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역통석(易通釋)》은 청(淸)나라 초순(焦循)의 역학(易學) 저작을 대표하는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 가운데 하나로서 《주역(周易)》 경문(經文)・전문(傳文) 중의 개념・술어・범주・명제 742개를 조목조목 분석하고, 상수(象數)와 의리(義理)를 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며, 또 이들 명사(名詞)에 의거하여 자신이 발명한 역학(易學) 해석 원칙들, 즉 방통(旁通)・당위실도(當位失道)・상착(相錯)・시행(時行)・비례(比例)・가차(假借)・전주(轉注) 등을 통석(通釋)한 책이다. 초순이 이 책에서 사용한 해석 원칙은 괘효(卦爻)의 변화 법칙을 규범화한 것으로서 수학의 비례법과 언어문자학[六書之學] 연구를 통해 발명한 것이다. 초순 51세 때(1813년) 완성된 책으로서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저자
(1) 성명:초순(焦循(1763~1820))
(2) 자(字)・별호(別號):자는 이당(理堂)이고, 또 이당(里堂)으로도 쓴다. 만년의 호(晩號)는 이당노인(里堂老人)으로서 초순이 45세가 되던 해부터 자칭(自稱)한 호이다.
(3) 출생지역:강소(江蘇) 양주부(揚州府) 감천현(甘泉縣) 황각교진(黃珏橋鎭(현 강소성(江蘇省) 한강현(邗江縣) 황각교진(黃珏橋鎭))) 청대(淸代)의 감천현(甘泉縣)은 강도현(江都縣)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고 두 현 모두 당시의 양주부(揚州府)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초순의 본적지는 양주(揚州), 강도(江都), 감천(甘泉)의 세 곳으로 말해진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초순은 증조(曾祖) 초원(焦源)과 조부(祖父) 초경(焦鏡), 그리고 부친(父親) 초총(焦葱)이 모두 《역(易)》에 정통(精通)하였던 ‘삼세전역(三世傳《易》)’의 서향문제(書香門第) 출신으로서 건륭(乾隆) 28년(1763) 3월 17일에 태어나서 가경(嘉慶) 25년(1820) 9월 4일 향년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적모(嫡母)는 사유인(謝孺人)이고, 친모(親母)는 은유인(殷孺人)이다.
초순은 건가(乾嘉(건륭(乾隆)・가경(嘉慶))) 학술 정성기(鼎盛期)의 양주학파(揚州學派)를 대표하는 중요 인물이다. 역학(易學)・경학(經學)・수학[算學]・희곡 이론 등으로 장강(長江) 남북에 명성을 날렸고, 전대흔(錢大昕)・왕명성(王鳴盛)・정요전(程瑤田) 등 선배 홍유(鴻儒) 모두가 존경하여 추대하였다. 천문 계산에 능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예(李銳)・능정감(凌廷堪)과 함께 ‘하늘을 재는 세 벗[談天三友]’으로 불렸고, 경학에서는 강번(江藩)과 ‘이당(二堂)’으로 병칭되었으며, 약관(弱冠)이후 완원(阮元)과 제명(齊名)되었다. 완원은 또 전대흔(錢大昕)과 함께 ‘통유(通儒)’로 추대하였다. 가경(嘉慶) 6년(1801) 39세 때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으나 예부(禮部)의 회시(會試)에서 낙방한 40세 이후에는 벼슬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모인 은유인을 시봉(侍奉)하면서 포의(布衣)로 늙었고, 친모 은유인이 과세(過歲(가경 10년(1805, 43세)))한 이후 가경 14년(1809, 47세)에 5무(畝)의 땅을 사서 장서루(藏書樓)인 ‘조고루(雕菰樓)’를 짓고 “10여 년 동안 성시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을 정도[足不入城市者十餘年]”로 깊이 은거(隱居)하면서 독서(讀書)와 수관교학(授館教學), 저서입언(著書立言)에 전념하였다. 초순 평생의 저술은 경학(經學)・수학(數學)・사학(史學)・지리(地理)・고건축(古建築)・박물(博物)・문자(文字)・음운(音韻)・의학(醫學)・희곡(戱曲) 이론 등의 분야에 이르는 48종 300여 권이다. 그 가운데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와 《맹자정의(孟子正義)》가 가장 유행하여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초순은 총영(聰穎)하여 3세 때 ‘재(栽)’와 ‘재(裁)’ 두 글자를 식별할 수 있었고, 건륭(乾隆) 35년(1770) 8세 때 공도교(公道橋) 완씨가(阮氏家)에 놀러 가서 굴원(屈原) 《초사(楚辭)》를 학습했을 때 얻은 지식을 운용하여 빈객들과 ‘풍이(馮夷)’ 두 글자의 독음을 변별(辨別)할 수 있었다. 완승훈(阮承勛)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서 후일(초순 18세 때) 딸을 시집보냈다.
