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황서(黃書)》는 왕부지(王夫之)가 젊은 시절인 38세(1656)에 지었다. 이 책은 노년 시절인 64세에 저술한 《악몽(噩夢)》과 함께 왕부지 정치철학의 핵심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참된 정치관을 제기했다.
왕부지는 이 책에서 사람이 정치를 할 때에 하늘의 법칙을 본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음양과 오행의 법칙이 각각의 역할을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듯이, 정치도 각자가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2. 저자
(1) 성명:왕부지(王夫之)(1619~1692)
(2) 자(字)·호(號):자는 이농(而農), 호는 선산(船山), 강재(薑齋), 일호도인(一瓠道人), 선산선생(船山先生), 석당선생(石堂先生).
(3) 출생지역:형주부(衡州府) 성의 남쪽인 회안봉(回雁峰) 왕아평(王衙坪)(現 호남성(湖南省) 형양시(衡陽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왕부지는 1619년 9월 1일(음력)에 유학자 집안의 아버지 조빙(朝聘)(50세)과 어머니 담(譚)부인(47세)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맏형(개지(介之))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십삼경(十三經)》을 비롯하여 많은 고전을 읽었다. 1637년(19세) 봄에 고향의 처사인 도만오(陶萬梧)의 딸(16세)과 결혼하였다. 1638년(20세)에 장사(長沙)의 악록서원(岳麓書院)에서 공부하였고, 1642년(24세) 4월에 맏아들인 물약(勿葯)을 낳았으나, 1643년 11월에 물약이 죽었다.
1644년(26세) 3월에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명 왕조가 멸망하였고, 그해 5월에 오삼계(吳三桂)가 청(淸)나라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北京)을 함락하였다. 왕부지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비분시(悲憤詩)〉를 지었다. 그해 8월에 둘째 아들인 반(攽)을 낳았고, 12월 중순에 남악(南嶽)의 흑사담(黑沙潭) 부근에 ‘속몽암(續夢庵)’이라는 초옥을 지었다. 1645년(27세) 5월에 청나라 군대가 남경(南京)을 공격하여 홍광제(弘光帝)인 주유숭(朱由崧)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속비분시(續悲憤詩)〉를 지었다. 1646년(28세) 여름에 상음(湘陰)에 가서 첨도어사(僉都御史)인 호북순무(湖北巡撫) 장광(章曠)에게 상서(上書)하여 남북독사(南北督師)와 농민 봉기군을 연합하여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는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해 11월에 부인이 죽었다. 1647년(29세)에 청나라 군대가 형주(衡州)를 점령하자 하여필(夏汝弼)과 함께 상향현(湘鄕縣) 남쪽 백석봉(白石峰)으로 도피했고, 8월에 둘째 형이 죽었으며, 오래지 않아 아버지와 숙부가 잇달아 죽었다.
1648년(30세) 봄 《역(易)》의 이치를 강술하고, 10월에 관사구(管嗣裘)‧하여필‧승성한(僧性翰) 등과 함께 남악의 방광사(方廣寺)에서 청나라에 항거하는 군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피신하다가, 1650년(32세) 봄에 계림에서 정의가(鄭儀珂)의 딸(18세)과 재혼하고, 8월에 어머니가 죽었다. 1651년(33세) 1월에 아내‧조카와 함께 형양으로 돌아왔다. 1653년(35세) 2월에 셋째 아들인 물막(勿幕)을 낳았다.
1654년(36세) 8월에 청나라 정부의 수색을 피해 다시 유랑 생활을 시작했고, 겨울에 상령(常寧)에서 《주역》과 《춘추》를 강의했다. 1655년(37세) 봄에 침주(郴州) 흥령산(興寧山)의 절에 기거하면서 《주역외전(周易外傳)》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해 8월에 《노자연(老子衍)》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1656년(38세)에 서장원(西庄源)으로 돌아왔고, 그해 3월에 《황서(黃書)》를 집필했으며, 같은 해 5월에 넷째 아들인 어(敔)를 낳았다. 1657년(39세) 4월에 유랑 생활을 마치고 ‘속몽암’으로 돌아왔다. 그해 12월에 유근노(劉近魯)를 방문하였고, 이후에 유근노의 장서 6천여 권을 자주 빌려 보았다.
