적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서, 1153년(24세)에 연평(延平) 이동(李侗(1093~1163))을 만나 정호(程顥(1032~1085))‧정이(程頤(1033~1107))의 사상을 전수 받았다. 그 후 1159년(30세)에 《상채어록(上蔡語錄)》을 교정하고, 1163년(34세)에 《논어요의(論語要義)》와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를 완성하고, 1168년(39세)에 《정씨유서(程氏遺書)》를 편집하고, 1172년(43세)에 《논맹정의(論孟精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서명해의(西銘解義)》를 완성하고, 1173년(44세)에 《태극도전통서(太極圖傳通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정씨외서(程氏外書)》를 완성하고, 1174년(45세)에 《대학혹문(大學或問)》‧《중용혹문(中庸或問)》을 완성하고, 1175년(46세)에 여조겸(呂祖謙)(1137~1181)과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고 육구연(陸九淵) 형제와 논쟁하였다. 1177년(48세)에 《논어집주》‧《맹자집주》‧《논어혹문》‧《맹자혹문》을 완성하였다. 1184년(55세)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1187년(58세)에 《시집전(詩集傳)》을 완성하였다. 1190년(61세)에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완성하고, 1192년(63세)에 건양 고정에 집을 지었다. 1194년(65세)에 장사에 부임하여 악록서원(岳麓書院)을 복구하고,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준공하였다.
(5) 주요저작
주희의 저술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우 많다. 그러나 북송의 주돈이(周敦頤)와 정호‧정이의 학설을 이어받아 송나라의 이학(理學)을 집대성한 학자로서의 대표작인 《대학장구(大學章句)》‧《중용장구(中庸章句)》‧《논어집주(論語集注)》‧《맹자집주(孟子集注)》 등의 사서 주석서와 《시집전(詩集傳)》‧《주역본의(周易本義))》, 그리고 그의 문집인 《주자대전(朱子大全)》‧《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이 주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3. 서지사항

주희가 1187년에 《시집전》을 완성했을 때는 본래 20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권수(卷首)에는 〈강령(綱領)〉이 있었고 뒷부분에는 〈시서변설(詩序辨說)〉 1권이 부록으로 있었다. 하지만 명(明)나라 감본(監本)과 방각본(坊刻本)에서 20권을 병합하여 8권으로 재편하였으며, 또 〈강령〉과 〈시서변설〉을 떼어내어 수록하지 않았고, 1177년에 지은 〈시집전서〉를 책 앞에 실었다. 《시집전》은 현재 송나라에서 인쇄한 판본이 2부 존재하는데 모두 온전하지 않다. 그중 1부는 북경도서관(北京圖書館)에 소장되어 있고, 다른 1부는 항주(杭州) 정씨팔천권루장서(丁氏八千卷樓藏書) 중에 있는데 8권이 남았다. 원(元)나라에서 인쇄된 판본 역시 2부가 남아 있는데, 1부는 중국 국가도서관(國家圖書館)에 남아 있고, 다른 1부는 현재 대만에 남아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인쇄한 판본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사부총간(四部叢刊)》 삼편(三編)에는 송나라에서 인쇄된 판본 《시집전(詩集傳)》 20권 영인(影印) 되어 원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4. 내용