초순은 학문 연구 역정에서 수학(산학(算學), 천문학을 망라함)으로부터 《역》학에 이르렀으며 《역》의 이치를 빌려 자신의 철학 사상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 역정은 모두 가학(家學)에서 연원하는데, 초순에게는 과거(科擧)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학문을 중시해야 한다는 조부와 부친의 간곡한 경고에 따라 어려서부터 경서(經書)를 학습하는 것 외에 언어학, 수학, 의학, 희곡 이론과 같은 다른 심층 학습이 장려되고 허용되었다. 그는 건륭 30년(1765, 3세)에서 건륭 43년(1776, 15세)까지 12년 동안 적모 사유인의 절실한 무육(撫育)을 받았는데, 적모 사씨는 체질이 허약하여 다병(多病)했던 초순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돌보면서 매일 서수(書數)를 가르치고, 《모시(毛詩)》와 효제충신(孝弟忠信)의 고사를 구수(口授)하였다. 건륭(乾隆) 33년(1768) 6세에 처음으로 사숙(私塾)에 들어갔을 때를 전후해서는 또 외숙모[구모(舅母)] 범씨(范氏), 외종 사촌형[표형(表兄)] 범징린(范徵麟), 외삼촌[표숙(表叔)] 왕용약(王容若) 등에게서 자음반절(字音反切), 시(詩)・소(騷)・부(賦)・고문(古文)・음운(音韻)의 변별(辨別), 산학(算學) 등을 배웠고, 건륭 38년(1773) 11세 때는 족부(族父) 초식(焦軾)에게서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배웠으며, 12・3세 때는 부친 초총에게서 《시품(詩品)》과 당대(唐代)의 오언율시(五言律詩), 북송(北宋) 삼소(三蘇(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의 문장 등을 배웠다. 부친 초총은 당시에 또 사지(史地)・천문(天文)・산술(算術)의 책들을 열람하게 하였고, 건륭 41년(1776) 여름에는 〈소축(小畜) 단(彖)〉의 “구름이 빽빽한데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내가 서쪽 교외에서 왔기 때문이다.[密雲不雨 自我西郊]”가 왜 〈소과(小過) 육오(六五)〉에서 다시 나타나는가를 의심해보라고 가르침으로써 초순의 역학 연구를 인도하였다.
