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7세기에 활동한 학자 송시열(宋時烈)이 1683년(숙종 9)에 이황(李滉)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정경세(鄭經世)의 《주문작해(朱文酌海)》에 수록된 주희(朱熹)의 저술 중에서 긴요하다고 판단한 것들을 선별·정리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논평을 첨부하여 편집한 책이다.
2. 저/편자
(1) 성명:저자는 주희(朱熹)(1130~1200). 편자는 송시열(宋時烈)(1606~1689)
(2) 자(字)·호(號):주희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며,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송시열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3) 출생지역:주희는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 송시열은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4) 주요활동과 생애
주희
남송(南宋) 대의 유학자로, 북송(北宋)대에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 등에 의해 새로 정립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였다. 14세 때 부친이 서거한 후 부친의 지기(知己)인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배웠고, 과거 급제 후 24세 때 주돈이·정호·정이 등의 학통을 이은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찾아가 사사(師事)하면서 이정(二程)의 학문을 배웠다. 19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관직 생활 중에 황제에게 여러 차례 봉사(封事)와 상서(上書)를 올려 유교적 덕치(德治)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만년에 정적(政敵)인 한탁주(韓侂胄)가 주희에 대해 중상모략하여 그의 학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면서, 저술의 간행·유포 및 정치활동 등의 모든 공적 활동이 금지되었다. 1200년에 서거하니 향년 71세였다. 송 영종(寧宗) 때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송 이종(理宗) 연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이후 신국공(信國公)으로 추봉되었다가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로 고쳐 봉해졌고 문묘(文廟)에 배향·종사되었다.
송시열
1625년(인조 3) 무렵부터 김장생(金長生)에게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1633년에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壯元)으로 합격한 후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후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송시열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재야의 학자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 기간은 매우 짧았으며, 일생의 대부분을 재야에 머물면서 산림(山林)으로서의 정계와 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송시열은 효종에게 〈기축봉사(己丑封事)〉·〈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북벌론(北伐論)을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 현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1659년 현종(顯宗) 즉위 후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은 서인(西人) 예론(禮論)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674년(현종 15) 제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송시열은 이듬해 1월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고,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9년 1월 숙종(肅宗)이 숙의(淑儀) 장씨(張氏)의 아들(후일의 경종)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이 문제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면서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같은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송시열의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5) 주요저작
주희의 주요 저작은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역본의계몽(周易本義啓蒙)》, 《시집전(詩集傳)》, 《대학중용장구혹문(大學中庸章句或問)》, 《논어맹자집주(論語孟子集註)》,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근사록(近思錄)》 등
송시열의 주요 저작은 《송자대전(宋子大全)》,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계녀서(戒女書)》 등
3. 서지사항
《주문초선》은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유자(丁酉字)로 간행되었다.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은 실려 있지 않다. 《주문초선》에 수록된 주희의 저술은 권1에 〈서(書)〉 23편, 권2에 〈봉사(封事)〉 2편, 권3에 〈봉사〉 1편과 〈주의(奏箚)〉 7편, 권4에 〈의장(議狀)〉 1편, 〈설(說)〉 1편, 〈서(序)〉 3편 등 총 38편이다. 서술 방식을 보면, 먼저 주희 저술의 원문을 큰 글씨로 기록하되 원문에 본래 있던 세주(細註)들은 생략하였다. 원문 다음에는 그 글에 대한 송시열 자신의 논평을 쌍행세주(雙行細註)로 기록했는데, 논평은 주로 서간문에 집중되어 있다.
4. 내용
《주문초선》에 실린 주희 저술의 핵심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는데, 첫째는 군주의 정심(正心)·수신(修身) 및 학문 수련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올바른 국정 운영을 위한 정치 원칙에 관한 내용이다.
