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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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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원(翰苑)》은 중국 당(唐)나라 고종대(高宗代)에 형부시랑(刑部侍郎) 장초금(張楚金)이 저술한 책으로, 중국 본토와 사이(四夷)의 역사를 담았다. 이 책은 시구(詩句)로 된 정문(正文)과 전거(典據)를 제시한 주석(註釋)으로 구성되어 있다. 옹공예(雍公叡)가 주(注)를 달은 것으로 나와 있지만, 전부가 아닌 일부 내용에 보주(補註)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 저자

(1) 성명:장초금(張楚金(?~689)) 찬(撰), 옹공예(雍公叡) 주(注)
(2) 자호:미상.
(3) 출생지역:병주(幷州) 태원군(太原郡) 기현(祁縣(현 중국 산서성(山西省) 진중시(晉中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장초금은 대체로 17세(혹은 27세) 나이였던 당 태종(太宗) 정관(貞觀) 연간에 진사에 급제, 이적(李勣)의 추천으로 형과 함께 관직에 나아갔다. 그는 고종조(高宗朝)에 형부시랑(刑部侍郎)을 거쳐, 무후대(武后代)에는 이부시랑 추관상서(秋官尙書)에 이르렀다. 뒤에 혹리(酷吏) 주흥(周興)의 무고(誣告)로 689년 영남(嶺南)으로 유배된 뒤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행(志行)이 있었으며 품성이 정중했다고 전해진다.
옹공예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는데, 장초금보다 멀지 않은 시기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 주요저작:《한원(翰苑)》 30권, 《신계(紳誡)》 3권, 시부(詩賦) 2수.

3. 서지사항

《한원》은 일실본(逸失本)으로서 서지사항을 알기 어렵다. 《구당서(舊唐書)》 〈충의전(忠義傳)〉 기록에 따르면, 30권으로 지어졌는데, 지금은 마지막 부분으로 추정되는 〈번이부(蕃夷部)〉만 남아 있다. 장초금의 서문에 따르면 《한원》은 당 고종 현경(顯慶) 5년(660) 무렵 찬술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남송(南宋) 이후, 여러 목록에서 이름이 사라졌는데, 1917년 일본 태재부(太宰府) 천만궁(天滿宮) 서고신(西高迅)의 집에서 그 일부인 〈번이부〉가 발견되었다. 길이 15.86m의 두루마리 필사본(筆寫本)이다. 이 필사본이 1922년에 《경도제국대학문학부경인당초본(京都帝國大學文學部景印唐鈔本)》 제1집에 수록된 것을 계기로 여러 사본이 나왔다. 역주서로는 일본에서 죽내리삼(竹內理三)이 교정해설한 《한원(翰苑)》(1977년)을, 이어서 탕천행손(湯淺幸孫)이 《한원교석(翰苑校釋)》(1983년)을 내었다. 중국에서는 장중주(張中澍)와 장건우(張建宇)가 《한원번이부교석(翰苑蕃夷部校譯)》(2015년)을 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역주한원(譯註翰苑)》(2018년)을 내었다.

4. 내용

《한원》 〈번이부〉는 흉노(匈奴), 오환(烏桓), 선비(鮮卑), 부여(夫餘), 삼한(三韓), 고려(高麗), 신라(新羅), 백제(百濟), 숙신(肅愼), 왜국(倭國), 남만(南蠻), 서남이(西南夷), 양월(兩越)·서역(西域), 후서(後敍)의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각국의 기원과 지배층 등을 기본적으로 서술하고, 관제(官制)나 지리 등의 정보를 수록하였다. 또 중국과의 관계, 곧 조공이나 전쟁의 성공과 실패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정복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교훈도 아울러 서술하였다.
예컨대,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천자의 신하로서 변방을 지켜서, 한(漢)나라 군사들이 수(戍)자리하는 부담을 덜어 주겠다는 건의를 올린 일이 있었다. 이때, 대부분의 관리들이 동의하였는데, 낭중(郞中) 후응(侯應)만이 열 가지 조목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 결과 한나라는 흉노 영토를 계속하여 지켜낼 수 있었다.
중국과 대립 혹은 교역 관계에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 대해서는 위의 기본적 내용 외에 최신의 정보를 담고 있다. 고구려의 경우 지형과 강의 흐름을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모두 양국의 전쟁과 관련된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에 대해서는 왕경(王京)의 구성이라든가, 계룡산(鷄龍山), 금강(錦江)의 흐름, 풍속 등에 대해 살피고 있다. 이 역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보였다. 주목할 것으로, 오방성(五方城)에 대한 정보로 성의 크기와 병사들의 수가 파악되고 있다. 신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지만,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김씨들의 왕위계승, 17관등(官等) 등 새로운 정보가 수록되었다. 또한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에서 벗어나 새로 일어나는 나라로서 주목하고 있었다.

