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강유위(康有爲)는 근대 중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청나라 말기에 개혁 이론에 기초한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주도한 변법 사상가이다. 본서는 광서 17년(1891)에 14권으로 간행되었다.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대동서(大同書)》와 함께 강유위의 3대 대표 저작으로 일컬어지며, 이 세 책은 강유위가 추진했던 변법 이론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와 사상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신학위경고》의 주요 내용은 금문경학(今文經學)의 입장에서 고문경학의 토대가 되는 고문경전(古文經典)이 모두 유흠(劉歆)에 의해 조작된 위조 경전임을 밝히는 것이다. 출판 이후에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무술변법이 실패한 이후에는 금서가 되기도 하였다.
2. 저자
(1) 성명:강유위(康有爲)(1858~1927)
(2) 자(字)·별호(別號):원명(原名)은 조이(祖詒), 자(字)는 광하(廣夏), 호(號)는 장소(長素)·경신(更甡)·서초산인(西樵山人)·유존수(游存叟)·천유북인(天游化人) 등. 별칭은 남해선생(南海先生) 또는 강남해(康南海).
(3) 출생지역:광동성(廣東省) 남해현(南海縣)
(4) 주요활동과 생애
강유위는 청나라 말기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이다. 자신의 고향에 만목초당(萬木草堂)이라는 사숙(私塾)을 열고,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변법유신에 대한 정치적 성향을 표출했고, 양계초(梁啓超)·진천추(陳千秋)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그 후 북경(北京)과 상해(上海)에서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공거상서(公車上書)’를 올려 변법의 실시를 주장했고, 1897년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배워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로 개혁해야 한다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98년에는 그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이 광서제(光緖帝)에게 수용되어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는 개혁을 직접 주도했다. 그러나 100일 남짓한 기간 만에 원세개(袁世凱)의 배반과 서태후(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쿠데타로 ‘100일 변법’으로 끝나버렸고, 양계초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생활 중에 보황회(保皇會)를 조직하여 황제의 복위를 시도하거나 공교국교화(孔敎國敎化)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13년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
(5) 주요저작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춘추동씨학(春秋董氏學)》, 《예운주(禮運注)》, 《중용주(中庸注)》, 《맹자미(孟子微)》, 《논어주(論語注)》, 《춘추필삭미언대의고(春秋筆削微言大義考)》 등이 있다. 그의 저서는 강의화(姜義華)·장영화(張榮華)의 편교(編校)를 거쳐 간행된 《강위유전집(康有爲全集)》(중국인민대학출판사, 2007)에 모두 실려 있다.
3. 서지사항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는 고문 경전이 모두 유흠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위조 경전이라는 것을 고증한다는 의미이다. ‘신학(新學)’은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의 학문을 말하며, ‘위경(僞經)’은 《주례(周禮)》·《일례(逸禮)》·《고문상서(古文尙書)》·《좌전(左傳)》·《모시(毛詩)》 등의 고문경전을 말한다. 고문경전은 모두 왕망 시기의 신학(新學)이자 유흠이 조작한 위조 경전이라는 것이다. 모두 14권, 20여 만자에 이른다. 진(秦)나라의 분서(焚書) 과정에서 육경(六經)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점, 고문경전은 모두 유흠의 위작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 주요 내용이며, 위경(僞經)의 전수 과정을 표로 정리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4. 내용
이 책은 강유위가 공양학(公羊學)을 중심으로 한 금문경학(今文經學)의 입장에서 고문경학(古文經學)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책이다. 고문경학은 전한(前漢) 시대에 발견된 《주례(周禮)》·《일례(逸禮)》·《고문상서(古文尙書)》·《좌전(左傳)》·《모시(毛詩)》 등을 말하는데, 강유위는 이 책들이 모두 유흠(劉歆)에 위해 조작된 위조 경전이라고 단언하였다. 즉 유흠이 왕망(王莽)의 왕위 찬탈과 제도 개혁을 돕기 위해 이 책들을 거짓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문경학은 전한 때의 경학이 아니라 신나라 왕망 때의 학문이기 때문에 신학(新學)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청대에 정현(鄭玄)과 허신(許愼) 등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던 한학(漢學)도 또한 한대(漢代)의 학문이 아니라 위경에 기초한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이 책은 고문경전이 유흠이 조작한 위경이자 신학임을 고증한 것이다. 