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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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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경》은 동한(東漢)의 마융(馬融)이 《효경(孝經)》의 체재를 모방하여 충(忠)의 의미와 실천 방도를 서술하고, 그의 제자 정현(鄭玄(127~200))이 해설을 덧붙인 것으로 알려진 책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위서(僞書)로 의심받으며, 편찬자 및 편찬 시기를 둘러싼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 쟁점은 (1) 진(晉) 매색(梅賾)의 《고문상서(古文尙書)》가 경문에 인용된 것에 대한 의문, (2) 마융과 정현의 저술이 빠짐없이 수록되었다고 간주되는 《후한서(後漢書)》 및 《정지(鄭志)》에 《충경》이 보이지 않는 점, (3) 수(隋)·당(唐) 시기의 전적을 망라한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와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그 서명이 기재되지 않았으며, 송(宋)의 《숭문총목(崇文總目)》에서야 나타난다는 사실 등이다. 또한 본문 중 ‘민(民)’은 ‘인(人)’으로, ‘치(治)’는 ‘리(理)’로 피휘(避諱)된 흔적 등을 고려하면, 대체로 당·송 연간의 저술로 추정된다.

2. 저자

(1) 성명:마융(馬融(79~166))
(2) 자(字)·별호(別號):마융의 자는 계장(季長)이다.
(3) 출생지역:부풍(扶風) 무릉(茂陵(현 섬서성(陝西省) 흥평시(興平市)))
(4) 주요활동과 생애
동한의 경학자로, 마엄(馬嚴)의 아들이다. 지순(摯恂)에게 유학을 배우고 남산(南山)에 은거하다가 교서랑(校書郎)에 나아갔고, 동관(東觀)의 전교비서(典校秘書)가 되었다. 광성송(廣成頌)을 올려 시정(時政)을 풍간(諷諫)하다 등태후(鄧太后)의 미움을 받아 금고(禁錮)되었고, 안제(安帝)의 친정 이후 관직에 복귀하여 동순송(東巡頌)을 올리고 곧 병으로 사직했다. 이후 권신 양기(梁冀(?~159))를 위해 서제송(西第頌)을 짓고 그 아래에서 남군태수(南郡太守) 등을 지냈으나, 곧 양기의 미움을 받아 말년에 다시 동관에 머물며 저술에 힘쓰다 세상을 떠났다. 고문경학(古文經學)의 학설을 위주로 했으나, 금문경학(今文經學)의 성과 역시 절충했다고 평가되며, 제자로는 정현(鄭玄)과 노식(盧植(159~192)) 등이 있다.
(5) 주요저작:오경(五經) 및 삼례(三禮), 그리고 《논어(論語)》·《노자(老子)》·《회남자(淮南子)》·《이소(離騷)》 등을 주석했으나 그 일부가 단편적으로 전해질 뿐이며, 《춘추(春秋)》에 대한 주해서인 《삼전이동설(三傳異同說)》을 지었다. 명말의 장부(張溥(1602~1641))가 여러 책에 산견되는 마융의 저술들을 모아 《마계장집(馬季長集)》을 편찬했다.

3. 서지사항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및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조선에서 주로 통용된 판본은 18세기 영조 연간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분권(不分卷) 1책의 목판본이다. 권두에는 142년(東韓 順帝 漢安 元年) 마융의 〈충경서(忠經序)〉 및 1434년(明 宣宗 宣德 9년) 한양(韓陽)의 〈충경해주서(忠經解註序)〉가 있으며, 마융이 지은 경문(經文)과 정현의 주해(註解), 그리고 왕상(王相)의 전주(箋註)가 달린 본문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4. 내용

《충경》의 체재는 《효경》과 마찬가지로 1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목차 및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천지신명장(天地神明章): 충의 보편성, (2) 성군장(聖君章): 임금의 충, (3) 총신장(冢臣章): 대신의 충, (4) 백공장(百工章): 관료의 충, (5) 수재장(守宰章): 지방관의 충, (6) 조인장(兆人章): 백성의 충, (7) 정리장(政理章): 덕치의 방도, (8) 무비장(武備章): 무신의 충, (9) 관풍장(觀風章): 풍속 교화의 도리, (10) 보효행장(保孝行章): 효행의 궁극적 완성, (11) 광위국장(廣爲國章): 충직한 신하의 등용, (12) 광지리장(廣至理章): 정치의 지극한 이치, (13) 양성장(揚聖章): 군덕의 보좌와 완성, (14) 변충장(辨忠章): 충신과 간신의 분별, (15) 충간장(忠諫章): 간언의 도리, (16) 증응장(證應章): 충의 징험과 효과, (17) 보국장(報國章): 나라에 보답할 방도, (18) 진충장(盡忠章): 충을 다해야 할 의리.
《충경》 각 장의 제목과 내용은 대체로 《효경》과 조응하며, 《효경》의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전개되고 있다. 한양(韓陽)의 설명에 따르면 효는 충의 근본(體)이며 충은 효의 실천(用)이라 규정되는데, 특히 제10장 보효행장에 보이는 바와 같이, 효의 궁극적 완성은 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리야말로 《충경》의 핵심 주장이라 할 수 있다.