초순은 건륭 44년(1779) 17세에 동자시(童子試)에 응하여 고봉모(顧鳳毛(자(字) 초종(超宗)))와 함께 강소학정(江蘇學政) 유용(劉墉)의 보학생원(補學生員)이 되었고, 건륭 45년(1780) 18세에 현지의 관학인 양주(揚州) 안정서원(安定書院)에 입학하였다. 유용은 초순의 탄탄한 산학 실력을 인정하고, 또 경학(經學) 공부를 건의하였다. 동창생 지우(摯友) 고초종(顧超宗)은 자기 부친의 경학을 전해주어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초순은 건륭 46년(1781) 19세 때부터 경학 연구에 뜻을 세우고 《모시(毛詩)》로부터 시작하였으며, 급고각각본(汲古閣刻本)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를 구입하여 《이아(爾雅)》를 처음 읽고, 육전(陸佃)과 나원(羅願)의 책을 보충한 《모시조수초목충어석(毛詩鳥獸草木蟲魚釋)》을 썼다. 건륭 47년(1782) 약관(弱冠)에 어려서는 동유(同遊)하고 커서는 동학(同學)했던 완원(阮元)과 제명(齊名)되기 시작했고, 가학(家學)인 역학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맹자정의(孟子正義)》를 계획하였다. 초순은 완원의 족자부(族姊夫)였는데, 한 살이 어렸던 완원은 초순을 족저부(族姐夫)로 불렀다. 건륭 50년(1785) 23세 정부(丁父)와 적모(嫡母)의 정우(丁憂)에 거자업(擧子業)을 중단하고 오로지 《역》의 서적들을 두루 구하여 열독하였으나 부친이 인도해준 의혹에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건륭 52년(1787) 25세 때 지우 고초종이 기증해준 매문정(梅文鼎)의 《매씨총서(梅氏叢書)》를 통해 비로소 구장(九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건륭 60년(1795, 33세)에 산동학정(山東學政) 완원의 초대에 응하여 멀리 산동으로 갔고, 건륭 52년(1796, 34세)에 절강(浙江)으로 부임하는 완원을 따라 항주(杭州)에서 머물렀을 때 진구소(秦九韶)의 《수서구장(數書九章)》과 이야(李冶)의 《측원해경(測圓海鏡)》・《익고연단(益古演段)》을 얻어서 처음으로 ‘동연구용(洞淵九容)’의 오의(奧義)와 천원술(天元術)・대연술(大衍術)을 익혔다. ‘동연(洞淵)’은 인명(人名) 또는 서명(書名)으로 추측되고, ‘구용(九容)’은 직각삼각형[구고(句股)]의 방법을 가리킨다. 초순은 이들 산학(算學) 연구의 성과로서 가경 원년(1796) 34세에 《석고(釋孤)》 3권・《석륜(釋輪)》 2권・《석타(釋橢)》 1권을 썼고, 가경 2년(1797) 35세에는 《가감승제석(加減乘除釋)》 8권을 썼으며, 가경 4년(1799) 37세에는 진구소와 이야의 천원술(天元術)과 대연술(大衍術)을 천술(闡術)한 《천원일석(天元一釋)》 2권을 썼고, 가경 6년(1801) 39세에는 이야의 두 책을 천술한 《개방통석(開方通釋)》 1권을 썼다. 이들 수학 연구서는 초순 역학 연구의 기초로서 실제로 이를 통하여 14세 때 부친이 제시해 준 의혹을 비로소 해결할 수 있었고, 40세 이후에 자신이 발명한 해석 원칙들, 즉 방통(旁通)・시행(時行)・상착(相錯) 등도 수학 연구의 성과였다.
초순은 가경 6년(1801) 39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으나 가경 7년(1802) 40세 때 북경(北京)에서 있었던 예부(禮部)의 회시(會試)에서는 낙방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회시에 응시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친모인 은유인을 봉양하면서 수관교학(授館教學)과 독서에 전념하였다. 초순은 대진(戴震)을 사숙(私淑)하고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을 심복하였는데, 가경 8년(1803) 41세 때 그 소증(疏證)의 체례를 본뜬 《논어통석(論語通釋)》 15편을 지었다. 가경 9년(1804) 42세에 수리(數理)의 방법을 이용하여 《역》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연구실을 ‘의동연구용수주《역》실(倚洞淵九容數注《易》室)’로 명명하고 《역통석》을 쓰기 시작했다. 41세에 가거(家居)한 이래 역학 연구에 잠심(潛心)하여 가경 12년(1807) 45세에 이르러서는 약 40권의 《역통석(易通釋)》・《역장구(易章句)》・《역도략(易圖略)》 초고를 완성하고, 이를 《역학삼서(易學三書)》로 초정(初定)하면서 영후재(英煦齋)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병(病)이 위중함에도 수차례 수정 작업을 계속하여 가경 17년(1812) 50세 때 다시 완원에게 지정(指定)을 부탁하였다. 가경 18년(1813) 51세 때 《역통석》 20권을 완성하였고, 가경 21년(1816) 54세에 이르기까지 《역도략》 8권, 《역장구》 12권을 완성하였다. 이들 《역학삼서》는 가경 14년(1809) 47세에 지은 조고루(雕菰樓)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로 명명되었다.
