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매촌집(梅村集)》은 명말청초(明末淸初)에 활동했던 오위업(吳偉業)(1609~1672)의 시문집이다. 오위업은 당시 전겸익(錢謙益)(1582~1664), 공정자(龔鼎孶)(1615~1673)와 함께 ‘강좌삼대가(江左三大家)’로 병칭되었다. 그는 명말청초 시인으로 누동시파(婁東詩派)의 창시자이며, 시에서 그의 호를 본뜬 매촌체(梅村體)를 탄생시켰다.
2. 저자
(1) 성명:오위업(吳偉業)(1609~1672)
(2) 자(字)·별호(別號):자는 준공(駿公), 호는 매촌(梅村), 관운주인(灌隱主人), 대운도인(大雲道人)
(3) 출생지역:강소성(江蘇省) 태창(太倉)(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태창시(太倉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오위업은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당시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장부(張溥)의 제자가 되었다. 장부는 1624년(천계(天啓) 4년)에 복사(復社)를 결성하였는데 오위업도 스승을 따라 이 사단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오위업은 1631년(숭정(崇禎) 4년) 23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편수관(翰林院編修官)을 제수 받았고, 이후 동궁시독관(東宮試讀官), 남경국자감사업(南京國子監司業) 등을 역임하였다. 1640년(숭정 13년)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온 뒤, 1644년(숭정 17년)에는 이자성(李自成)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어 숭정제(崇禎帝)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순절하려 했으나 집안의 만류로 그만두었는데 이때가 그의 나의 36세였다. 남명(南明) 정권이 수립된 뒤 복왕(福王)의 부름을 받고 잠시 소첨사(小詹事)가 되었으나 마사영(馬士英), 완대성(阮大鋮)에 의해 배척을 당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1653년(순치(順治) 10년) 청조의 부름을 받고 귀순하여 밀서원시강(密書院侍講)을 제수 받고, 후에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결국 1656년(순치 13년) 두 왕조를 섬긴 변절한 문인이라는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직해 고향으로 돌아와 남은 생을 보냈다.
(5) 주요저작
저서로 《매촌집(梅村集)》 40권과 《매촌가장고(梅村家藏稿)》 64권, 《수구기략(綏寇紀略)》, 《태창십자시선(太倉十子詩選)》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매촌집은 명말 청초의 문장가 오위업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청대(淸代) 허욱(許旭) 등이 엮었으며 문집에 1660년(순치(順治) 17년)에 쓴 전겸익(錢謙益)의 서문(序文)이 들어있다. 간행지(刊行地)와 간행자(刊行者)는 미상(未詳)이다. 판본은 목판본(木版本)으로 40권(卷) 16책(冊)으로 되어 있으며, 책 크기는 25.2×15.8cm이다. 인장(印章)은 홍문관(弘文館)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이 찍혀있으며, 사고전서 집부(集部) 별집류(別集類)로 구분된다.
4. 내용
이 책의 체제는 다음과 같다. 권1에서 권20까지는 시집(詩集)이고‚ 권21에서 권40까지는 문집(文集)이다. 시집 첫머리에 전겸익(錢謙益)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저자의 시론과 시풍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와 찬사를 담고 있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각각 차례대로 오언고시(五言古詩)(61수)와 칠언고시(七言古詩)(93수)‚ 오언율시(五言律詩)(280수)‚ 칠언율시(七言律詩)(340수)‚ 오언배율(五言排律)(9수)‚ 오언절구(五言絶句)(30수)‚ 육언절구(六言絶句)(12수)‚ 칠언절구(七言絶句)(203수)‚ 시여(詩餘)의 소령(小令)(47수)‚ 중조(中調)(10수)‚ 장조(長調)(35수)이다. 문집 첫머리에는 문인 노굉(盧紘)과 문집 편찬을 후원한 진호(陳瑚)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주로 오위업에 대한 흠모와 문집의 기획‚ 출판 경위에 대한 상세한 경위를 밝혀놓았다. 서문 다음으로는 서(序)(12편)와 서(書)(28편)‚ 수서(壽序)(22편)‚ 기(記)(11편)‚ 신도비명(神道碑銘)(6편)‚ 묘지명(墓誌銘)(26편)‚ 묘표(墓表)(4편)‚ 탑명(塔銘)(3편)‚ 전(傳)(7편)‚ 제문(祭文)(1편)‚ 서(書)(4편)‚ 명(銘)(1편)‚ 찬(贊)(1편)‚ 잡문(雜文)(7편)이 실려 있다.
