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이름난 문인 8명, 즉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왕안석(王安石)·증공(曾鞏)의 산문 총 1,375편을 정선(精選)하고 작품마다 짤막한 평(評)을 붙인 것으로, 명(明)나라 문인 모곤(茅坤)이 1579년(萬曆 7)에 편찬한 책이다. 총 16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송팔대가’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도 바로 이 책이다. 청나라 때 편찬된 《고문사류찬》 등도 이 책을 바탕으로 편집의 기준을 삼는 등, 당송고문 학습의 전범서로서 널리 읽혔다. 우리나라에서도 세 차례나 간행될 만큼 그 영향력이 컸다.2. 편자
(1)성명:모곤(茅坤)(1512~1601)3. 서지사항
‘당송팔대가’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뛰어난 문장가 8명이라는 말이며, 한유·유종원·구양수·소순·소식·소철·왕안석·증공이 바로 그들이다. 또 ‘문초(文抄)’는 뛰어난 문장을 선별하였다는 말이다. 당송 문장가 8인의 문장 선집으로는 모곤의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에 앞서 명나라 초기 학자인 주우(朱右)의 《팔선생문집(八先生文集)》과 당순지(唐順之)의 《문편(文編)》이 있었는데, 《당송팔대가문초》는 이 책들을 수용하고 확장하여 성립되었다. 당시 명나라는 이몽양(李夢陽)·하경명(何景明)과 왕세정(王世貞)·이반룡(李攀龍)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전후칠자(前後七子)의 의고적(擬古的)·복고적(復古的) 문학이 성행하였다. 그들은 ‘문필진한(文必秦漢)’ 즉 산문은 반드시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의 글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문풍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당송(唐宋)의 고문(古文)을 문장의 전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유파인 당송파(唐宋派)도 성립되었다. 당송파의 대표적 문인으로는 모곤을 비롯하여 당순지, 왕신중(王愼中) 등을 들 수 있다. 당송파의 일원이었던 모곤은 전후칠자의 의고적 문풍에 대항하여 당송고문(唐宋古文)의 전범을 보여주기 위해 《당송팔대가문초》를 편찬하였다.4. 내용
권1~권16까지는 〈창려문초(昌黎文抄)〉로 한유의 산문 총 191편이다. 권17~권28까지는 〈유주문초(柳州文抄)〉로 유종원의 산문 130편이다. 권29~권60까지는 〈여릉문초(廬陵文抄)〉로 구양수의 산문 279편이다. 권61~권80까지는 〈여릉사초(廬陵史抄)〉가 덧붙여져 있다. 권81~권96까지는 〈임천문초(臨川文抄)〉로 왕안석의 산문 211편이다. 권97~권106까지는 〈남풍문초(南豐文抄)〉로 증공의 산문 87편이다. 권107~권116까지는 〈노천문초(老泉文抄)〉로 소순의 산문 63편이다. 권117~권144까지는 〈동파문초(東坡文抄)〉로 소식의 산문 249편이다. 권145~권164까지는 〈영빈문초(潁濱文抄)〉로 소철의 산문 165편이다.5. 가치와 영향
이 책은 명나라 전후칠자의 의고적 문풍에 대항하여 당송고문의 전범을 보여주기 위해 편찬되었다는 점과 당시 문학 이론의 쟁점과 그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는 모두 3종이 있을 만큼 그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편찬한 《팔대가문십선(八代家文十選)》이 있고, 또 정조(正祖) 때 간행된 《당송팔자백선(唐宋八子百選)》은 《당송팔대가문초》 가운데 다시 100편을 정선한 것으로 1781년에 간행해 널리 보급하였다. 그런데 정조는 과거 시험 문제인 책문(策文)에서 “《당송팔대가문초》는 모곤이 후세의 작가들에게 문장의 표본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같은 뛰어난 문장을 배제하고 오직 당송의 문장만 취한 것은 무슨 근거인가?”라고 질문한 일이 있다. 이는 《당송팔대가문초》의 공적을 인정하면서도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수용하였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한문대계(漢文大系)》를 간행하며 수록한 청(淸)나라 심덕잠(沈德潛)의 《당송팔가문독본(唐宋八家文讀本)》도 《당송팔대가문초》를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6. 참고사항
(1)명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