초순은 가경 20년(1815) 53세 때부터 자신이 발명한 역리(易理)를 다른 경전(經傳) 연구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는데, 54세에는 《논어보소(論語補疏)》를 완성하였고, 또 약관 때 뜻을 세웠던 《맹자정의》를 쓰기 위한 준비로서 아들 초정호(焦廷琥)와 함께 《맹자장편(孟子長編)》 30권을 편찬하였다. 가경 22년(1817) 55세 때 문집 《조고집(雕菰集)》 24권을 자정(自訂)하고, 《역도략》・《역통석》・《역장구》를 편집 순서로 하는 《조고루역학삼서》 40권을 수사(手寫)했다. 가경 23년(1818) 56세 때 《맹자정의》 편찬을 시작하고 또 《군경보소(群經補疏)》를 산정(刪定)하였다. 57세 때 《맹자정의》 30권의 초고(草稿)를 완성하고, 아울러 옛 원고들을 산정하였다. 가경 25년(1820) 58세 때 《맹자정의》를 수정하고 손으로 쓴 원고 3권을 완원에게 보내어 질정(質定)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족질(足疾)이 재발하고, 학질에 걸려서 완성하지 못하고, 9월 4일 진시(辰時)에 향년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초순은 평생 병약하여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학우들은 매우 많았다. 그가 남긴 252편의 서신에서 언급한 학인 중 건가학(乾嘉學)을 대표하는 저명한 인사들만을 예로 들면, 완원(阮元), 이예(李銳), 손성연(孫星衍), 강성(江聲), 강번(江藩), 전대흔(錢大昕), 왕광희(汪光爔), 단옥재(段玉裁), 왕념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능정감(淩廷堪), 왕명성(王鳴盛), 왕중(汪中), 고봉모(顧鳳毛) 등이다.
(5) 주요저작 : 경학에서는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 40권(《역통석(易通釋)》 20권, 《역장구(易章句)》 12권, 《역도략(易圖略)》 8권), 《역화(易話)》 2권, 《역광기(易廣記)》 3권, 《육경보소(六經補疏)》 20권(《논어보소(論語補疏)》 3권, 《주역보소(周易補疏)》 2권, 《상서보소(尙書補疏)》 2권, 《모시보소(毛詩補疏)》 5권, 《춘추좌전보소(春秋左傳補疏)》 5권, 《예기보소(禮記補疏)》 3권), 《군경궁실도(群經宮室圖)》 2권, 《우공정주석(禹貢鄭注釋)》 2권, 《맹자정의(孟子正義)》 30권, 《논어통석(論語通釋)》 1권 등이 있고, 천문・수학에서는 《이당학산기(里堂學算記)》 5종 5권(《가감승제석(加減乘除釋)》 8권, 《천원일석(天元一釋)》 2권, 《석호(釋弧)》 2권, 《석륜(釋輪)》 2권, 《석타(釋橢)》 1권), 《개방통석(開方通釋)》, 《개방석례(開方釋例)》, 《승방석례(乘方釋例)》, 《초리당천문역산고(焦里堂天文曆算稿)》 등이 있으며, 경사학에서는 《북호소지(北湖小志)》 6권, 《한기(邗記)》 6권, 《양주부지(揚州府志)》 8권, 《양주족징록(揚州足徵錄)》 27권 등이 있고, 의학에서는 《이옹의기(李翁醫記)》, 《의설(醫說)》, 《종두의서(種痘醫書)》, 《사진오험편(沙疹吾驗篇)》 등이 있고, 문학에서는 《극설(劇說)》, 《홍미취죽사(紅薇翠竹詞)》, 《신풍탕구기(神風蕩寇記)》, 《조고루사화(雕菰樓詞話)》, 《화부농담(花部農譚)》, 《곡고(曲考)》 등이 있다. 문집으로는 《조고집(雕菰集)》 24권이 있다. 초순의 저서는 모두 대략 48종 300여 권이다.