총 14권으로 구성된 책 전체의 핵심 내용은 전한시대의 경학에는 결코 고문(古文)이 없으며, 고문경전은 모두 유흠에 의해 위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대해서는 특히 〈사기경설족증위경고(史記經說足證僞經考)〉·〈한서예문지변위(漢書藝文志辨僞)〉·〈한서하간헌왕노공왕전변위(漢書河間獻王魯共王傳辨僞)〉·〈한서유림전변위(漢書儒林傳辨僞)〉·〈서유흠왕망전변위(書劉歆王莽傳辨僞)〉·〈한서분공위경고(漢書憤攻僞經考)〉 등의 6편에서 구체적으로 변론하였다. 강유위는 위경이 유흠에 의해 지어지고 정현에 의해 완성되어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고 말한다. 하간헌왕(河間獻王)과 노공왕(魯共王)이 고문경전을 발견했다는 것도 유흠이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후세에 한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가규(賈逵)·마융(馬融)·허신(許愼)·정현(鄭玄)의 학문도 사실은 신학이지 한학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외의 몇 가지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진나라의 분서(焚書)에도 육경(六經)은 없어지거나 손상되지 않았다. 당시 분서는 민간의 책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박사관에 소장되어 있던 경전은 완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문자의 측면에서 고문은 한대 이전의 문자인 전서(篆書)로, 금문은 한대의 통용 문자인 예서(隷書)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그런데 강유위는 공자의 시대와 진한시대에 모두 전서를 사용했기 때문에 고문과 금문을 글자체로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유흠이 자신의 위조를 믿게 하기 위해 고문의 글자체로 위서를 기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셋째, 유흠이 중비부(中秘府)에 소장된 책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고문경전을 발견했다고 전해지지만, 사실은 유흠이 자신의 경전 위조를 은폐하기 위해 제멋대로 고서를 고치거나 끼워 넣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흠은 왕망의 찬탈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공자의 미언대의를 없애버리기 위해 고문경전의 위조를 자행했다고 비판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양계초(梁啓超)(1873~1929)는 강유위의 3대 저서를 평가하면서, 《신학위경고》는 태풍, 《공자개제고》는 화산 대폭발, 《대동서》는 대지진에 비유하였다.(《청대학술개론》) 이와 같이 《신학위경고》는 당시의 정치와 학술계에 매우 큰 파장을 일으킨 대작이다. 당시까지 중국의 학술과 정치에서 이론적 근본으로 여겨졌던 경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이 출판된 이후에 금서(禁書)와 분서(焚書)를 요청하는 탄핵이 이어졌고, 결국 1년 만에 청나라 조정에 의해 원판이 폐기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처럼 학술계에서는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유교 경전에 대한 회의는 전통적인 학문의 근간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옛 문헌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철저한 점검이 요청됨으로써 학술계에 새로운 학문 풍토를 조성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위조된 경전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성인이 제작한 경전을 어지럽힌 것은 유흠에서 시작되었고, 위조된 경전을 널리 통행시켜 공자(孔子)의 정통을 찬탈한 것은 정현에 의해 이루어졌다.……이에 공자의 경전을 빼앗아서 주공(周公)에게 주고, 공자를 낮추어서 경전의 전승자로 삼았다.[始作僞經亂聖制者 自劉歆 布行僞經簒孔統者 成於鄭玄……於是奪孔子之經以與周公 而抑孔子爲傳]” 〈신학위경고서(新學僞經考序)〉
‧ “유흠은 경전을 날조하여 왕망의 찬탈을 도왔고 스스로 신(新) 왕조의 신하가 되었으니, 그 경전이 신학이 되는 것은 명분과 의리에서 정확하게 맞는다. 다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후세에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이 다투어, 두 문호가 물과 불처럼 서로 대립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후세에 한학으로 지목된 것은 모두 가규·마융·허신·정현의 학문으로, 그것은 신학(新學)이지 한학이 아니다. 따라서 송대 학자들이 높여서 풀이한 경전은 대부분 위조 경전이지 공자의 경전이 아니다.[歆旣飾經左簒 身爲新臣 則經爲新學 名義之正 復何辭焉 後世漢學宋學互爭 門戶水火 自此視之 凡後世所指目爲漢學者 皆賈馬許鄭之學 乃新學 非漢學也 卽宋人所尊述之經 乃多僞經 非孔子之經也]” 〈신학위경고서(新學僞經考序)〉
‧ “유흠이 고문 경전을 거짓으로 지은 것은 책을 교정하는 책임자의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서부의 책에 거짓으로 가탁하여 제멋대로 고치고 어지럽힐 수 있었다.[劉歆僞撰古經 由於總校書之任 故得託名中書 恣其竄亂]” 〈한서예문지변위(漢書藝文志辨僞)〉
(2) 색인어:강유위(康有爲),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유흠(劉歆), 신학(新學), 위경(僞經), 고문경전(古文經典), 금문경전(今文經典), 한학(漢學), 송학(宋學)
(3) 참고문헌
‧ 康有爲全集(姜義華·張榮華 編校,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7)
‧ 新學僞經考(錢鍾書 主編, 三聯書店, 1998)
‧ 淸代學術槪論(梁啓超, 《飮氷室合集》8, 中華書局, 1990)
【김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