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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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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소수간(歐蘇手簡)》은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修(1007~1072))와 소동파(蘇東坡)1036~1101))의 ‘편지모음선’이다. 구양수와 소동파를 일러 ‘구소(歐蘇)’로 병칭하였는데, 이 두 사람의 수간(手簡)을 선별하여 《구소수간》이라 하였다. 중국에서 《구소수간》의 간행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원나라에서 과거제도가 시행된 1314년 이전에 두인걸(杜仁傑(1197∼1282))이 편찬한 것으로 본다.

2. 저자

(1) 저자:구양수(歐陽修)·소식(蘇軾) / 편자:두인걸(杜仁傑)
(2) 자(字)·별호(別號):구양수의 자는 영숙(永叔)·취옹(醉翁)·육일거사(六一居士),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소식의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로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두인걸의 자는 중량(仲梁)이다.
(3) 출생지역:구양수는 길주(吉州) 여릉(廬陵(현 강서성(江西省) 길안(吉安)))이며, 소동파는 미주(眉州) 미산(眉山(현 사천성(四川省) 미산(眉山)))이다. 두인걸은 제남(濟南) 장청(長淸) 출신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 구양수
구양수는 송(宋)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 사천성(四川省) 면양(沔陽)에서 출생하여 희녕(熙寧) 5년(1072) 향년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세 때 사천성의 판관을 지냈던 아버지를 여의고, 10세 무렵 《창려선생문집(昌黎先生文集)》을 읽고 감명을 받아 고문(古文)에 뜻을 두었다. 천성(天聖) 7년(1029) 국자감에서 거행한 고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천성 9년(1031) 낙양에 부임하여 윤수(尹洙), 매요신(梅堯臣) 등과 어울리며 고문과 시가(詩歌)를 지었다. 경우(景祐) 3년(1036) 범중엄이 좌천되는 일에 〈여고사간서(與高司諫書)〉를 짓고 이릉현령으로 좌천당했다.
인종 경력(慶曆) 2년(1042) 활주통판으로 나갔다가 경력 5년(1045)에 저주(滁州)로 좌천되면서 유명한 〈취옹정기(醉翁亭記)〉를 지었다. 인종 지화(至和) 4년(1057)에 천하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책임으로 삼고, 권지공거(權知貢擧)로 있을 때 당시 문풍의 폐단을 염려하여 평담(平淡)하고 전아(典雅)한 문장을 추구하였다. 이 당시 구양수가 발탁한 인재는 소식·소철 형제와 증공 등이 있고, 소순(蘇洵)과 왕안석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구양수는 정무와 사서 편찬에 주력하면서 시작(詩作)과 서화(書畫), 금석문(金石文) 연구와 탄금(彈琴) 등 문인으로서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가우(嘉祐) 5년(1060) 《신당서(新唐書)》를 완성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치평(治平) 3년(1066) 60세가 될 때부터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 받지 못하고, 희녕 2년(1069), 왕안석이 신법을 추진할 때 시행과정의 폐단을 지적한 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희녕 5년(1072) 7월 나이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 소동파