3. 서지사항
초순은 부친 초총의 가르침에 따라 처음에는 《십익(十翼)》으로 《역경》을 구했다. 그러나 약관이전에 송역(宋易)을 학습하였고, 25세 때는 왕필(王弼)과 한강백(韓康伯)의 《주역주(周易注)》를 학습하였으며, 25세 이후에는 한위역(漢魏易)으로 나아가서 15년간 정현(鄭玄)・마융(馬融)・순상(荀爽)・우번(虞翻) 등을 연구했다. 나이 41세에 비로소 여러 이론을 남김없이 다 버리고 오로지 《십익》과 《역경》 상・하를 서로 참조하여 융합하고, 또 동연구용지술(洞淵九容之術)의 비례법을 이용하여 《역》의 비례를 구하여 마침내 14세 때 부친이 계시해준 의혹을 풀게 되자 42세 때 《역통석》 초고를 쓰기 시작하여 45세에 그 초고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다시 완원(阮元), 영후재(英煦齋) 등의 교정(校正)과 수차례에 걸친 자신의 수정(修訂)을 거쳐 가경(嘉慶) 18년(1813) 초순의 나이 51세 때 〈역통석자서(易通釋自序)〉와 함께 20권으로 완성되었고, 초순이 55세 때 편찬한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에는 두 번째 책으로 수입(收入)되었다.
초순의 《조고루역학삼서》는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되었으나 가장 이른 40권 분권(分卷) 수사원고본(手寫原稿本)은 중국 국가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판본은 청(淸) 가경 22년(1817), 초순이 수정하고 그 아들과 손자가 교감(校勘)하여 출판한 《초씨총서(焦氏叢書)》본이고, 이후 비교적 광범위하게 유전된 판본으로는 완원(阮元)이 도광(道光) 9년(1829)에 간행한 《황청경해(皇淸經解)》본, 노숭광(勞崇光)이 함풍(咸豐) 10년(1860)에 보간(補刊)한 《황청경해(皇淸經解)》본(홍보재석인본(鴻寶齋石印本)・점석재석인본(點石齋石印本)), 광서(光緖) 병자(丙子)(1876)에 중간(重刊)된 《초씨유서(焦氏遺書)》본과 《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본, 그리고 대만(臺灣) 문해출판사(文海出版社)가 가경(嘉慶) 연간의 수고(手稿)를 영인한 《조고루경학총서(雕菰樓經學叢書)》본 등이 있다. 단행수사고본(單行手寫稿本)으로는 《역통석》과 《역도략》이 남아 있는데, 각각 상해도서관과 남경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4. 내용
이 책은 수학의 비례(比例)를 이용하여 역(易)의 비례(比例)를 구하는 방법으로 《주역(周易)》을 해석하고, 언어문자학의 가차(假借)와 전주(轉注)를 이용하여 경문(經文)과 전문(傳文)을 서로 인용하며, 괘사(卦辭)・효사(爻辭)・단사(彖辭)・상사(象辭) 중의 개념・술어・범주・명제 742개 각각의 문장과 단어를 조목조목 분석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 것이다. 이 책은 복희(伏羲)의 괘(卦),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괘효사(卦爻辭), 공자(孔子)의 《십익(十翼)》이 모두 삼오착종(參伍錯綜)하다는 자신의 “복희・문왕・주공・공자 네 성인 동언설[羲文周孔四聖人同言說]”과 “도이일관론(道以一貫論)”, “개과천선설(改過遷善說)”의 역학사상, 그리고 이로부터 형성한 “점의 형식을 빌려서 가르침을 행한(假卜筮而行敎)” 책이라는 역학관을 《역도략》이나 《역장구》와 다른 관점에서 집중 체현하고 있다. 초순의 역학 사상에서 삼오착종(參伍錯綜)은 곧 방통(旁通)과 같은 말이다. 권1의 〈원(元)・형(亨)・이(利)・정(貞)〉에서 권20의 〈역유태극(易有太極)・여시해극(與時偕極)・실시극(失時極)・부지극(不知極)・육효지동삼극도야(六爻之動三極之道也)・천지지수오십유오(天地之數五十有五)・대연지수오십기용십사유구(大衍之數五十其用十四有九)〉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5. 가치와 영향