1660년(42세)에 셋째 아들인 물막이 죽었으며, 후에 형양현(衡陽縣) 금난향(金蘭鄕) 고절리(高節里)에 초옥을 짓고 이름을 ‘패엽려(敗葉廬)’라고 하였다. 1661년(43세) 6월에 둘째 부인인 정씨가 죽었다. 1662년(44세)에 ‘패엽려’에 거하면서 남명(南明)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속비분시〉를 지었다. 1664년(46세)에 둘째 아들인 반이 유근노의 딸과 결혼하였다. 1665년(47세)에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을 수정하고, 1666년(48세)에 ≪사서훈의(四書訓義)≫를 집필하였다. 1669년(51세)에 장씨(張氏) 부인을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해 봄에 《오십자정고(五十自定稿)》를 편찬했으며, 여름에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상‧하권을 찬술하였으며, 그해 겨울에 초당을 지어 ‘관생거(觀生居)’라고 이름 지었다.
1672년(54세)에 ‘관생거’에서 살았지만, 여름과 가을에는 ‘패엽려’에 머물렀다. 그해 8월에 친구인 방이지(方以智)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1674년(56세)에 오삼계의 군대가 호남성의 각 곳을 공격하자, 제자인 당단홀(唐端笏)과 함께 배를 타고 도피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1675년(57세) 가을에 ‘관생거’에 돌아온 후, 석선산(石船山) 기슭에 초당을 지어 ‘상서초당(湘西草堂)’이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678년(60세) 윤3월에 오삼계가 형주에서 황제로 칭하면서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며 그의 무리들이 강제로 권진표(勸進表)를 쓰라고 하자, 그것을 거절하고 깊은 산 속으로 피난하여 〈볼계부(祓禊賦)〉를 지었다. 1679년(61세)에 청의 군대가 형주를 수복하자 장유모(章有謀)와 함께 청의 군대를 피해 숲속에 들어갔고, 1682년(64세) 10월에 《악몽(噩夢)》 1권을 썼으며, 1685년(67세)에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9권을 썼고, 9월에 《주역내전(周易內傳)》 6권과 《주역내전발례(周易內傳發例)》 1권을 지었다. 1686년(68세) 봄에 맏형이 죽었다. 1688년(70세)에 《칠십자정고(七十自定稿)》를 편찬했다. 1691년(73세) 병환 중에 《독통감론》 30권과 《송론(宋論)》 15권의 집필을 완성하고, 1692년(74세) 1월 2일(음력)에 상서초당에서 사망하였다.
(5) 주요저작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주역내전(周易内傳)》, 《주역외전(周易外傳)》,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상서인의(尙書引義)》, 《사서훈의(四書訓義)》, 《독통감론(讀通鑑論)》, 《사문록내‧외편(思問錄内)‧外篇》, 《설문광의(說文廣義)》, 《송론(宋論)》, 《춘추패소(春秋稗疏)》, 《춘추가설(春秋家說)》, 《춘추세론(春秋世論)》,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장자통(莊子通)》, 《노자연(老子衍)》, 《예기장구(禮記章句)》, 《시광전(詩廣傳)》, 《황서(黄書)》, 《소수문(搔首問)》, 《주역내전발례(周易内傳發例)》,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 《사해(俟解)》, 《악몽(噩夢)》 외 다수
3. 서지사항
《황서(黃書)》는 총 1권이다. 이 1권은 총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은 〈원극(原極)〉이고, 제2편은 〈고의(古儀)〉이며, 제3편은 〈재제(宰制)〉이고, 제4편은 〈신선(慎選)〉이며, 제5편은 〈임관(任官)〉이고, 제6편은 〈대정(大正)〉이며, 제7편은 〈이합(離合)〉이다.
이 《황서》는 왕부지(王夫之)가 1656년(38세)에 지은 것으로, 《선산전서(船山全書)》 제12책(船山全書編輯委員會編校, 嶽麓書社, 1992)에 실려 있다.