5. 가치와 영향
오위업은 시와 문에 모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시(詩)와 사(詞)에 뛰어났고 시 가운데서는 칠언율시(七言律詩)와 칠언가행(七言歌行)이 더욱 유명하다. 오위업의 시는 ‘시사(詩史)’라고 평가를 받았는데 그가 시와 역사는 통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차박재시고서(且樸齋詩稿序)〉에서 “옛날에 시와 역사는 통했기 때문이 천자가 시를 채록했다.[古者詩與史通 故天子采詩]”라고 하였다. 즉 오위업은 시와 역사는 통하므로 시를 통해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천자도 사관에게 상류층의 시뿐 아니라 촌부나 기녀 같은 하층민의 시도 채록해 바치게 했고, 이를 통해 시대의 풍속과 민심을 흐름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오위업은 당시에 누구나 알고 있던 이야기를 소재로 고사 속에 망국의 비애를 담아내었는데, 이런 작품들 가운데 〈원원곡(圓圓曲)〉 〈초양생행(楚兩生行)〉 등은 당시 문인들 사이에 널리 애독되었다. 주로 장편의 칠언가행으로 서사하였는데, 이런 시는 오위업의 호를 따 ‘매촌체(梅村體)’라고 불렸다.
오위업은 왕조의 교체를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당시의 사건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이는 시와 역사는 통한다고 보았던 그가 시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의식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사회현실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지었는데, 이 역시 시가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의식의 발로라 하겠다. 이는 또한 사회현실을 고발하여 세상을 바로잡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시언지(詩言志)’ 정신의 계승이기도 하다.
오위업은 절망의 시대를 살았지만 유가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되돌아보고, 역사를 통해 인생에 대한 감회를 풀어내었으며, 당시의 역사적 사건과 사회적 부조리도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여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따라서 조익(趙翼)은 《구북시화(甌北詩話)》에서 오위업의 출사(出仕)와 은일(隱逸)의 행적에 대하여 양해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고 그를 청대의 대표 시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일생을 모두 그르치는 것은 한 번의 벼슬살이니, 집을 버리기는 쉬워도 이름 바꾸기는 어렵지. 소나무 대나무가 어찌 바람 서리의 괴롭힘을 꺼리리오! 물고기와 새는 넓은 하늘과 땅만을 생각한다네.[誤盡平生是一官 棄家容易變名難 松筠敢厭風霜苦 魚鳥猶思天地寬]” 〈자탄(自歎)〉
‧ “차마 죽지 못해 이십여 년을 구차히 살았느니, 이제와 명조(明朝)를 배반한 죄 어찌 사라질 수 있으리. 성은을 입은 은혜 반드시 보답해야 하는데, 이 목숨 하찮은 기러기 털만도 못하구나.[忍死偷生廿載餘 而今罪孽怎消除 受恩欠債須填補 縱比鴻毛也不如]” 〈임종시(臨終詩) 기일(其一)〉
‧ “이 세상에 태어나 부족한 것은 오직 한 번의 죽음인데, 속세에서는 선약인 九還丹을 구경할 수도 없다네. 나는 본시 신선된 회남왕 집의 옛 닭이나 개였는데, 신선 따라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떨어져 있네.[浮生所欠只一死 塵世無由拾九還 我本淮王舊鷄犬 不隨仙去落人間]” 〈회음을 지나면서 느낀 감상(과회음유감(過淮陰有感) 기이(其二))〉
(2) 색인어:매촌집(梅村集), 오위업(吳偉業), 매촌가장고(梅村家藏稿), 시문집(詩文集), 원원곡(圓圓曲)
(3) 참고문헌
‧ 梅村集(吳偉業 著, 許旭 等訂, 四庫全書本)
‧ 吳梅村全集(吳偉業 著, 李學潁 集評標校, 上海古籍出版社)
‧ 吳詩集覽(吳偉業 著, 靳榮藩 編, 清乾隆四十年凌雲亭刻本)
‧ 吳梅村詩選(王濤, 三聯書店)
‧ 吳梅村硏究(徐江, 首都師範大學出版社)
‧ 吳梅村詩歌創作探析(裵世俊, 人民出版社)
‧ 吳偉業評傳(葉君遠, 首都師範大學出版社)
‧ 淸代詩壇第一家-吳梅村硏究(葉君遠, 中華書局)
‧ 吳偉業與婁東詩傳(葉君遠, 人民出版社)
【김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