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송시대의 학자 소옹(邵雍)의 저작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는 종래 유학자들이 인도(人道)에 치중한 문왕(文王)의 주역을 추종한 것과는 달리, 복희괘도(伏羲卦圖)를 중심으로 자연만물과 인사(人事)의 이치[物理性命]를 밝히는 선천학(先天學)을 천명한 것이다. 당시 선천학은 도교(道敎)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판되었으나, 주희는 도교에서 술수로 흘렀던 선천학이 소옹으로 인해 성인(聖人)의 역(易)의 면모를 회복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황극경세서》의 선천학은 이후 주희에게 수용됨으로써 후대 역학의 흐름이 크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역학에 끼친 영향 또한 심대하다.
2. 저자
(1) 성명:소옹(邵雍)(1011~1077)
(2) 자(字)·별호(別號):자는 요부(堯夫),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 이천옹(伊川翁), 시호는 강절(康節)
(3) 출생지역:하북성(河北省) 범양(笵陽)(현 정흥현(定興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頤)와 함께 북송오자(北宋五子)로 추앙받는다. 아버지 소고(邵古, 989~1067)가 그러했듯, 그 자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공성(共城)(현 하남성 휘현(輝縣))에 거주하다가, 38세에 낙양(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역학자, 수학자로 유명하며, 도가의 인물인 이지재(李之才)에게 복희역(伏羲易)을 기반으로 하는 선천학(先天學)을 전수(傳受)했다고 한다. 이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비판받는 이유가 되었으나, 주희(朱熹)는 이정(二程)이 소옹을 매우 존숭하였음을 언급하면서 소옹의 학문은 결코 이단에 물든 것이 아니라고 변론하였다. 부필(富弼)과 사마광(司馬光) 등 여러 명사들과 친하게 교유하였다. 묘소는 그가 은거하였던 낙양 이천현(伊川縣)에 있으며,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묘지명을 썼다.
(5) 주요저작:역철학서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시집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그리고 《어초문대(魚樵問對)》가 있다. 《어초문대》는 나무꾼이 묻고 어부가 답하는 형식으로 천지만물, 음양의 화육, 성명도덕(性命道德)의 이치를 논한 저작이다.
3. 서지사항
정호는 묘지명에서 ‘소옹에게 62권의 저술이 있는데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라고 이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소옹 생전에 간행되지는 않았다. 후세에 전한 《황극경세서》도 판본에 따라 다소 편차가 있다. 먼저 아들 소백온은 소옹의 유고(遺稿)들과 제자 장민(張岷)이 평소 소옹에게 배운 것을 기록한 내용들을 모아서 《황극경세서》를 편찬하였다. 총 12권으로 1권~6권은 원(元)·회(會)·운(運)·세(世)에 대한 것이고, 7권~10권은 율려(律呂)·성음(聲音)에 관한 것이며, 11권은 관물내편(觀物內篇), 12권은 관물외편(觀物外篇)이다. 명대에 편찬된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수록된 《황극경세서》는 기존의 책에 채원정(蔡元定)(1135~1198)의 《황극경세지요(皇極經世指要)》를 편집해 선천학과 관련한 각종 도식을 수록하고, 《어초문대(魚樵問對)》와 《무명공전(無名公傳)》 및 후대학자들의 논의를 담은 〈부록〉까지 싣고 있다. 한편 현재 《도장(道藏)》에도 《황극경세서》가 실려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황극경세서》는 《도장》을 저본으로 삼아 14권 62편으로 편찬한 것이다.
4. 내용
《황극경세서》의 선천학은 복희괘도에 근거한다. 일반적으로 문왕역이 인도(人道)를 밝히는데 치중한데 비해, 복희역은 천지자연의 이치를 먼저 밝힌다는 뜻에서 선천학이라 불린다. 그러나 소옹이 말하는 선천(先天)은 오히려 복희가 괘를 긋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역을 말하는 것으로 복희8괘는 이른바 획전(畫前)의 역을 그대로 그려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소옹은 “선천학은 심법[先天之學 心法也]”으로 “성(誠)을 위주로 하며, 지성(至誠)이면 신명과 통하고 불성(不誠)이면 도를 얻을 수 없다.[先天之學 主乎誠 至誠可以通神明 不誠則不可以得道]”고 한다. 이를 보면 소옹의 선천학이 단지 상수에 그치지 않고 도학을 지향함을 알 수 있다.