《역통석》은 《조고루역학삼서》 중 첫 번째로 완성된 책으로서 경(經)・전(傳)을 서로 인용한 것이 광범위하다. 《역장구》는 이 책에서 건립한 역학 원칙에 따라 《주역》 경・전을 한 구절 한 구절 상세히 해석한 것이고, 《역도략》은 또 앞의 두 책에서의 명사와 도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아울러 한역(漢易) 상수학(象數學)의 여러 역학 원칙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한 책이다. 이런 점에서 《역통석》은 초순 역학 저작의 사전(辭典)과 색인의 역할을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이런 점에서 역학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우(摯友) 왕인지(王引之)는 “혼돈을 타파하였다.[鑿破混沌]”라 하였고, 완원(阮元)은 “경탄할 정도로 신기하다.[石破天惊]”고 평가하였다. 청말(淸末)의 피석서(皮錫瑞)는 “초씨는 《역》을 설명함에 있어 독자적인 경로를 개척하였다. 송조로부터 지금까지 전경(全經)의 학문에 대해 초순처럼 통한 이는 사실 흔치 않다.”고 평했고(《경학통론(經學通論)》), 근대의 웅십력(熊十力)은 “초순은 한인(漢人)의 괘효설을 이어받아 다른 방법으로 운용하였다.……그는 《역》 전경(全經)의 명사들에 대하여 어느 한 글자라도 소통・봉합하지 않은 것이 없다. 초씨의 자득한 점은 여기에 있고 그의 기능도 또한 여기에서 끝이 났다.”고 평가한다(《원유(原儒)》 상권(上卷)). 현대의 이경지(李鏡池)는 초순이 괘위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문자로부터 괘를 설명한 것은 ‘교묘하기는 하지만 억지로 부회하였다.’고 평했다(《주역탐원(周易探源)》). 근대 이래 초순의 《역학삼서》는 학계의 많은 비평을 받고 있으나 방법론의 차원에서 초순이 비례로써 《역》을 연구한 창발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긍정적이고, 이에 대한 연구 또한 끊이지 않는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나는 조부와 부친의 학문을 계승하여 어려서부터 《역》을 좋아했다. 기억하기로 건륭 병신년(1776, 초순 14세) 여름, 글방에서 돌아오자 선자께서 오늘 수업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소축(小畜) 단사(彖辭)〉를 들고 또 사숙 선생에게서 들은 해석을 암송했다. 선자께서는 ‘그렇다면 「구름이 빽빽한데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내가 서쪽 교외에서 왔기 때문이다.」가 왜 다시 〈소과(小過) 육오(六五)〉에서 나타나는가? 