4. 내용
왕부지는 《황서》에서 성인은 천지와 덕을 합한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성인이 만든 정치 제도를 후대의 정치가들이 잘 본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화하(華夏)를 도덕성에 기반한 문명의 상징으로 여기고, 이적(夷狄)을 야만으로 여기며 비판한다. 그는 화하 문명이 이적의 무리와 단절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질서가 붕괴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때문에 그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에 항거하고, 도덕성을 토대로 하는 대일통(大一統)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이론 생산에 심혈을 기울였다.
5. 가치와 영향
왕부지의 화이관은 다원적 세계관을 중시하는 현대의 관점에 의하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화이관이 획일적인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여기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세계관의 반영이다.
그가 화하 문명과 이적을 배타적 관계로 설정하며, 화하 문명을 이적 문명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것으로 설정한 점은 편협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는 그가 이민족인 청나라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의해 민족이 멸망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도출되었다. 한족(漢族)의 문명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강한 그에게 만주족(滿洲族)의 침략으로 인해 조국이 멸망하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는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강제적으로 합병하는 것과 같은 침략을 야만으로 생각하며, 도덕성을 토대로 하여 이웃 나라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문명의 상징으로 여긴다. 이처럼 도덕성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인격을 연마함과 아울러 이웃과 평화로운 어울림을 추구하는 삶은 의미 있다. 왕부지의 《황서》가 추구하는 본질은 바로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하며 평화를 유지하고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왕부지의 이러한 가치관은 도구적 이성에 의해 인간의 도구화가 증가되고 있는 오늘날,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사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나라 안에 재물이 풍족하면 저절로 편안하고, 군사가 충분하면 저절로 강해지며, 지혜가 충만하면 저절로 드러나니, 한 사람으로써 세상을 의심하지 않고, 세상으로써 한 사람을 사사롭게 하지 않는다.[中國, 財足自億也, 兵足自強也, 智足自名也, 不以一人疑天下, 不以天下私一人.]” 〈재제(宰制)〉
• “왕이 천도를 본받고, 모든 민족을 부양하며, 그 따를 것을 순하게 여기고, 그 사랑할 것을 보배로 여기면 성(性)과 명(命)이 바르게 될 것이다.[王者規天道, 長萬族, 順其所從, 珍其所寵 則性命正矣.]” 〈신선(慎選)〉
• “다름과 같음을 따르고, 어긋남과 분별을 세우며, 소인으로써 군자를 봉양하는 것은 하늘의 제도이다. 봉양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봉양하더라도 궁핍하지 않다.[順異同, 立差辨, 以小人養君子, 天之制也. 觀其所養, 故養而不窮.]” 〈신선(慎選)〉
• “왕은 어진 사람을 봉양함으로써 백성을 부양하고, □□로써 하늘에 짝한다. 그 어지러움을 이으면 먼저 형벌로써 금지하고, 그 다스림을 이으면 끝내 덕으로 교화한다.[王者養賢以養民, □□以配天. 繼於其亂, 先以刑禁; 繼於其治, 終以德化.]” 〈대정(大正)〉
• “천지의 기(氣)는 그 저절로 그러함을 도우며 그 어쩔 수 없음을 좇으니, 그 저절로 그러함을 도우므로 모이고, 그 어쩔 수 없음을 좇으므로 떠난다. 이 때문에 천지의 밤과 낮을 아는 사람은 떠나고 모이는 까닭을 함께 말할 수 있다.[天地之氣, 輔其自然而循其不得已, 輔其自然故合, 循其不得已故離. 是故知天地之晝夜者, 可與語離合之故矣]” 〈이합(離合)〉
(2) 색인어:왕부지(王夫之), 선산(船山), 황서(黃書), 정치철학, 화이관(華夷觀)
(3) 참고문헌
• 黃書(船山全書編輯委員會編校, 船山全書 第12冊, 嶽麓書社)
• 王夫之評傳(蕭萐父‧許蘇民, 南京大學出版社)
• 王船山硏究著作述要(朱迪光, 湖南大學出版社)
• 〈王夫之夷夏之辨與民族愛國主義〉(劉立夫, 衡陽師範學院學報, 2010)
• 〈王船山思想國際學術硏討會 相關論文題錄索引〉(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中心, 2019. 10)
• 〈紀念王船山誕辰400周年 王船山思想國際學術硏討會 論文集〉上‧下(2019. 10)
【이철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