《시집전》은 주희가 한(漢)나라‧당(唐)나라 시대의 〈시서(詩序)〉 중심 주석서인 《모시정의(毛詩正義)》를 비판하고 시가 지닌 본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지어졌다. 〈시서〉는 주로 시가 창작된 배경과 동기 등을 언급한 것으로, 주로 정치적‧역사적인 사실을 다룬 내용이 많았으며, 정치적 효용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따라서 《모시》의 시 해석은 대부분 이러한 정치성을 띤 〈시서〉의 의미를 중심으로 시어나 시구의 음과 의미를 연구하여 찾는 방식으로 주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송의 구양수(歐陽修)‧정초(鄭樵) 등의 유학자들은 〈시서〉의 설에 입각한 정치적 해석에 대해 회의를 갖고, 〈시서〉의 작자에 대해 의문을 품어 이를 반박하는 등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주희는 이러한 선유의 학설을 받아들여 〈시서〉를 재검토하고 “시는 시로써 풀이해야 한다.[以詩解詩]”라는 원칙 아래에, ‘시의 장구를 해석하는 것으로 주를 삼고, 시 어구의 음과 뜻을 실마리로 삼는 방식[章句以綱之 訓詁以紀之]’으로 시를 해석해, 시 자체의 문학성을 중시하였음을 드러내었다. 또 ‘외워 읊조려 그 뜻을 분명히 드러내고 깊이 익혀서 그 뜻을 체득하여, 성정의 은미한 사이에서 살피고 말과 행동이 처음 유래하는 곳에서 살피면 수신‧제가‧평천하의 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諷詠以昌之 涵濡以體之 察之情性隱微之間 審之言行樞機之始 則修身及家 平均天下之道 其亦不待他求而得之於此矣]’라고 〈시집전서詩集傳序〉에서 밝혀, 《시집전》의 해석이 《대학》에 기초한 성리학 수양론, 세계관과 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주남〉, 〈소남〉의 시 해석에서 대부분 〈시서〉의 설을 그대로 따르는 등 《시집전》의 해석이 상당 부분 〈시서〉의 설에 입각한 《모시정의》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거나 보충하는 방식을 띠고 있어 《모시정의》의 해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주희가 〈시서〉의 설에 입각한 풀이를 반대하고 시로써 시를 풀이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학설이 음시설(淫詩說)이다. 주희는 국풍을 〈주남〉과 〈소남〉의 정풍(正風)과 13국풍(國風)의 변풍(變風)으로 구분하였는데, 정풍은 교화의 효능을 맡고 변풍은 경계의 기능을 가진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를 근거로 13국풍의 시 가운데 남녀가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는 시를 대부분 음시로 규정해서, 《모시정의》의 시에서 군주나 정치를 풍자한 시라는 주장과 해석을 달리했다.
《시집전》에서는 또 《모시(毛詩)》의 체제와 장구의 구분을 달리하였다. 주희는 《모시》에서 각 시의 맨 앞에 있던 〈시서〉를 책의 뒷부분에 놓고, 자신이 분석한 시 전체의 뜻을 첫 번째 장의 장구를 풀이한 내용 가운데 넣어두어서 〈시서〉를 대신해서 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또 《모시》 소아의 편차를 달리했다. 《모시》에서 이아(二雅)와 주송(周頌)에서 쓰인 ‘십(什)’이란 말이 시 10편을 엮어 1권으로 만든다는 의미인데, 《모시》의 소아에는 〈녹명지십(鹿鳴之什)〉, 〈남유가어지십(南有嘉魚之什)〉는 각각 13편이 실려 있고 〈어조지십(魚藻之什)〉에는 14편이 실려 있어 ‘십(什)’의 본래 의미와 부합하지 않는다. 《모시》의 정현은 생시(笙詩)로 알려진 6편의 시 〈남해(南陔)〉‧〈백화(白華)〉‧〈화서(華黍)〉‧〈유경(由庚)〉‧〈숭구(崇丘)〉‧〈유의(由儀)〉가 시의 경문이 없으므로 당시 현존하는 시편만 세어 엮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주희는 이 6편을 실제 편수에 포함시키고, 《의례(儀禮)》의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연례(燕禮)에서 〈어려(魚麗)〉‧〈유경(由庚)〉‧〈남유가어(南有嘉魚)〉‧〈숭구(崇丘)〉‧〈남산유대(南山有臺)〉‧〈유의(由儀)〉가 같은 시기에 불려졌고, 또 시의 소재와 시어의 뜻이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편차를 옮겨 새로 체제를 구성하였다.
또 주희는 대부분 시의 장(章)과 구(句)를 《모시》에 따라 분류했지만, 〈간혜(簡兮)〉‧〈재치(載馳)〉‧〈벌목(伐木)〉‧〈어조(魚藻)〉‧〈대명(大明)〉‧〈영대(靈臺)〉‧〈생민(生民)〉‧〈행위(行葦)〉‧〈첨앙(瞻卬)〉‧〈천작(天作)〉‧〈작(酌)〉‧〈비궁(閟宮)〉‧〈장발(長發)〉 등 13편의 시는 운(韻)의 합치 여부, 장구의 내용, 문장의 흐름 등의 상관관계 등에 따라 《모시》를 바꾸었는데 선유(先儒)나 당대의 유자들, 혹은 자신의 견해에 따라 바꾸었다.