5. 가치와 영향

《충경》은 송대 처음 알려진 이래 위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중국 사상계에 남긴 영향 또한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 건륭제 때 편찬된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는 유가류(儒家類) 존목(存目) 가운데 강소순무(江蘇巡撫) 채진본(採進本) 《충경》에 관한 간략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송나라 때 위서임을 단언할 뿐 여타 편찬 및 출판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에서도 《충경》은 그다지 널리 읽힌 책은 아니었다. 특히 18세기 이의현(李宜顯(1669~1745))·신작(申綽(1760~1828))·정약용(丁若鏞(1762~1836)) 등 경학자들은 《충경》이 동한 때 마융의 저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충경》을 《공자가어(孔子家語)》·《전국책(戰國策)》·《논형(論衡)》 등과 더불어 그 순정성과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제자외서(諸子外書) 중 하나로 간주했고, 윤행임(尹行恁)(1762~1801)은 “옛날에 마융이 《효경》을 모방하여 《충경》 1부를 만들었지만 볼 만한 가치가 없는 책이다.[(昔馬融倣孝經) (爲忠經一部) (殊不足觀矣)]”라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충경》은 17세기 전반과 18세기 전반 두 차례에 걸쳐 편찬·간행된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충경》의 가치에 주목했던 첫 번째 학자는 김육(金堉)(1580~1658)이었다. 그는 효를 인간 윤리의 근원적 덕목으로 전제하고, 부모에 대한 효가 궁극적으로 군주에 대한 충으로 확충·발전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1647년(인조 25) 《효경》과 《충경》을 한 책으로 엮은 《효충전경(孝忠全經)》을 편찬했다.
이후 약 90년이 지난 뒤 《충경》은 탕평(蕩平)의 이론적 토대를 효치론(孝治論)에서 찾고자 하였던 영조에 의해 다시 주목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영조는 1735년(영조 11) 8월 19일 경연에서 《효경》과 《충경》을 합쳐 놓은 책 즉 김육의 《효충전경》이 홍문관(弘文館)에 소장되어 있는지 신하들에게 물으며 두 책을 다시 간행하고자 하는 뜻을 전했다. 이에 검토관 유건기(兪健基)는 《충경》의 경우 개인 집안에 간혹 전해지나 홍문관에는 없다고 말하며, 《충경》은 성현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주자를 비롯한 송나라 때 유학자들이 표장(表章)한 바가 없으므로 《효경》과 함께 간행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아뢰었다. 그러나 다음날 영조는 《충경》의 간행을 명하였는데, 이후의 구체적인 사정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 규장각 소장본의 내사기(內賜記) 등을 살펴보면, 대략 1737년(영조 13) 전반기에 현재 통용되는 판본이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되어 홍문관과 시강원(侍講院) 등에 배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덧붙여 주목할 점은 《충경》의 저자 마융이 선왕인 숙종에 의해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되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마융은 경서에 박통한 대유(大儒)로 평가되지만, 권간 양기에게 부화뇌동했던 행적은 일찍부터 비판받아 왔다. 게다가 성격이 방종하고 사치·방탕했다는 사실이 누차 지적되는 가운데, 결국 1682년(숙종 8) 숙종이 문묘의 전례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순황(荀況) 등과 더불어 출향된 바 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50여 년 만에 영조가 마융의 책을 국가에서 간행하여 배포한 사실을 보면, 《충경》의 간행이 단순히 유교 윤리의 보급이라는 차원을 넘어 강력한 군주권의 정립이라는 절박한 현실과 관련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옛날 성왕(聖王)의 지치(至治)의 시기에 임금과 신하가 덕을 함께 하여 하늘의 상서로움을 징험했으니, 이것이 충의 도리이다.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고 사람이 행하는 것 가운데 충보다 큰 것은 없다.[昔在至理 上下一德 以徵天休 忠之道也 天之所覆 地之所載 人之所履 莫大乎忠]” 〈천지신명장(天地神明章)〉
• “대저 효라는 것은 반드시 충을 귀하게 여기니, 충이 행해지지 않으면 따르는 바(효) 역시 도리에 어긋날 것이다. 그러므로 충이 미치지 못하고 지켜지지 않으면, 자신을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부모까지 욕되게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효를 행함에 반드시 충을 앞세우니, 충을 다하면 복록(福祿)이 이를 것이다.[夫惟孝者 必貴於忠 忠苟不行 所率猶非其道 是以忠不及之而失其守 匪惟危身 辱及親也 故君子行其孝 必先以忠 竭其忠 則福祿至矣]” 〈보효행장(保孝行章)〉
• “크도다, 충의 쓰임이여. 가까운 데 베풀면 집안과 나라를 보전할 것이요, 멀리까지 베풀면 천지 (天地)의 도를 다할 것이다. 그러므로 명철한 임금은 나라를 다스림에 반드시 충신을 변별함을 먼저 한다.[大哉 忠之爲用也 施之於邇 則可以保家邦 施之於遠 可以極天地 故明王爲國 必先辨忠]” 〈변충장(辨忠章)〉
(2) 색인어:충경(忠經), 마융(馬融), 정현(鄭玄), 김육(金堉), 영조(英祖)
(3) 참고문헌
• 後漢書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四庫全書總目提要(中華書局)
• 潛谷遺稿 韓國文集叢刊本(金堉, 한국고전번역원)
• 陶谷集 韓國文集叢刊本(李宜顯, 한국고전번역원)
• 石泉遺稿 韓國文集叢刊本(申綽, 한국고전번역원)
• 與猶堂全書 韓國文集叢刊本(丁若鏞, 한국고전번역원)
• 碩齋別稿 韓國文集叢刊本(尹行恁, 한국고전번역원)
• 兩漢經學與社會(孫筱, 中國社會科學出版社)
• 〈조선후기 孝經·忠經 이해와 孝治論〉(우경섭, 《정신문화연구》 35-1)

【우경섭】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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