너는 마땅히 이를 마음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이에 그 까닭을 반복해서 찾았으나 알 수가 없었고, 〈동인(同人) 구오(九五)〉와 〈여(旅) 상구(上九)〉의 ‘크게 울부짓다[(號咷)]’, 〈고(蠱) 단사(彖辭)〉의 선갑(先甲)・후갑(後甲)과 〈손(巽) 구오(九五)〉의 선경(先庚)・후경(後庚), 〈명이(明夷) 육이(六二)〉와 〈환(渙) 초육(初六)〉의 ‘말의 건장함을 써서 구원하면 길하다.[用拯馬壯吉]’에 미루어 생각해도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역》을 잘 해석한다고 소문난 사람에게 찾아가서 자문했으나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循承祖父之學 幼年好易 憶乾隆丙申夏 自塾中歸 先子問日所課若何 循擧小畜彖辭 且誦所聞於師之解 先子曰 然 所謂密雲不雨自我西郊者 何以復見於小過之六五 童子宜有會心 其思之也 循於是反復其故 不可得 推之同人旅人之號咷 蠱巽先甲後甲 先庚後庚 明夷渙之用拯馬壯吉 益憤塞鬱滯 悒悒於胸腹中 不能自釋 聞有善說易者 就而叩之 無以應也]” 《역통석》 〈역통석자서〉
• “을사년(1785, 23세) 정우(丁憂)에 거자업(擧子業)을 그만두고 《역》 해석서들을 두루 구하여 열독하였으나 의심했던 것에 아무것도 발명하지 못했다.……포희의 괘가 삼오착종(參伍錯綜)하고, 문왕과 주공이 말을 매단 것이 또한 삼오착종하기 때문에 〈소축(小畜)〉・〈고(蠱)〉・〈명이(明夷)〉의 말이 〈소과(小過)〉・〈손(巽)〉・〈환(渙)〉의 말에서 다시 나타난다. 문왕과 주공의 말은 삼오착종하게 거기에 매단 것이고, 공자의 《십익》 또한 삼오착종하게 그것을 도운 것이다. 이것이 《역》의 도리가 밝게 갖추어진 까닭이다.……나는 이미 동연구용(洞淵九容)의 방법을 배우고 이에 수의 비례로써 《역》의 비례를 구하자 줄곧 의심했던 것을 점차 이해할 수 있었다. 초고를 고우(高郵) 왕인지(王引之)에게 보내어 첨삭을 요청하자 왕인지는 정예(精銳)하다고 여겨서 혼돈을 타파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더욱 분면하여 마침내 《역통석》을 완성하였다.[乙巳丁憂 輟擧子業 乃徧求說易之書閱之 於所疑皆無發明……包犧之卦 參伍錯綜 文王周公之繫辭 亦參伍錯綜 故小畜蠱明夷之辭 互見於小過巽渙之辭也 文王周公之辭 以參伍錯綜繫之 孔子十翼 亦參伍錯綜贊之 所以明易之道者備矣……循旣學洞淵九容之術 乃以數之比例求易之比例 向來所疑 漸能理解 初有所得 旣就正於高郵王君伯申 伯申以爲精銳 鑿破混沌 用是憤勉 遂成易通釋一書]” 《역통석》 〈역통석자서〉
(2) 색인어:초순(焦循), 초리당(焦里堂), 역통석(易通釋), 조고루역학삼서(雕菰樓易學三書), 동연구용지술(洞淵九容之術), 방통(旁通), 시행(時行), 상착(相錯)
(3) 참고문헌
• 《焦循之易學》(楊家駱 主編, 鼎文書局, 民國 64)
• 《淸代學術槪論》(梁啓超, 民國 9)
• 《中國思想通史》 第5卷(侯外慮, 人民出版社, 1963)
• 〈焦循的道德哲學之易學〉(牟宗三, 《周易的自然哲學與道德函義》, 文津出版社, 民國 77)
• 《易學哲學史(修訂本)》 第4卷(朱伯崑, 藍燈文化事業股份有限公司, 民國 80)
• 《焦循雕菰樓易學硏究》(賴貴三, 里仁書局, 民國 83)
• 《焦循硏究》(何澤恒, 大安出版社, 1990)
• 〈惠棟與焦循〉(本田 濟, 《東洋思想硏究》, 東京, 創文社, 1987)
• 〈焦里堂的易學〉(戶田豐三郞, 《易經注釋史鋼》, 東京, 風間書房, 昭和43)
• 《焦循〈雕菰樓易學〉硏究》(賴貴三, 里仁書局, 1994)
• 《焦循儒學思想與易學硏究》(陳居淵, 齊魯書社, 2000)
• 《焦循評傳》(劉瑾輝, 廣陵書社, 2005)
【유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