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악기(樂記)》는 유가(儒家)의 음악 사상과 이론을 집대성한 완정(完整)한 전문 저술로서, 서한(西漢) 성제(成帝) 시기에 대성(戴聖)이 편찬한 《예기(禮記)》에 실려 있는 편명이다.
2. 저자
미상(未詳). 《악기》의 성서(成書) 연대와 작자(作者)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오랜 논쟁이 있었으나 이를 명확하게 밝힐 문헌 자료가 없어 여전히 일치된 견해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그 가운데 두 가지 학설이 많은 학자들의 동의를 얻어내고 있다.
첫째는 《악기》가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공자(孔子)의 재전(再傳) 제자인 공손니자(公孫尼子)가 엮은 것이라는 설이다. 이 설은 곽말약(郭沫若)에 의해 처음 제기된 이후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公孫尼子與其音樂理論〉, 1943)
둘째는 《악기》가 서한(西漢)의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 및 모장(毛萇)을 대표로 하는 일군의 유생(儒生)들의 공동 작업으로 편찬된 것이라는 설이다. 이 설은 채중덕(蔡仲德)에 의해 처음 제기된 이후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樂記》作者問題辯證〉, 1980)
채중덕은 위 논고에서 《악기》가 공손니자에 의해 엮어졌다는 설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채중덕은 이후에도 다른 논고를 통해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의 악류(樂類)에 열거되어 있는 ‘《악기(樂記)》 23편’과 ‘《왕우기(王禹記)》 24편’은 모두 《악기》의 서로 다른 전본(傳本)으로 모두 유향(劉向)의 교열(校閱)을 거쳐 유덕(劉德)이 엮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樂記》再辯證〉, 1985)
이들 외에도 장공양(蔣孔陽)을 위시한 일군의 학자들은 《악기》가 한 시기에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악기》의 기본 사상과 이론을 비롯하여 장절(章節)의 주요한 부분이 전국 시대 말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며 서한 초기에 이르러 완정한 《악기》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곧 《악기》의 초기 형태는 공문(孔門)의 70제자와 그 후학들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며 대부분의 편장(篇章)이 《순자(荀子)》 〈악론(樂論)〉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기술되었고 진한(秦漢) 시기 유생(儒生)들의 가공과 윤색을 거쳐 수정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서지사항
《악기》는 《예기》의 편명으로 약 5천여 자로 이루어져 있다.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황제(黃帝)로부터 아래로 삼대(三代)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마다 그 악(樂)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공자가 ‘윗사람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는 예(禮)보다 좋은 것이 없으며 풍속(風俗)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는 악(樂)보다 좋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듯이 예와 악 두 가지가 함께 지켜졌지만 주나라가 쇠하면서 예악도 무너지고 말았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하간헌왕이 모장(毛萇) 등과 함께 주관(周官) 및 여러 학자들이 음악에 관하여 말한 것을 채집하여 《악기》를 엮어 진헌하였다. 이를 내사 승(内史丞) 왕정(王定)이 전하여 상산(常山)의 왕우(王禹)에게 주었는데, 왕우가 이후 성제(成帝) 때에 다시 진헌한 것이 24권이었고 유향이 이를 교열하여 정리한 것이 《악기》 23편이었다고 한다. 이 23편 가운데 12편은 일실되고 나머지 11편이 하나로 묶여서 《예기》의 〈악기〉편에 실려 전해진다.
4. 내용
유향은 고대의 《악기》 23편을 교열하면서 그 편명을 모두 별록(別錄)에 기록해두었는데, 이 별록이 비록 일실되었으나 기록되어 있던 23편의 편명이 당나라 공영달(孔穎達)의 《예기정의(禮記正義)》에 전재(轉載)되어 현재까지 전해진다. 《예기정의》에 따르면 11편의 편명은 〈악본(樂本)〉·〈악론(樂論)〉·〈악시(樂施)〉·〈악언(樂言)〉·〈악례(樂禮)〉·〈악정(樂情)〉·〈악화(樂化)〉·〈악상(樂象)〉·〈빈모가(賓牟賈)〉·〈사을(師乙)〉·〈위문후(魏文侯)〉이며, 나머지 12편의 편명은 〈주악(奏樂)〉·〈악기(樂器)〉·〈악작(樂作)〉·〈의시(意始)〉·〈악목(樂穆)〉·〈설률(說律)〉·〈계차(季劄)〉·〈악도(樂道)〉·〈악의(樂義)〉·〈소본(昭本)〉·〈초송(招頌)〉·〈두공(竇公)〉이다.
