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예기정의(禮記正義)》는 유가(儒家) 13경(經) 가운데 하나인 《예기(禮記)》에 한(漢)나라 말엽의 경학가(經學家)인 정현(鄭玄)이 주(注)를 달고 당(唐)나라 태종(太宗) 시기 국자박사(國子博士)와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낸 공영달(孔潁達)이 소(疏)를 낸 책이다. 《예기》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기에 공자(孔子)의 제자(弟子) 및 후학(後學)들이 선진(先秦) 시기 각종 예제(禮制)와 예의(禮義) 해석에 대해 기록한 글들을, 한(漢)나라 선제(宣帝) 시기 예학가(禮學家)인 대성(戴聖)이 49편으로 정리한 책이다. 《소대기(小戴記)》, 《소대예기(小戴禮記)》라고도 칭한다.
2. 저자
(1) 성명:정현(鄭玄)(127~200), 공영달(孔潁達)(574~648)
(2) 자(字)·별호(別號):정현의 자는 강성(康成), 별호로 정사농(鄭司農), 후정(後鄭)이라 칭한다. 공영달의 자는 중달(仲達), 시호(諡號)는 헌(憲)이다.
(3) 출생지역:정현은 북해군(北海郡) 고밀현(高密县)(현 중국 산동성(山東省)), 공영달은 기주(冀州) 형수(衡水)(현 중국 하북성(河北省))
(4) 주요활동과 생애
정현은 소년시절부터 유가(儒家)의 오경(五經)과 역수(曆數), 산술(算術), 도참(圖緯) 등 학문에 정진하였다. 북해상(北海相) 두밀(杜密)의 추천으로 태학(太學)에서 수업할 기회를 얻어 금문경학(今文經學) 박사(博士)인 제오원선(第五元先)에게 수업을 받았고, 고문(古文) 경학가인 장공조(張恭祖)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각지의 통인대유(通人大儒)를 찾아 유학(游學)하고, 최후에는 고문경학대사인 마융(馬融)에게 7년을 수학함으로써 한대(漢代) 금고문 경학을 집대성하는 경학대사(經學大師)가 되었다. 평생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강학에 힘썼던 그는, 후한 영제(靈帝) 건영(建寧) 원년(168)부터 환관들이 우국지사와 학생들을 옥에 가두고 출사를 막은 당고(黨錮)의 화(禍)에 연루되자 14년간 두문불출하며 《주례(周禮)》, 《예기(禮記)》, 《의례(儀禮)》의 삼례(三禮)에 주(注)를 달고, 금문학을 묵수하는 하휴(何休)의 오류에 대한 저술을 지어 ‘경신(經神)’으로 칭송되었다. 영제 중평(中平) 원년(184) 당고가 해제된 뒤에도 출사하지 않고 군경(群經)에 주를 달고 백만여언(百萬餘言)에 이르는 저술을 하였는데, 금문과 고문을 겸용(兼用)하고 간요(簡要)한 그의 주석 방법은 학자들의 추숭을 받았으며 특히 그의 예학(禮學)은 정학(鄭學)으로 일컬어졌다. 후한 헌제(獻帝)가 대사농(大司農)의 관직으로 불렀으나 직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포의(布衣)로 마쳤는데, 후세에 그를 정사농(鄭司農)으로 존칭하였다. 당(唐)나라 정관(貞觀) 21년(647) 22인의 선사(先師)에 들어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되었다.
공영달은 수(隋)나라 대업(大業) 초에 하내군(河内郡) 박사(博士)에 제수되고, 당(唐)나라 건립 후에 진왕부(秦王府)의 학사(學士)가 되었다. 정관(貞觀) 연간에 국자박사(國子博士),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 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역임하면서 위징(魏徵)과 함께 《수서(隋書)》를 편찬하였고, 안사고(顏師古) 등과 함께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여 오경의 해석과 주석의 통일을 기하였다. 정관 22년(648)에 병사(病死)한 뒤 그의 유체(遺體)는 태종의 묘인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고 헌(憲)의 시호를 받았다.
(5) 주요저작
정현의 저작은 《주례주(周禮注)》, 《예기주(禮記注)》, 《의례주(儀禮注)》, 《모시전전(毛詩傳箋)》이 십삼경주소본에 편입되어 있으며, 《삼례목록(三禮目錄)》, 《육예론(六藝論)》, 《노례체협의(魯禮禘祫義)》, 《춘추좌씨고맹잠(春秋左氏膏盲箴)》, 《춘추공양묵수발(春秋公洋墨守發)》, 《춘추공양폐질석(春秋公洋廢疾釋)》 등과 《역위주(易緯注)》등의 위서주(緯書注)가 집일본(輯佚本)에 전해지고 있다.
공영달의 저작은 《五經正義》 180권이 전한다.
