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정조(正祖)가 주희(朱熹)의 문집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수록된 편지 중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것 100편을 뽑아 편찬한 책으로, 1794년(정조 18)에 간행되었다. 정조는 《주서백선》을 유학 교육과 진흥의 핵심 서적으로 중시했으며, 그에 따라 이 책은 정조가 편찬한 주자서(朱子書) 선집(選集) 중에서 시선집(詩選集)인 《아송(雅誦)》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배포되었다.
2. 저/편자
(1) 성명:저자는 주희(朱熹)(1130~1200). 편자는 정조(正祖)(1752~1800)로 이름은 성(祘).
(2) 자(字)·호(號):주희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며,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정조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3) 출생지역:주희는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 정조는 한성(漢城)
(4) 주요활동과 생애
주희
남송(南宋) 대의 유학자로, 북송(北宋)대에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 등에 의해 새로 정립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였다. 14세 때 부친이 서거한 후 부친의 지기(知己)인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배웠고, 과거 급제 후 24세 때 주돈이·정호·정이 등의 학통을 이은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찾아가 사사(師事)하면서 이정(二程)의 학문을 배웠다. 19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관직 생활 중에 황제에게 여러 차례 봉사(封事)와 상서(上書)를 올려 유교적 덕치(德治)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만년에 정적(政敵)인 한탁주(韓侂胄)가 주희에 대해 중상모략하여 그의 학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면서, 저술의 간행·유포 및 정치활동 등의 모든 공적 활동이 금지되었다. 1200년에 서거하니 향년 71세였다. 송 영종(寧宗) 때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송 이종(理宗) 연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이후 신국공(信國公)으로 추봉되었다가 다시 휘국공(徽國公)으로 고쳐 봉해졌고 문묘(文廟)에 배향·종사되었다.
정조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영조(英祖)의 손자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1759년(영조 35)에 세손(世孫)에 책봉되었고, 1762년 사도세자가 사망한 후 동궁(東宮)의 지위에 올랐다. 1775년 11월부터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였으며 이듬해(1776) 3월 영조가 서거한 후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조는 선왕(先王) 영조를 계승하여 탕평정책(蕩平政策)을 추진했으며, 어제(御製)·어필(御筆) 보관 기구였던 규장각(奎章閣)을 학술기관으로 확대·개편하여 학문 연구와 서적 편찬 등을 규장각이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초계문신제도(抄啟文臣制度)와 빈흥과(賓興科) 등을 실시하여 인재 양성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또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諡號)를 올리고, 묘소를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했으며, 화성(華城)을 건설하였다. 이밖에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의 난전(亂廛) 금지권을 철폐한 신해통공(辛亥通共) 실시, 서얼허통(庶孽許通)을 위한 〈서류허통절목(庶類許通節目)〉 제정 등 각종 개혁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1800년 6월에 서거했으며,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다. 능(陵)은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하였고 능호(陵號)는 건릉(健陵)이다.
(5) 주요저작
주희의 주요 저작은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역본의계몽(周易本義啓蒙)》, 《시집전(詩集傳)》, 《대학중용장구혹문(大學中庸章句或問)》, 《논어맹자집주(論語孟子集註)》,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근사록(近思錄)》 등
정조의 주요저작은 《홍재전서(弘齋全書)》, 《어정대학유의(御定大學類義)》, 《오경백선(五經百選)》,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어정사부수권(御定四部手圈)》, 《아송(雅誦)》, 《주서백선(朱書百選)》 등
3. 서지사항
《주서백선》은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1에 12편, 권2에 17편, 권3에 15편, 권4에 18편, 권5에 19편, 권6에 19편 등 모두 100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편지는 전문을 다 싣지 않고 핵심 내용만 간추려서 수록하였다. 또 난상(欄上)에는 수신자의 이름, 자호(字號), 출신지, 시호(諡號), 간단한 약력, 편지가 쓰인 배경 등을 간략히 정리한 주석(註釋)을 실었는데, 이 주석은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 등이 작성하였다.