원나라 오징(吳澄)은, “유향이 얻은 《악기》 23편은 하간헌왕이 엮은 24권과 같지 않으며, 23편 가운데 11편을 합하여 1편으로 만든 것도 그 요점을 산취(刪取)한 것이지 전문(全文)이 아니다.”라고 하고 위에 제시한 11편의 편명에 맞추어 《악기》의 내용을 다시 분류하였다. (《예기찬언(禮記纂言)》 권36 〈악기(樂記)〉)
위의 11편 가운데 〈악본〉은 음악의 본질에 대해 논하였고, 〈악론〉과 〈악례〉는 음악과 예의 관계에 대해 논하였고, 〈악시〉와 〈악화〉는 음악의 작용과 교화에 대해 논하였고, 〈악언〉은 음악과 세태의 관계에 대해 논하였고, 〈악상〉은 음악의 상징성에 대해 논하였고, 〈악정〉은 음악과 인간의 정리에 대해 논하였다. 〈위문후〉는 위문후(魏文侯)와 자하(子夏)의 음악에 관한 대화를 기록하였고, 〈빈모가〉는 공자(孔子)와 빈모가(賓牟賈)의 음악에 관한 대화를 기록하였고, 〈사을〉은 자공(子贛)과 사을(師乙)의 음악에 관한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악기》는 공자 이후로 구축된 유가의 사상을 중심으로 음악의 원리와 창작, 연주, 음률 등의 문제에 대해 서술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사회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음악의 기능과 효용 등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어, 선진(先秦) 유학의 미학사상을 집대성한 저술로 평가받는다.
특히 음악이 정치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음악을 활용하여 사회의 풍기(風氣)를 바로잡고 윤리 기강을 바로잡게 하여 위정자의 국가 통치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악기》에 제시되어 있는 풍부한 음악 이론은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음악사의 측면에서도 큰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악기》는 여러 방면에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악학궤범》도 이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다. 변계량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봄가을에 《악기》를 교육할 것을 요청하였다.(《세종실록》 1년(1419) 2월 23일조) 또한 역대 왕들의 경연에서 꾸준하게 《악기》를 강론하였다. 정조는 소대에서 《예기》를 강론하고, “《단궁》과 《악기》가 가장 좋다. 《악기》의 문장은 모두 운에 맞으니, 읽으면 정말로 혈맥이 동탕(動盪)한다. 사특하고 더러운 기운도 씻겨나간다.”라고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1776) 4월 29일조)
6. 참고사항
(1)명언
• “왕(王)이 된 자는 공(功)이 이루어지면 악(樂)을 만들고 정치가 안정되면 예(禮)를 제정한다.[王者 功成作樂 治定制禮]” 〈악기(樂記) 제십구(第十九)〉
• “음악은 선왕이 기쁨을 드러낸 도구이며, 군대와 부월은 선왕이 노여움을 드러낸 도구이다. [夫樂者 先王之所以飾喜也 軍旅鈇鉞者 先王之所以飾怒也]” 〈악기(樂記) 제십구(第十九)〉
• “악(樂)이란 즐거운 것이니 사람에게 없을 수 없다.[夫樂者樂也 人情之所不能免也]” 〈악기(樂記) 제십구(第十九)〉
(2)색인어:예기(禮記), 악기(樂記), 공손니자(公孫尼子),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 악론(樂論), 왕우기(王禹記), 음악미학(音樂美學).
(3)참고문헌
• 〈二十世紀《樂記》研究綜述〉(龍琿‧黃鍾, 《武漢音樂學院學報》, 2006)
• 〈《樂記》作者及成書年代研究綜述〉(王偉‧楊和平, 《文教資料》, 2010)
• 〈《樂記》篇次‧流傳考〉(高新華, 《中國音樂學》, 2011)
• 〈《樂記》研究中文文獻述要〉(吳遠華, 《民族音樂》, 2014)
• 〈樂記〉(成海應, 《硏經齋全集續集 禮說》)
• 〈樂記〉(徐榮輔, 《竹石館遺集 禮記箚錄》)
【신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