3. 서지사항
한초에 전해진 예에 관한 각종의 고문(古文) 《기(記)》와 관련 문헌들을 대덕(大德)이 85편으로 정리한 책이 《대대예기(大戴禮記)》이고, 그의 조카인 대성(戴聖)이 49편으로 정리한 책이 오늘날 《예기》로 불리는 《소대예기(小戴禮記)》이다. 대덕의 책은 대부분 망일(亡佚)되어 37편만 남아 있으나, 《소대예기》는 한말의 정현이 주를 달면서 《의례(儀禮)》, 《주례(周禮)》와 함께 삼례(三禮)의 하나로서 온전히 전해진다. 《예기》의 편성자(編成者)인 대성은 전한의 《예》(《의례》) 박사(博士)로서 고당생(高堂生), 소분(蕭奮), 후창(后蒼)으로 이어지는 한대 금문(今文) 예학의 전수자이고, 《예기》의 주석과 정본(定本) 작업을 한 후한의 노식(盧植), 정현 등은 고문에 정통한 예학자이다. 《예기》의 저본은 기본적으로 춘추전국시기 고문 자료이나, 금고문 자료가 혼재하며 한대 학자들의 가필(加筆)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현의 《예기주》 20권은 경문에 대한 엄밀한 교감(校勘)과 함께 당시 《예기》의 이문(異文)들을 보존하였고, 공영달의 《예기정의》 70권은 남조(南朝) 황간(皇侃)의 《예기의소(禮記義疏)》를 중심으로 북조(北朝) 웅안생(熊安生)의 《예기의소》 등을 참고하여 정현 주와 경문을 해석한 것으로 한위(漢魏) 이래 남북조 경학가의 견해들을 융합하였다.
청(淸)나라 가경(嘉慶) 20년(1815)에 완원(阮元)이 간행한 십삼경주소본(十三經注疏本) 《예기정의》 63권은 《예기》 경문(經文)에 정현의 《예기주》와 공영달의 《예기정의》, 그리고 당(唐)나라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經典釋文)》을 합간(合刊)한 것이다. 흠정사고전서총목제요(欽定四庫全書總目提要), 공영달의 〈예기정의서(禮記正義序)〉, 완원의 〈예기주소교감기서(禮記注疏校勘記序)〉가 있고, 곡례 상(曲禮上) 3권(권1~권3), 곡례 하(曲禮下) 2권(권4~권5), 단궁 상(檀弓上) 3권(권6~권8), 단궁 하(檀弓下) 2권(권9~권10), 왕제(王制) 4권(권11~권13), 월령(月令) 4권(권14~권17), 증자문(曾子問) 2권(권18~권19), 문왕세자(文王世子) 1권(권20), 예운(禮運) 2권(권21~권22), 예기(禮器) 2권(권23~권24), 교특생(郊特牲) 2권(권25~권26), 내칙(內則) 3권(권27~권28), 옥조(玉藻) 2권(권29~권30), 명당위(明堂位) 1권(권31), 상복소기(喪服小記) 2권(권32~권33), 대전(大傳) 1권(권34), 소의(少儀) 1권(권36), 학기(學記) 1권(권36), 악기(樂記) 3권(권37~권39), 잡기 상(雜記上) 2권(권40~권41), 잡기 하(雜記下) 2권(권42~권43), 상대기(喪大記) 2권(권44~권45), 제법(祭法) 1권(권46), 제의(祭義) 2권(권47~권48), 제통(祭統) 1권(권49), 경해(經解), 애공문(哀公問), 중니연거(仲尼燕居) 1권(권50), 공자한거(孔子閒居), 방기(坊記) 1권(권51), 중용(中庸) 2권(권52~권53), 표기(表記) 1권(권54), 치의(緇衣) 1권(권55), 분상(奔喪), 문상(問喪) 1권(권56), 복문(服問), 간전(間傳) 1권(권57), 삼년문(三年問), 심의(深衣), 투호(投壺) 1권(권58), 유행(儒行) 1권(권59), 대학(大學) 1권(권60), 관의(冠義), 혼의(昏義), 향음주의(鄕飮酒義) 1권(권61), 사의(射義), 연의(燕義) 1권(권62), 빙의(聘義), 상복사제(喪服四制) 1권(권63)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권마다 교감기(校勘記)가 부기(附記)되었다.