소백온에 따르면 ‘황극경세(皇極經世)’라는 이름에서 ‘황(皇)’은 지극히 큰 것[至大], ‘극(極)’은 지극히 중절한 것[至中], ‘경(經)’은 지극히 바른 것[至正], ‘세(世)’는 지극히 변화하는 것[至變]을 말한다. 본래 《서경》 〈홍범〉에서의 ‘황극(皇極)’은 임금이 다스리는 지극히 중정(中正)한 법도를 말하지만, 소옹은 황극을 천도와 인사를 망라하는 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소옹은 천지자연의 조화원리를 4의 숫자로 설명한다. 이 원리는 자연과 인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소옹은 원(元)·회(會)·운(運)·세(世)의 수리로 우주의 변화와 대순환을 설명한다. 1일은 12시, 1달은 30일, 1년은 12개월, 1세(世)는 30년, 1운(運)은 12세, 1회(會)는 30운, 1원(元)은 12회로서, 1원은 129,600년이 된다. 이 1원을 대주기로 우주는 새롭게 순환한다는 것이다. 소옹은 이 수리(數理)에 근거하여 역사의 치란과 흥망을 황(皇)·제(帝)·왕(王)·패[伯]로 나누어 평론한다. 소옹의 성음론도 단지 성운학을 위한 것은 아니며 이에 근거하여 선천역을 경세방면으로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소옹이 북송오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것은 물리와 상수를 탐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이학(理學)과 도학(道學)을 지향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5. 가치와 영향
성리학의 선구자인 정이는 어려서 소옹에게 배우고 그 인격을 존중하였으나, 유학자의 풍모가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상(象)과 수(數)를 말하는 것으로 천하국가를 다스리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반면 주희는 성리학에서는 정이의 학문을 계승하였지만, 역학에서는 소옹의 선천학을 수용하였다. 주희는 하도낙서(河圖洛書) 및 복희괘도(伏羲卦圖)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수를 체계화함으로써 한대 상수역학을 폐기하고 상수학의 새로운 세계를 활짝 열었다.
소옹의 선천학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의 서명응(徐命膺)(1716~1787)의 《선천사연(先天四演)》이 대표적이며, 이규경(李圭景)(1788~1856)은 소옹의 전기를 수집 정리하는 한편 《황극경세서》의 가치를 역설하였다. 나아가 구한말 신흥종교의 개벽사상에서도 소옹 원·회·운·세론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선천의 학문은 심법이다. 그러므로 그림이 모두 가운데에서 나오고 온갖 조화와 사건들이 마음에서 나온다.[先天之學 心法也 故圖皆從中起 萬化萬事生乎心也]” 〈관물외편(觀物外篇)〉
• “선천의 학문은 성(誠)을 중심으로 한다. 지성(至誠)은 신명과 통할 수 있으나, 불성(不誠)이면 도(道)를 얻을 수 없다.[先天之學 主乎誠 至誠可以通神明 不誠則不可以得道]” 〈관물외편(觀物外篇)〉
• “무릇 ‘사물을 본다[觀物]’는 것은 눈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써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이치로써 보는 것이다.[夫所以謂之觀物者 非以目觀之也 非觀之以目也 而觀之以心也 非觀之以心 而觀之以理也]” 〈관물내편(觀物內篇)〉
• “성인이 만물의 실정을 능히 하나로 할 수 있는 것은 성인이 능히 돌이켜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서 본다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만물을 보는 것이 아니니, 나의 입장에서 만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곧 만물로써 만물을 보는 것이다. 이미 만물로써 만물을 볼 수 있으니 또한 어찌 그 사이에 다른 것[나]이 있겠는가.[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 謂其聖人之能反觀也 所以謂之反觀者 不以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 以物觀物之謂也 旣能以物觀物 又安有我于其間哉]” 〈관물내편(觀物內篇)〉
(2) 색인어:황극경세(皇極經世), 관물내편(觀物內篇), 원회운세(元會運世), 선천학(先天學), 소옹(邵雍), 소백온(邵伯溫), 북송오자(北宋五子)
(3) 참고문헌
• 소강절의 선천역학(高懷民 지음, 곽신환 옮김, 예문서원)
• 소강절의 철학(이창일, 심산)
• 皇極繫述(宋代 邵伯温)
• 觀物内篇解(宋代 邵伯温)
• 皇極經世傳(明代 黄畿)
• 皇极经世直解(清代 王植)
【이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