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낙승집(駱丞集)》은 당(唐)나라 낙빈왕(駱賓王)이 초당(初唐)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 시기에 시어사(侍御史)로 재직하면서 지었던 시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낙선생집(駱先生集)》, 《낙임해집(駱臨海集)》, 《시어집(侍御集)》, 《의오집(義烏集)》, 《무공집(武功集)》, 《영은자집(靈隱子集)》이라고도 부른다.
2. 저자
(1) 성명 : 낙빈왕(駱賓王)(630?-684後?)
(2) 자(字) 호(號) : 자는 관광(觀光), 호는 미상(未詳). 사전에는 그의 자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낙씨종보(駱氏宗譜)》에 낙빈왕은 자가 관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 출생지역 : 무주(婺州) 의오(義烏).(現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
(4) 주요활동과 생애
그는 일곱 살에 이미 시문에 능하여 거위를 보고 “흰 털은 푸른 물에 떠있고, 붉은 손바닥은 맑은 물결에 휘젓고 있네(白毛浮綠水, 紅掌撥淸波)”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 도왕부(道王府)의 막료와 무공현(武功縣)의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건봉(乾封) 원년(元年)(666)에 천거를 받고 대책(對策)에 합격하여 봉예량(奉禮郞)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총장(總章) 원년(668)을 전후하여 동대상정학사(東臺詳正學士)의 관직을 겸임하였다. 함형(咸亨) 원년(670)에는 파직(罷職)을 당하게 되었고, 다행이 배행검(裴行儉)의 추천을 받고 서역 종군에 참가하게 되었다. 상원(上元) 2년(675)에는 촉 땅에서 돌아온 후 무공현주부(武功縣主簿)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그리고 의봉(儀鳳) 3년(678)에 모친의 상기(喪期)를 마치고 장안현 주부(長安縣主簿)를 제수받고 얼마 후 다시 시어사(侍御史)의 자리에 발탁되었으나 다시 파직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가 시어사로 있을 때 조정은 고종(高宗)이 통치하지 못하고 무측천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당의 권력이 옮겨가는 것을 목도하고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가 무고의 죄를 뒤집어쓰고 옥에 갇히게 되자 〈형화부(螢火賦)〉를 지어 자신의 결백을 밝혔다. 그는 옥에서 나온 후에 임해(臨海)로 좌천되었고 후에 서경업(徐敬業)을 따라 군대를 일으켜 무측천을 성토하였는데 반란이 실패하자 망명하여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낙빈왕이 서경업의 반란에 가담하였을 때 진중(陣中)의 격문(檄文)은 모두 낙빈왕이 기초하였다. 그가 무후의 죄를 책망하면서 “선제를 장사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이어린 태자를 어디에 기탁하면 좋은가[一抔之土未乾 六尺之孤何託]”라고 비판한 글을 읽게 된 무후가 이러한 인재를 잃게 된 것이 모두 재상의 잘못이라고 안타까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5) 주요저작
《전당시(全唐詩)》 등에 그의 시가 전하고 있다.
3. 서지사항
《구당서》를 보면 “무측천이 그의 문장을 소중히 여겨 사신을 보내 구하게 하였는데 연주(兗州) 희운경(欷雲卿)이 10권으로 모아 완성하여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구당서, 경적지》와 《신당서, 예문지》에는 모두 10권이라고 기록하였고, 송(宋)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도 10권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원(元) 이후에 모두 산실되었다. 명인(明人)이 편집한 《낙빈왕집(駱賓王集)》은 다른 권수의 판본이 전하게 되었다. 청대에 이르러 송원(宋元) 구각(舊刻)의 《낙빈왕집》 10권본이 계속해서 출현하게 되자 청대의 정리와 주석(注釋)은 명대에 비해 더욱 체계적일 수 있었으니 많은 판본 가운데 진희진(陳熙晋)의 《낙임해집전주(駱臨海集箋注)》가 가장 우수한 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책은 함풍(咸豊) 13년에 완성되어 같은 해에 송림종사(松林宗祠)에서 간행되었다. 첫머리에 범례(凡例), 원서(原序) 및 구서(舊序), 양당서본전(兩唐書本傳) 및 후인이 보충한 전기(傳記), 비지(碑誌), 권말(卷末) 부록에는 역대 평론이 수록되어 있다. 1985년에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에서 수정(修訂)하여 출판한 낙빈왕집 전주본이 현재 가장 통행되고 있다.
4. 내용
초당 중기 문인인 낙빈왕의 시문을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권1은 송(頌), 부(賦), 오언고시(五言古詩), 오언율시(五言律詩), 권2는 오언배율(五言排律), 행(行),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고풍(七言古風), 권3은 표(表), 대책문(對策文), 계(啓), 서(序), 권4는 서(序), 잡저(雜著)로 구성되어 있다.