주석본(註釋本)으로서 송대(宋代) 주신(朱申)의 《예기구해(禮記句解)》 10권과 위료옹(魏了翁)의 《예기요의(禮記要義)》 33권, 위식(衛湜)의 《예기집설(禮記集說)》 160권, 원대(元代) 오징(吳澄)의 《예기찬언(禮記纂言)》 30권, 진호(陳澔)의 《예기집설(禮記集說)》 16권, 명대(明代) 영락(永樂) 12년 호광(胡廣) 등이 황명(皇命)으로 수찬(修撰)한 《예기대전(禮記大全)》 30권, 청대(淸代) 왕부지(王夫之)의 《예기장구(禮記章句)》 49권, 만사대(萬斯大)의 《예기우전(禮記偶箋)》 3권, 이광파(李光坡)의 《예기술주(禮記述注)》 28권, 건륭(乾隆) 13년(1748)에 칙찬(勅撰)한 《예기의소(禮記義疏)》 82권, 방포(方苞)의 《예기석의(禮記析疑)》 46권, 손희단(孫希旦)의 《예기집해(禮記集解)》 61권, 주빈(朱彬)의 《예기훈찬(禮記訓纂)》 49권, 학의행(郝懿行)의 《예기전(禮記箋)》 49권 등이 있다.
4. 내용
주(周) 왕조를 중심으로 진한(秦漢) 이전의 전장(典章), 명물제도(名物制度), 천자(天子) 이하 각급 귀족들의 예의(禮儀)와 그에 대한 유가학파(儒家學派)의 철학, 사상 등을 기술하였다. 곡례, 단궁, 옥조, 상복소기, 대전, 소의, 잡기, 상대기, 분상, 투호 등은 다른 책에 갖춰지지 못한 예절(禮節) 조문(條文)들을 기록한 것이다. 증자문, 예운, 예기, 교특생, 내칙, 학기, 악기, 제법, 제의, 제통, 경해, 애공문, 중니연거, 공자한거, 방기, 중용, 표기, 치의, 문상, 복문, 간전, 삼년문, 유행, 대학, 상복사제 등은 주례(周禮)의 의의(意義)를 밝힌 것이다. 관의, 혼의, 향음주의, 사의, 연의, 빙의 등은 예경(禮經)인 《의례(儀禮)》에 대해 해석한 기문(記文)이다. 왕제, 월령, 문왕세자, 월령 등은 제도와 정령(政令)에 대한 전문적인 기록이다.
5. 가치와 영향
공자(孔子)에서 맹자(孟子)에 이르는 선진(先秦) 유학의 학술 전승관계를 알 수 있는 진귀한 자료이자 고대 사회의 예의(禮儀) 습속과 생활양식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문헌이다. 특히 유가(儒家)의 수신양성(修身養性)과 인생철학 등이 집약되어 있어, 근세 동아시아 신유학(新儒學)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예학(禮學)과 조선 성리학(性理學)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경전으로,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최석정(崔錫鼎)의 《예기유편(禮記類編)》, 김재로(金在魯)의 《예기보주(禮記補註)》, 심대윤(沈大允)의 《예기정해(禮記正解)》 등 관련된 탁월한 연구 성과들이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예는 친소를 정하고, 혐의를 해결하고, 동이를 구분하고, 시비를 밝히는 것이다.[夫禮者 所以定親疏 決嫌疑 別同異 明是非也]” 〈곡례 상(曲禮上)〉
• “마음속으로 절도가 없는 사람은 사물을 보아도 그 득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사물을 살피고자 하는데 예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옳고 그름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을 하는데 예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공경하는 마음을 견지하지 못한다. 말을 하는데 예에 토대를 두지 않으면, 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는 사물의 극치이다.’라고 말한다.[無節於內者 觀物弗之察矣 欲察物而不由禮 弗之得矣 故作事不以禮 弗之敬矣 出言不以禮 弗之信矣 故曰禮也者 物之致也]” 〈예기(禮器)〉
• “활을 쏘는 것은 인의 도이다. 활을 쏘는 것은 자신에서 바름을 찾는다. 자신이 바르게 된 뒤에 쏘며,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 자신에게서 찾을 뿐이다.”[射者 仁之道也 射求正諸己 己正而后發 發而不中則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矣] 〈사의(射義)〉
(2) 색인어:예기(禮記), 소대예기(小戴禮記), 대성(戴聖), 정현(鄭玄), 공영달(孔潁達), 예기정의(禮記正義), 오경정의(五經正義), 곡례(曲禮), 대학(大學), 중용(中庸).
(3) 참고문헌
• 史記(司馬遷, 中華書局, 1996)
• 漢書(班固, 中華書局, 1995)
• 舊唐書(劉昫, 中華書局, 1989)
• 〈조선예학의 흐름과 《예기》연구〉(전성건, 《한국문화》 73, 2016)
• 禮記正義(十三經注疏整理本, 北京大學出版社, 2000)
• 三禮硏究論著提要(王鍔, 甘肅教育出版社, 2001)
• 禮記成書考(王鍔, 中華書局, 2007)
• 禮記譯注(楊天宇, 上海古籍出版社, 1997)
• 宗周社會與禮樂文明(楊向奎, 人民出版社, 1992)
【박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