소동파는 송(宋) 인종(仁宗) 경우 3년(1036) 미주 미산에서 태어나 건중정국(建中靖國) 1년(1101) 향년 66세의 나이로 상주(常州)에서 별세했다. 조부인 소서(蘇序)는 이름난 시인이고, 아버지 소순(蘇洵)은 소식과 소철, 두 아들과 삼소(三蘇)로 불린 문장가이다. 동생 소철 또한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다. 소동파는 가우 1년(1056) 21세에 개봉부시(開封府試)에합격하고, 이때 지은 〈성시형상충후지지론(省試刑賞忠厚之至論)〉으로 구양수의 칭찬을 받았다.
가우 2년(1057) 22세에 예부시(禮部試) 진사급제하고, 34세에 〈상신종황제서(上神宗皇帝書)〉를 제출하고 지방으로의 전출을 요청하여 항주통판으로 나아갔다. 희녕 8년(1075) 40세에 밀주에 있으면서 초연대를 건축하고 〈초연대기(超然臺記)〉를 지었다. 42세에 서주지주(徐州知州)로 임명되었을 때 황하의 홍수가 서주까지 이르자, 군대와 백성을 거느리고 홍수를 방지하여 서주를 보호하였다.
원풍(元豐) 2년(1079)에 오대시안(烏臺詩案)에 연루되어 황주(黃州)로 유배갔다. 황주유배기에 좌절과 큰 고난을 겪었지만 문학적 성취를 크게 이루었다. 55세에 항주지주(抗州知州)에 재직하며 서호(西湖)에 소제(蘇堤)를 축조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격변으로 혜주(惠州)로 유배되어 공무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소성(昭聖) 4년(1097) 62세에 해남도 담주에 도착한 소동파는 근 3년 동안 그곳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그곳 주민들에게 중원문화를 전수했다. 노년의 악조건 속에서도 특유의 낙천적 성격과 호매한 기질로 고난을 이겨내며 창작활동을 쉬지 않았다. 소동파는 구양수와 더불어 고문의 복고운동에 주력하면서 유가와 불가, 도가의 사상을 동시에 섭렵하였다. 그런 영향으로 어느 하나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글을 지었다.
• 두인걸
두인걸은 금(金)나라 말기에서 원(元)나라 초기의 산곡(散曲) 작가로 알려져 있다. 금나라가 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 지원(至元) 27년(1290)에 사망하였다.
(5) 주요 저작
• 구양수:《당서(唐書)》, 《오대사기(五代史記)》,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150권), 《시본의(詩本義)》(16권), 《육일사(六一詞)》(3권), 《육일시화(六一詩話)》(1권) 등이 있다. 작품 일련은 주필대(周必大)에 의해 《구양문충공전집(歐陽文忠公全集)》으로 정리되었다.
• 소동파:《동파집(東坡集)》(40권), 《동파후집(東坡後集)》(20권)과 《주의(奏議)》·《내제집(內制集)》·《외제집(外制集)》·《응소집(應詔集)》·《속집(續集)》을 합친 《동파칠집(東坡七集)》이 있다. 이는 100권이 넘는 방대한 것으로 《동파전집(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 두인걸:《도공사죽집(挑空絲竹集)》, 《하락유고(河洛遺稿)》