5. 가치와 영향

《한원》 〈번이부〉는 주석(註釋)에 일실(逸失)된 역사 자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 받고 있다.
고구려전(高句麗傳)에 담긴 지리 정보는 이전에는 파악되지 않은 것으로 생생한 내용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노력을 들인 정황이 짐작된다. 백제에 대한 군사정보는 긴요하지 않음에도 수록된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는 백제가 스스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신라가 백제에 대한 연합작전을 모색하면서 중국 측에 제공한 것이라 여겨진다.
중국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거듭 실패한 것은 사실 정보 부족 때문이었다. 중국은 흉노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에야 그들을 공략할 수 있었다. 고구려에 대해서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는 신라의 연합작전 제의를 무시하였었다. 실패를 거듭한 뒤, 비로소 당 고종대(高宗代)에 들어와 수락한 것이다. 이후 전쟁 과정에서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숙지하여 활용했다.
위(魏)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환도산의 돌을 깎아 ‘불내성(不耐城(견디지 못한 성))’이라 새겼었는데[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삼국지(三國志)》 권28 〈위서(魏書)〉), 장초금은 그것을 〈번이부〉 고려전에 수록하였다. 그런데, 당(唐)나라 유격장군루경묘지명(遊擊將軍婁敬墓誌銘)에 “불내지성의 공훈을 새기어, 환도의 산길에 공적을 드러내었네.[銘勳不耐之城 表績丸都之嶠]”라는 내용이 나온다. 누경(婁敬)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은 이가 〈번이부〉 고려전의 내용을 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나라 관리들이 고구려에 대한 군사지리정보를 숙지하여 현장에서 십분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왕기가 북쪽으로 쫓아가, 불내지성의 공훈을 새겼네. 연나라 모용황(慕容皝)이 승승장구하여, 환도의 산길에 공적을 드러내었네.[王頎逐北 銘勳不耐之城 燕晃長驅 表績丸都之嶠]” 〈고려전(高麗傳)〉
• “《고려기》에 이르기를, ‘오골산은 나라의 서북쪽에 있다. 고구려 말로 옥산이다. 평양의 서북쪽 칠백리에 있다. 동서로 두 고개가 있는데, 절벽은 천 길이(인仞)나 된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다 창석이다. ……고려는 남북의 골짜기 입구에 돌을 깎아 성으로 만들었다. 이는 고구려의 요충지이다.’라고 하였다.[高驪記云 烏骨山在國西北 夷言屋山 在平壤西北七百里 東西二嶺 壁立千仞 自足至頂 皆是蒼石……高驪於南北峽口 築斲爲城 此卽夷藩樞要之所也]” 《한원(翰苑)》 〈고려전(高麗傳)〉
• “《고려기》에 이르기를, ‘요수(遼水)의 너비는 백여 보로, 평온하게 흐르는 것이 맑고 깊다. 또 물굽이와 웅덩이, 지류가 많고, 양안에는 긴 버들이 자라는데, 빽빽이 들어서서 군사와 말을 숨기기 좋다.’라고 하였다.[高驪記云 其水闊百餘步 平流淸深 又多灣潭枝派 兩岸生長柳 叢密可藏兵馬]” 《한원》 〈고려전〉
• “《괄지지》에 이르기를, ‘백제 왕성은 사방이 1리 반이며. 북면은 돌을 쌓아 성을 삼았다. 성 안에는 가히 1만 여가를 수용할 수 있으니. 곧 오부(五部)이다. 한 부(部)에는 병사 500인이 있다. 또 국도의 남쪽 260리에는 고사성(古沙城)이 있는데, 성의 사방은 150보로 이것이 그 중방(中方)이다. 방(方)에는 병사 1,200인이 있다. ……여러 지방의 성은 모두 산의 험한 곳에 의지하며, 또 돌을 쌓아 만든 것도 있는데, 그 병사는 많은 곳은 1000인, 적은 곳은 7~800인이다.’라고 하였다.[括地志曰 百濟王城 方一里半 北面 累石爲之 城中 可容万餘家 卽五部之所也 一部有兵五百人 又國南二百六十里 有古沙城 城方百五十步 此其中方也 方擁兵千二百人……其諸方之城 皆憑山險爲之 亦有累石者 其兵多者千人 少者七八百人]” 《한원》 〈백제전(百濟傳)〉
• “《수동번풍속기》에 이르기를, ‘〈신라는〉 김씨성으로 30여대를 서로 계승하였는데, 그 선조는 백제에 예속되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자, 고구려인들이 역(役)을 견디지 못하고 연이어 〈신라에〉 귀부하니 마침내 강성해졌다.’라고 하였다.[隋東藩風俗記云 金姓相承卅餘代 其先附庸於百濟 征高驪 人不堪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한원》 〈신라전(新羅傳)〉
(2) 색인어:한원(翰苑), 장초금(張楚金), 옹공예(雍公叡), 고려기(高麗記), 괄지지(括地志), 수동번풍속기(隋東番風俗記), 위략(魏略)
(3) 참고문헌
• 翰苑(竹內理三 校訂 解說, 太宰府 天滿宮文化硏究所)
• 翰苑校釋(湯淺幸孫, 國書刊行會)
• 翰苑‧蕃夷部 校譯(張中澍‧張建宇 校譯, 吉林文史出版社)
• 譯註 翰苑(한국고중세사연구소, 동북아역사재단)
• 〈翰苑 註所引 高麗記につい〉(吉田光男, 《朝鮮学報》 85, 1977)
• 〈한원(翰苑) 신라전 연구〉(郭丞勳, 《韓國古代史硏究》 43, 2006)
• 〈翰苑의 문헌적 검토〉(金鍾完, 《한중관계 2000년》, 2008).
• 〈翰苑 百濟傳所引の括地志の史料的性格について〉(鄭東俊, 《東洋學報》 92-2, 2010).
• 〈貞觀年閒唐帝國的東亞情報, 知識與佚籍〉(童嶺, 《東方學報》 92, 翰苑硏究會, 2017)

【곽승훈】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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