군주의 정심·수신과 관련하여 주희는 〈여진시랑서(與陳侍郞書)〉에서 국정의 병폐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고, 〈무신봉사(戊申封事)〉에서는 군주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모든 일이 다 바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학문 연마에 힘쓸 것을 제시하였다. 〈행궁편전주차(行宮便殿奏箚)〉 중 두 번째 글에서 주희는 영종이 즉위 초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급선무는 ‘학문의 연마’라고 전제한 다음, 학문의 방도는 궁리(窮理)가 가장 중요하고 궁리의 요체는 독서(讀書)이며, 독서는 정밀하게 해야 하고 정밀함을 유지하는 근본은 거경지지(居敬持志)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 외에도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기유의상봉사(己酉擬上封事)〉 등에도 왕의 학문 수련을 강조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국정 운영의 원칙에 관한 내용은 다시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엄격히 분별해서 소인을 물리치고 군자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주문초선》에 수록된 봉사(封事)와 주차(奏箚)에는 어진 인재를 대신(大臣)으로 등용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중한 내용들이 다수 실려 있다. 또, 주희는 〈여류승상서(與留丞相書)〉 중 첫 번째 편지에서 유정(劉正)이 붕당(朋黨)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 우려를 표한 다음, 군자를 등용하고 이들이 군자당(君子黨)을 형성하도록 적극 지원해야 하며, 나아가 군주까지도 군자당의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둘째는 금(金)나라에 대한 복수(復讎)의 대의(大義)를 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주희는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던 이들 중 하나였으며, 《주문초선》에 수록된 편지와 봉사·주차 등에는 이와 같은 주희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그는, 금나라는 만대(萬代)가 지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나라의 원수이므로 반드시 복수해야 하며, 만약 현재 국력이 약해서 복수할 수 없다면 ‘자치자강(自治自强)’의 내수(內修)에 힘써 복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유행하던 주화론(主和論)에 대해서는 이를 ‘불의(不義)한 사설(邪說)’로 규정하면서, 국정이 문란해지고 국력이 쇠퇴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주화론에 있다고 비판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주문초선》에 수록된 글은 주희의 저술이지만 그 글을 선별한 이는 송시열이다. 따라서 이 책은 결국 송시열이 주희의 말을 빌어서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피력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은 《주문초선》을 경연의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편찬하였다. 숙종~영조대의 《주문초선》 진강(進講) 사례들을 검토해보면, 《주문초선》 진강은 현재의 국왕보다는 주로 미래의 국왕인 세자나 세손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왕실과 조정에서 《주문초선》을 세자·세손을 위한 주자학의 기초 교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조(正祖)는 세손 시절이던 1774년(영조 50)에 주희와 송시열의 저술 중에서 중요한 것을 선별하여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편찬했는데, 이때 주희의 저술은 《주문초선》에 실린 글 중에서 선별하였다. 이는 《주문초선》이 정조의 주자학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收拾身心’은 ‘마음을 보존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는 것’을 이름이며 ‘保惜精神’은 ‘色을 경계하고 술을 금지하는 것’을 이름이니, 이것은 진실로 인군(人君)이 지극한 덕을 닦는 중요한 방도이다.[收拾身心 存心克己之謂也 保惜精神 戒色止酒之謂也 此實人君至德要道]” 〈권1 여조상서서(與趙尙書書)〉
• “인군(人君)이 미워하는 바로 붕당(朋黨)보다 심한 것이 없지만, 군자(君子)들이 당(黨)을 만드는 것을 미워한다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게 된다.[人君之所惡 莫甚於朋黨 然惡君子之爲黨 則國必亡]” 〈권1, 여유승상서(與留丞相書)〉
• “학문을 하는 방도는 궁리(窮理)가 가장 중요한데, 궁리의 요체는 반드시 독서(讀書)에 있다. 독서하는 방법은 차례에 따라 정밀하게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정밀함을 다하는 근본은 거경(居敬)과 지지(持志)에 있으니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이치이다.[蓋爲學之道 莫先於窮理 窮理之要 必在於讀書 讀書之法 莫貴於循序而致精 而致精之本 則又在於居敬而持志 此不易之理也]” 〈권3, 행궁편전주차2 行宮便殿奏箚 二〉
(2) 색인어:송시열(宋時烈), 주문초선(朱文抄選), 주희(朱熹), 경연(經筵), 송자대전(宋子大全), 주자대전(朱子大全),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정조(正祖)
(3) 참고문헌
• 朱文抄選(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2269-v.1-2)
•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김문식, 문헌과 해석, 2000)
• 〈宋時烈의 《朱文抄選》 편찬과 그 의미〉(강문식, 《한국문화》 63, 2013)
【강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