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노승지집(盧昇之集)》은 당(唐)나라 노조린(盧照隣)이 초당(初唐) 고종(高宗) 시기에 재야문인으로 활동하면서 지었던 시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유우자집(幽憂子集)》, 《노조린집(盧照隣集)》이라고도 부른다.2. 저자
(1) 성명 : 노조린(盧照隣)(634-685?)3. 서지사항
노조린(盧照隣)의 저술에 대해 최초로 기록하고 있는 《조야검재(朝野儉載)》를 보면 “《유우자(幽憂子)》를 지어 분함을 풀려고 하였고, 문집은 20권이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구당서》에는 “문집 20권”, 같은 책 권47의 《경적지(經籍志)》에도 역시 “노조린집 20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당서》 권60에는 역시 20권이라고 기록하면서 따로 《유우자》 3권이 있다고 하였다. 송대(宋代)의 《숭문총목(崇文總目)》 권5에는 “《노조린집》 10권, 《유우자》 3권이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명대(明代) 이후 판본 가운데 2권본 시부합집(詩賦合集)은 송각(宋刻)에 기인한 것으로 정병(丁丙)이 《선본서실장서지(善本書室藏書志)》 권24에서 “《노승지집(盧升之集)》 7권은 구초본(舊抄本)으로 당(唐) 노조린이 편찬하였다.”라고 하였다. 청대(淸代)에 《노승지집(盧升之集)》 7권이 수록된 《사고전서(四庫全書)》도 역시 장섭의 판본에 따른 것이다. 《노조린집》은 청대 이전에는 주석본이 없다가 당대 학자들이 힘을 쏟아서 3인의 통행본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하나는 임국서(任國緖)가 지은 《노조린집편년전주(盧照隣集編年箋注)》로서 흑룡강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에서 1989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은 최초의 전주본(箋注本)으로 모두(冒頭)에 부선종(傅璇琮)의 서문(序文)과 작자의 전언(前言)이 있으며 《사부총간》에서 영인한 명 장섭본을 저본으로 하였고 원본(原本) 순서와 체례에 따라 편년(編年) 전주(箋注)를 진행하였다. 이 책은 모든 작품 아래 해제, 편년, 본사고증(本事考證), 행적고증(行蹟考證)으로 나누면서 인명(人名), 지명(地名), 관직(官職), 전고(典故)를 위주로 주석하였다. 책의 뒤에는 〈노조린시문계년급생평행적(盧照隣詩文系年及生平行蹟)〉이라는 논문이 첨부되어 있다. 둘째는 축상서(祝尙書)가 전주(箋注)한 《노조린집》 7권으로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에서 1994년에 출판하였다. 전언, 목록, 본문을 제외하고 〈전기자료(傳記資料)〉, 〈저록제발(著錄題跋)〉, 〈제가평론(諸家評論)〉, 〈노조린연보(盧照隣年譜)〉의 부록이 뒤에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은 《사부총간》에 수록된 명 장섭 7권본을 저본으로 하였고 전주(箋注) 방면에 있어서는 시문 제작 연도의 고증, 용전(用典)의 탐구 등에 힘을 쏟았다. 셋째는 이운일(李雲逸)이 편찬한 《노조린집교주(盧照隣集校注)》 7권으로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1998년에 출판하였다. 이상 3종의 주석본(注釋本)을 제외하고서 서명하(徐明霞)가 표점을 붙인 《노조린집》도 주목할만 하다. 이 책은 1980년에 중화서국에서 출판하였고 당대 최초이자 가장 정심(精審)한 정리본(整理本)이라고 칭할만 하다. 이 책은 《양형집》과 합간하였으며 《사부총간》에서 영인한 《유우자집》 7권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책의 뒤에는 본집에 수록되지 않은 유문(遺文)과 일시(佚詩)를 수록하였고, 아울러 부선종이 지은 〈노조린양형간보(盧照隣楊炯簡譜)〉가 첨부되어 있다.4. 내용
초당 중기 문인인 노조린의 시문을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권1은 부(賦), 오언고시(五言古詩), 권2는 칠언고시(七言古詩), 오언율시(五言律詩), 권3은 오언배율(五言排律), 칠언절구(七言絶句), 중화악구장(中和樂九章), 권4는 소(騷), 권5는 소, 석질문(釋疾文), 권6은 서(序), 대문(對問), 권7은 서(書), 찬(讚), 비(碑), 보유(補遺),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5. 가치와 영향
노조린은 초당 중기에 활동했던 문인으로 역시 초당사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다른 사걸과 마찬가지로 조숙한 나이에 문재(文才)를 드러내어 문단의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관직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중년 이후 불치의 병에 걸려 대부분의 시간을 병마와 싸우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결국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물에 빠져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다른 사걸과 문학적인 성취와 문학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는 재주는 뛰어났으나 계급의 한계로 인하여 많은 좌절을 겪은 관계로 궁정풍의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시와 문장의 내용과 서정을 강조하였다. 그는 근체시 형식 확립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특히 장편 가행시 창작에 아주 능숙하여 〈장안고의(長安古意)〉와 같은 수많은 명편을 제작하였다. 그의 이러한 문학 성취는 이후 초당 말엽을 거쳐 성당에 이르러 왕유나 두보의 고체시 문학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6. 참고사항
(1) 명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