3. 서지사항

《구소수간》은 서문-목록-본문 순서대로 편제되었다. 수록된 수간(手簡)은 대부분 《구양수전집》과 《소동파전집》의 〈척독〉 혹은 〈수간〉 부분에서 선집된 것들이다. 《구소수간》의 권제1, 2는 〈여릉 상하〉이며 구양수가 쓴 편지 125편이 있다. 《구소수간》의 권제3, 4는 〈동파 상하〉이며 소동파가 쓴 편지 152편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수간을 모아 만든 《구소수간》에는 총 277편의 수간이 들어 있다. 수간의 면면을 보건대 양가(兩家)의 문집에 수록된 많은 양의 서찰을 정선(精選)하여 《구소수간》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국내 목판본 중에 규장각 소장본(일사고(一蓑古)895.16) 《구소수간》은 현전하는 판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1393(태조 2년) 6월에 예천(보주(甫州))에서 개판(開板)되었다. 당시 경상도 안렴사(按廉使)였던 심효생(沈孝生)이 간행하였다. 이 책은 권두에 두인걸의 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고(古)377-65) 《구소수간》은 두인걸의 서문이 없으며 간행 시기는 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정된다. 국내 필사본으로 성균관대학교 소장본(DO4C-0024) 《구소수간》이 있다. 이 책에는 두인걸의 서문과 1450년 1월에 승훈랑(承訓郞) 청주교수(淸州敎授) 양순이 쓴 발문이 있다. 《구소수간》은 조선 초 경상도 예천군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 간각(間刻)되었다.
중국에는 전래된 《구소수간》이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구소수간》은 조선 판본과 일본 판본이 모두이다.
일본 목판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고고(古古)5-90-18) 《구소수간》이 국내에 소장된 것 중 가장 이르다. 간기는 “정보이을유(正保二乙酉(1645))구월길신이조옥옥정촌상평락사개판(九月吉辰二條玉屋町村上平樂寺開板)”으로 되어 있다. 또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古古5-35-67) 《구소수간주해(歐蘇手簡註解)》는 서천문중(西川文仲)이 주해하였다. 간기는 “명치십사년(明治十四年(1881))십이월각성발태(十二月刻成發兌)”라고 되어 있다. 권두에 〈곡선생서(谷先生序)〉, 〈석진선생서(石津先生序)〉, 〈서천선생자서(西川先生自序)〉, 〈예언(例言)〉이 차례로 실려 있다. 규장각 소장본(가람(古) 895.16-G93g-v.1-2) 《구소수간》은 1780년에 명해축상(溟海竺常)이 편찬하였다. 이 책에는 명해축상의 〈중각구소수간서(重刻歐蘇手簡序)〉와 두인걸의 서문이 들어 있다.
조선본 《구소수간》(1393)은 중국본 하한녕(夏漢寧) 교감(校勘), 《구소수간 교감》(2014)과 일본본 서천문중(西川文仲) 주해(註解), 《구소수간주해》(1881)와 비교해볼 때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구소수간 교감》과 《구소수간주해》는 〈여릉 상하〉 수간이 125편에 수신인이 58명이며, 〈동파 상하〉 수간이 152편에 수신인은 85명이다. 이에 비해 조선본 《구소수간》 〈여릉 상하〉 수간은 119편에 수신인은 56명이며, 〈동파 상하〉 수간은 136편에 수신인은 84명이다.
조선본 《구소수간》 〈여릉 상하〉에는 〈여오중부(與吳中復)〉, 〈여이유후(與李留後)〉, 〈여풍장정공(與馮章靖公)〉, 〈여채군모(與蔡君謨)〉, 〈여증자고(與曾子固)〉, 〈여손원규(與孫元規)〉가 들어 있지 않고 〈여오간원(與吳諫院)〉, 〈여이소사(與李少師)〉, 〈여오용도(與吳龍圖)〉, 〈여중태박(與仲太博)〉이 들어 있다. 또한 〈동파 상하〉에는 〈여정수재(與程秀才)〉, 〈여구양지회(與歐陽知晦)〉, 〈여이정평(與李廷評)〉, 〈답범촉공(答范蜀公)〉, 〈여오수재(與吳秀才)〉가 들어 있지 않고 〈답우인(答友人)〉, 〈여우인(與友人)〉, 〈여뇌주장수(與雷州張守)〉, 〈여정천모(與程天侔)〉가 들어 있다.

4. 내용

《구소수간》은 중국의 대문호 구양수와 소동파가 자신과 교류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짧은 서신들을 두인걸이 엄선하여 엮은 책으로, 그 내용은 교류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일상의 사소한 일부터 정치, 사회, 문학 등 다양한 소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구소수간》 〈여릉 상하〉 수간은 125편이며, 수신인은 58인이다. 이들 수신인들은 구양수와 친분을 나눈 정치인, 문인들이 주를 이룬다. 〈여릉 상하〉의 주요 내용을 시기별로 보면 ① 초기 관리 시기, ② 경력 신정 시기, ③ 외직으로 떠돈 10년 시기, ④ 조정으로 돌아온 시기, ⑤ 퇴임하여 은거한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구소수간》 〈동파 상하〉 수간은 152편이며, 수신인은 85인이다. 소동파의 수간에 나오는 수신인을 보면, ‘일생 동안 깊게 교유한 문인 정치인’과 ‘유배지에서 사귄 문인 관료들’, ‘그를 추종한 문하생과 가족들’이 있다. 이들은 평소 예와 공경으로 대하고 서로 친분을 주고받는 관계였으며, 친교가 두터워 마음속의 말을 주고받는 사이이기도 하였다. 유배지에서 만난 문인 관료들 역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로 이들과 문학적 교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동파 상하〉의 주요 내용을 시기별로 보면 먼저 ① 초기 관리 시기, ② 지방관 시기, ③ 황주 유배시기, ④ 중앙관 시기, ⑤ 혜주·담주 유배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5. 가치와 영향