5. 가치와 영향

《모시》는 왕과 제후 등 위정자의 선악과 정치의 득실에 대한 평가를 시 창작 동기로 밝힌 〈시서〉의 내용을 근거로 시를 해석했기 때문에, 시의 내용 역시 정치적 효용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역사적인 사건과 시의 내용이 일치되면 해석상에 무리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서〉와 《모시》의 시의 내용이 상당 부분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시서〉에 대한 의심은 후한(後漢) 때부터 줄곧 있었으나, 당나라 때 《오경정의(五經正義)》로 확정되어 출판됨에 따라 《모시》의 설이 정설화되면서 《시경》의 정치적 효용이 강조하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시 해석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시경》의 인격도야의 수양적 기능과 정치적 소양을 기르기 위한 교육적 기능과는 차이가 생김은 물론, 시 자체가 가진 문학성 또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북송의 구양수(歐陽修), 정초(鄭樵) 등은 〈시서〉 설에 입각한 시 해석을 반박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는데, 남송 초기에 주희가 이런 여러 학설을 흡수‧집대성하여 《시집전》을 완성하였다. 그는 〈시서〉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시는 시로써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 자체에서 의미를 구하며 시가 지닌 문학성을 강조하였고, 시 해석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은밀한 의미를 파악하고 성정을 수양해서, 수신(修身)에서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를 강조하는 성리학적 수양론을 확립하였다.
주희는 새로운 시 해설에 근거하여, 남녀 연애시의 음시설(淫詩說), 독자의 수용론 관점이 강조한 사무사설(思無邪說), 도덕적‧정치적인 바른 도리와 변화에 따른 풍아정변설(風雅正變說), 이남(二南)(주남(周南)‧소남(召南))을 근거로 한 수양론을 강조한 이남설(二南說), 《모시》의 체계와 장구를 바꾼 체제의 개편 등의 학설을 새로 제시하였다. 《시집전》이 나온 이후, 당시까지 절대적 권위를 지녔던 《모시》의 설은 쇠퇴하고, 《시집전》의 설이 원(元)나라 때부터 과거시험의 《시경》 해석의 표준으로 자리함에 따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시》의 설 또한 학계에서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 원(元)‧명(明)‧청(淸)의 《시경》학은 주자를 받드는 종주(宗朱)와 주자의 학설을 반대하는 반주(反朱)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시집전》이 그대로 수용되어 널리 전해진 것은 아니다. 명나라 영락(永樂) 시기(1402~1424)에 호광(胡廣(1370~1418)) 등이 칙명을 받아, 《시집전》을 위주로 편찬한 《시경대전(詩經大全)》이 조선 초기에 전해지면서 널리 전파되었다. 그 후에 주희의 《시경》 해석이 과거시험의 표준 해석이 되고 언해 등을 통해 정밀하게 해석되면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쳐 《시경》의 교육의 교재로써 쓰일 뿐만 아니라, 《시경》의 내용이 인용되는 대부분 글과 논의에서 해석의 기준으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17세기 우리나라에서 《시경》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해서 18세기, 19세기 《시경》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논의가 있었으나, 여전히 주희의 《시집전》의 설은 절대적인 지위에 있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사람이 태어나서 고요한 것은 하늘이 내려준 본성[性]이요, 사물에 감동하여 움직이는 것은 본성의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미 하려는 것이 있으면 생각이 없을 수 없고, 이미 생각이 있으면 말이 없을 수 없고, 이미 말이 있으면 말로써 다할 수 없어서, 슬퍼 탄식하고 읊조리며 감탄하는 여운에 드러나는 것은, 반드시 자연스러운 음향과 가락이 있어도 그칠 수 없으니, 이것이 시가 지어지는 이유이다.[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 夫旣有欲矣 則不能無思 旣有思矣 則不能無言 旣有言矣 則言之所不能盡 而發於咨嗟詠歎之餘者 必有自然之音響節族而不能已焉 此詩之所以作也]” 《시경집전詩經集傳》 〈서(序)〉
• “시는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동하여 말의 나머지에 나타난 것이니, 마음의 감동하는 것에 사악함과 바름이 있다.[詩者 人心之感物而形於言之餘也 心之所感 有邪正 故言之所形 有是非]” 《시경집전詩經集傳》 〈서(序)〉
• “공자께서 “《시경》 삼백 편을 한마디 말로 덮을 수가 있으니,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시(詩)의 말이 좋고 나쁨이 같지 않아서 혹은 권면하고 혹은 징계하여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성정의 바름을 얻게 할 수 있다.[孔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蓋詩之言 美惡不同 或勸或懲 皆有以使人得其情性之正]” 《시경집전(詩經集傳)》 〈노송(魯頌) 경(駉)〉
(2) 색인어: 시경집전(詩經集傳), 시집전(詩集傳), 주희(朱熹), 시서변설(詩序辨說), 모시정의(毛詩正義), 음시설(淫詩說), 사무사설(思無邪說), 풍아정변설(風雅正變說), 시경대전(詩經大全)
(3) 참고문헌
• 《毛詩正義》(孔穎達 撰, 北京大學出版社)
• 《朱子年譜》(王懋竤)
• 《詩傳大全》(胡廣)
• 《朱子詩經學硏究》(李再薰,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4)
• 《詩經集傳》(성백효 역, 전통문화연구회)
• 《(五書五經讀本) 詩經集傳》(박소동 역, 전통문화연구회)


【김명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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