4. 내용
정조는 주희 학문의 정밀한 내용들은 그의 편지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의 편지를 선별·편집하여 《주서백선》을 편찬했다고 하였다. 정조는 《주서백선》에서 주희가 스승 이통(李侗)에게 보낸 〈상연평이선생(上延平李先生)〉을 가장 첫 번째에 수록하고, 제자 황간(黃幹)에게 보낸 〈답황직경(答黃直卿)〉을 마지막에 실었다. 이는 주희의 학문이 이통에서 연원하고 황간에게 이어짐을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주서백선》에 실린 편지의 수신자들은 주희의 스승이나 친구, 문인(門人), 관인(官人) 등이다. 편지의 내용은 일상생활이나 느낌, 문인들에게 전하는 안부나 당부 등 주희의 개인적인 상황을 진술한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학문의 순서와 방법, 세도(世道)와 처신의 문제,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설명과 논쟁, 당시의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 등을 밝힌 글들이 더 많다. 즉 《주서백선》은 주희의 삶과 학문, 사상이 응축되어 있는 책이며, 정조가 이 책을 간행하여 널리 배포했던 것도 학자들이 이 책을 통해 주희 학문의 본령을 학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5. 가치와 영향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주자대전》·《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을 열독하면서 여러 종류의 주자서 선집을 직접 편찬했는데, 《주서백선》은 그 중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책이다. 정조는 《주서백선》의 편찬을 마친 후 이를 활자로 간행하게 했는데, 정유자(丁酉字)로 간행된 활자본 《주서백선》은 530여 질이 인쇄되어 규장각을 비롯한 주요 관서와 규장각 각신 및 서적 편찬에 참여했던 관료들에게 반사(頒賜)되었다. 또 정조는 경상도·전라도·평안도 감영(監營)에 지시하여 활자본을 바탕으로 번각본(飜刻本)을 제작해서 각도의 향교(鄕校) 등에 널리 보급하도록 하였다. 이는 정조가 《주서백선》을 전국적으로 보급함으로써 유학을 진흥하고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했음을 잘 보여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생각건대 금나라와의 강화책이 결정된 후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만사(萬事)가 어그러졌고, 독단(獨斷)이라는 말이 진언된 후 황제의 뜻이 위에서 교만해졌으며, 국시(國是)의 설이 횡횡하면서 공론(公論)이 아래에서 막혀 있으니, 이 세 가지가 큰 걱정의 근본입니다.[盖講和之計決 而三綱頹萬事隳 獨斷之言進 而主意驕於上 國是之說行 而公論鬱於下 此三者 其大患之本也]” 〈권1 여진시랑(與陳侍郞)〉
• “천하의 큰 뜻을 품은 군자 중에 천하의 어진 인재를 초빙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장차 자기의 견문이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이르지 못하는 것을 넓히며, 또 처신하고 사물을 대할 때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그로 하여금 바로잡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古之君子有志於天下者 莫不以致天下之賢爲急……盖將以廣其見聞之所不及 思慮之所不至 且慮夫處己接物之間 或有未盡善者 而將使之有以正之也]” 〈권1 여진승상(與陳丞相)〉
• “지난번에 쓴 『대학』에 대해 정본(定本)이라고 자부했었는데, 근래 여러 사람들과 다시 강론하면서 「혈구(絜矩)」 한 장에는 여전히 세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어떤 사람이 한 가지 학설을 터득하고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다면, 그는 상지(上智)가 아니면 하우(下愚)일 것입니다.[大學向所寫者 自謂已是定本 近因與諸人講論 覺得絜矩一章尙有未細密處……彼才得一說終身不移者 若非上智 卽是下愚也]” 〈권6 답황직경(答黃直卿)〉
(2) 색인어:정조(正祖), 주서백선(朱書百選), 주희(朱熹), 주자대전(朱子大全), 이만수(李晩秀), 아송(雅誦), 주자서 선집(朱子書選集), 규장각(奎章閣)
(3) 참고문헌
•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김문식, 문헌과 해석사, 2000)
• 국역 朱書百選(주자사상연구회 역, 혜안, 2000)
•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사론 2(김준석, 지식산업사, 2005)
• 〈朱熹의 편지글 100편 모음집-朱書百選〉(김문식, 《문헌과 해석》 통권4호, 1998)
• 〈《朱書百選》·《雅誦》 解題〉(김남기, 《朱書百選·雅誦》,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0)
【강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