《구소수간》은 중국에서 나온 책이지만 현재 중국에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편찬 이후 한국과 일본으로 유통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수용되어 조선 초에 복간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世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필원잡기(筆苑雜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을 보면, 세종이 《구소수간》을 많이 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구양수와 소동파의 수간은 전아(典雅)하고 충아(冲雅)하며 순수(醇粹)하고 청소(淸騷)하다는 평과 함께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장의 특징이 있어 편지 작성의 전범이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구양수와 소동파 문장의 간략함’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되고 《구소수간》의 초선본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허균은 구양수의 글 68편과 소동파의 글 72편을 취하여 《구소문략(歐蘇文略)》을 지었다. 문인들은 구양수와 소식의 문집에서 서(書)와 수간을 분리하여 싣는 것을 본받아 문집 편찬에 적용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구소수간초선(歐蘇手柬抄選)》을 비롯한 다량의 《구소수간》 이본이 간행되고 필사된 사실은 조선 후기 수간 문학의 대두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사물은 본디 스스로 드러나지 못하고 어두운 곳에 있다가 어진 현자를 만나서야 드러납니다.[物固有處於幽晦而發於賢哲者]” 《구소수간》 〈여릉 상하〉 〈여이유후(與李留後)〉
• “작문의 체제란 처음엔 치달리듯 글을 짓고자 하나 오랜 후에는 마땅히 수렴하고 절제하여 간략하고 신중하며, 엄정히 하여 혹 때때로 자신의 감회를 마음껏 풀어내더라도 하나의 체제가 되지 않아야 지극히 좋은 것이라네.[然作文之躰 初欲奔馳 久當收節 使簡重嚴正 或時肆放以自舒 勿為一躰 則盡善矣]” 《구소수간》 〈여릉 상하〉 〈여서무당(與徐無黨)〉
• “거처하는 곳에서 강까지는 채 열 걸음도 안 되는데 풍랑과 안개비가 새벽부터 저녁까지 변화무상합니다. 강남의 모든 산들이 저의 책상과 자리 밑에 있는 격이니 이런 다행함은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궁핍에 대한 근심은 있을지라도, 돌아보면 이 역시 거친 옷과 변변치 못한 음식에 대한 근심일 뿐입니다.[寓居去江無十步 風濤煙雨 曉夕百變 江南諸山在几席下 此幸未始有也 雖有窘乏之憂 顧亦布褐藜藿而已]” 《구소수간》 〈동파 상하〉 〈여사마온공(與司馬溫公)〉
• “소위 스스로 즐긴다고 하는 것은 세속의 즐거움을 쫓는 것이 아니고, 가슴속이 넓고 거리낌이 없어 한 가지 일도 없는 것을 말하지. 천지 가운데 있는 산천과 초목, 벌레와 물고기와 같은 것들도 모두 내가 만드는 즐거운 일이야.[所謂自娛者 亦非世俗之樂者 但胸中廓然無一物 即天壤之內 山川草木蟲魚之類 皆吾作樂事也]”《구소수간》 〈동파 상하〉 〈여자유(與子由)〉
(2) 색인어:구소수간(歐蘇手簡), 구양수(歐陽脩), 소동파(蘇東坡), 여릉상하(廬陵上下), 동파상하(東坡上下)
(3) 참고문헌
• 《歐蘇手簡》(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歐蘇手柬抄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歐蘇手簡 校勘》(夏漢寧 校勘, 中山大學出版社)
• 《歐蘇手簡註解》(西川文仲 註解, 京都府平民出版)
• 《歐陽脩全集 上, 下》(楊家駱 主編, 世界書局)
• 《蘇東坡全集 上, 下》(楊家駱 主編, 世界書局)
• 《蘇軾全集校注》(張志烈, 馬德富, 周裕鍇 主編, 河北人民出版社)
• 〈구양수와 소식의 척독모음집 《구소수간》〉(배미정, 《문헌과해석》 통권24호, 문헌과해석사, 2003)
• 〈關于《歐蘇手簡》 所收歐陽脩尺牘〉(朱剛, 《武漢大學學報》 권65, 3기, 2012)
• 〈《歐蘇手簡》考〉(祝尙書, 《中國典籍與文化》, 3기, 2003)


【유미정】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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