5. 가치와 영향
낙빈왕은 초당사걸 가운데 왕발과 더불어 중국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문학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당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성토하는 시문을 지었고 반란에 직접 가담하여 정치적인 대항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역시 초당의 궁정풍에서 벗어나 아주 서정적이고 개성이 강하다, 그는 다른 사걸과 마찬가지로 근체시 형식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아울러 장편 고체시 형식 확립에도 노조린과 보조를 함께 하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제경편(帝京篇)〉은 아주 뛰어난 내용과 형식을 갖춘 작품으로 노조린의 〈장안고의(長安古意)〉와 비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은 이후 성당(盛唐)에 계승되어 성당 고체시 형식과 내용을 확립하는데 커다한 영향을 주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이 곳은 연태자 단과 이별하던 곳, 형가의 머리털이 관을 뚫고 나올 정도였네. 예전에 사람들은 지금은 가고 없지만, 지금도 역수의 물은 여전히 차게 흐르고 있네.[此地別燕丹, 壯士髮冲冠. 昔時人已沒, 今日水猶寒.]” 〈어역수송별(於易水送別)〉
• “가을날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니, 감옥속의 나로 하여금 더욱 수심에 잠기게 한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검은 빛 날개를 가진 매미가 흰 머리의 나를 향하여 우는 것이다. 이슬이 무거우니 날아오르기 어렵고, 바람이 심하니 우는 소리도 가라앉기 쉽다. 나의 고결함을 믿어주는 이가 없으니, 누구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하리요[西陸蟬聲唱, 南冠客思侵. 那堪玄鬢影, 來對白頭吟. 露重飛難進, 風多響易沈. 無人信高潔, 誰爲表予心.]” 〈재옥영선(在獄詠蟬)〉
• “예로부터 부귀영화는 뜬구름처럼 덧없는 것, 인생의 기복은 진실로 분간하기 어렵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백년의 인생 모두 죽음이 기다리기 마련이고, 갑자기 만물은 변화하여 모두 소멸하게 된다. 계지의 향기도 이미 사라졌고, 백량대의 연회도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당시 하루 아침에 번화함을 떨치었고, 천년동안 길이 교만하고 사치하리라 장담했네. 갑자기 바람을 쳐서 날개 생겨났으나, 잠깐 사이에 파도에 휩쓸려 진흙땅에 떨어졌네. 봄은 오고 가지만 괴로움은 스스로 치달으니, 명리를 다투는 것을 헛되이 그대가 하고 있구료. 오래 낭서를 머물러도 뜻을 얻기 어렵고, 부질없이 재상의 문밖을 쓸어도 누가 알아주랴. 누가 장사의 가의를 애석해 하는가? 홀로 낙양의 재능을 자부하고 있는데.[古來榮利若浮雲, 人生倚伏信難分. 相顧百齡皆有待, 居然萬化咸應改. 桂枝芳氣已銷亡, 柏梁高宴今何在. 當時一旦擅繁華, 自言千載長驕奢. 焂忽搏風生羽翼, 須臾失浪委泥沙. 春去春來苦自馳, 爭名爭利徒爾爲. 久留郞暑終難遇, 空掃相門誰見知. 誰惜長太傅, 獨負洛陽才.]” 〈제경편(帝京篇)〉
(2) 색인어
《낙승집(駱丞集)》, 측천무후(則天武后), 초당사걸, 〈제경편〉, 노조린, 〈재옥영선〉, 영은사(靈隱寺), 서경업
(3) 참고문헌
• 《駱臨海集箋注》(陳熙晋, 世界書局印行)
• 《初唐四傑詩選》(倪木興, 人民文學出版社)
• 《駱賓王評傳》(楊柳,駱祥髮, 北京出版社)
• 《初唐四傑詩選》(倪木興, 人民文學出版社)
• 《初唐四傑詩選》(任國緖, 陝西人民出版社)
• 《初唐四傑硏究》(駱祥髮, 東方出版社)
• 《初唐四傑年譜》(張志烈, 巴蜀書社)
• 《唐詩史硏究》(安炳國, 에피스테메)
• 《舊唐書》(景仁文化社編)
• 《新唐書》(景仁文化社編)
• 《全唐詩》(北京 中華書局)
• 《中國詩律學》(송용준 옮김, 소명출판)
• 《唐詩硏究》(沈松勤, 胡可先, 陶然著 折江大學出版社)
• 《唐詩槪論》(安炳國編著, 靑年社)
• 《唐詩通論》(劉開揚, 臺北,木鐸出版社)
【안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