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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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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반적으로 당대(唐代) 그 가운데 성당(盛唐)을 중국 시가의 황금기라고 한다. 맹호연은 바로 이 성당 시기의 자연시(산수전원시)파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일찍이 시백(詩伯)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을 얻었으며, 성당의 자연시파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시인 왕유(王維)와 더불어 왕맹(王孟)이라 불리며 칭송되고 있다. 그의 시 작품을 모아놓은 맹호연집에는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의 고시(古詩), 율시(律詩), 배율(排律), 절구(絶句) 등이 수록되어 있다.

2. 저자

(1) 성명:맹호연(689~740). 본명(本名)은 분명하지 않으며, 일설(一說)에는 호(浩)라고 한다.
(2) 자(字)·호(號):자가 호연이고 호는 녹문거사(鹿門處士). 세상 사람들은 그가 양양(襄陽) 사람이므로 맹양양이라고 불렀으며, 일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한 적이 있으므로 맹산인(孟山人)이라고도 하였다.
(3) 출생지역:양주(襄州) 양양(襄陽)(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양양)
(4) 주요활동과 생애
《구당서(舊唐書)》<맹호연전(孟浩然傳)>, 《신당서(新唐書)》<맹호연전>, 《당재자전(唐才子傳)》<맹호연전> 등이 맹호연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비교적 간략하여 이를 근거로 맹호연의 생애를 상세히 알기는 어렵다.
맹호연은 689년(무측천(武則天) 영창(永昌) 원년(元年))에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고향 양양에서 지냈다. 한 때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기도 하였으며 724-725년(현종(玄宗) 개원(開元) 12-13년)간에는 낙양(洛陽)에 머물며 장구령(張九齡), 기무잠(綦毋潛) 등과 교류하였다. 728년(개원 16년) 장안(長安)으로 가서 이듬해인 729년 진사(進士)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고향 양양으로 돌아온 뒤 오월(吳越)(지금의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 촉(蜀)(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상(湘)(지금의 호남성(湖南省)), 감(贛)(지금의 강서성(江西省)) 일대를 유람하기도 하였다. 737년(개원 25년) 형주장사(荊州長史)로 폄적(貶謫)된 장구령의 부름에 응하여 그의 종사(從事)로 수개월을 지냈다.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맹호연은 740년(개원 28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맹호연은 평생 많은 유명 문인들과 교류하였는데, 저광희(儲光羲), 장구령, 기무잠, 이백(李白), 왕유, 장자용(張子容), 왕창령(王昌齡) 등이 그들이다. 또한 그가 일평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고향 양양의 지방 관리들도 그의 주된 교류 상대들이었다.
(5) 주요저작:없음

3. 서지사항

《맹호연집》은 맹호연이 죽은 지 5년이 되던 천보(天寶) 4년(745)에 왕사원(王士源)이 맹호연의 시 작품 218수를 상중하 3권(卷)으로 묶고 자신의 서문을 달아 처음 편집하였다. 다시 5년 뒤인 천보9년에 위도(韋滔)가 왕사원의 판본을 새로이 정리하고 여기에 중서(重序)를 달아 비부(秘府)(주요 도서와 문서를 보관하던 곳)에 소장하게 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맹호연집》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일찍이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맹호연집》 판본은 송대(宋代)의 촉각본(蜀刻本)으로 북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붕(徐鵬)의 《맹호연집교주(孟浩然集校注)》 〈전언(前言)〉 부주(附注)에 의하면, 이 판본은 상중하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왕사원의 서문과 위도의 중서를 수록하고 있다. 상권에 85수, 중권에 66수, 하권에 64수 등 모두 215수가 실려 있다. 그러나 중권에는 장자용의 시 2수가, 하권에는 왕유의 시 1수가 실려 있으며, 또한 왕형(王逈)과 노상(盧象)의 작품이 분명한 시가 각 1수씩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맹호연의 시는 결국 210수가 되며 이는 왕사원이 서문에서 말한 218수와는 차이가 난다.
이 밖의 주요 판본으로는 모진(毛晉)의 급고각본(汲古閣本)(3권), 동활자본(銅活字本)(3권), 《사부총간(四部叢刊)》본(本)(4권) 등이 있다. 모두 명대(明代)에 나온 것으로 이 가운데 《사부총간》본이 현재 널리 통용되는 판본이다. 권일에 오언고시 63수, 권이에 칠언고시 5수와 오언배율 37수, 권삼에 오언율시 78수, 권사에 오언율시 51수 칠언율시 4수 오언절구 19수 칠언절구 6수 등 모두 263수를 시의 형식에 따라 권을 나누어 편집하였다.
촉각본에서 《사부총간》본에 이르는 동안 후인들에 의하여 발굴된 적지 않은 시가 새로이 편입되었으나, 오늘날까지도 상당수의 작품에 대하여 맹호연 작품의 진위 여부에 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들 작품을 모두 맹호연의 작품으로 가정하면 270수 이상으로 늘어난다.

4. 내용

서붕은 송대 촉각본을 살펴본 결과, 실제로 유목(類目)을 달지는 않았으나 내용상으로는 유람(遊覽), 증답(贈答), 여행(旅行), 송별(送別), 연락(宴樂), 회사(懷思), 전원(田園)의 7류로 나누어 편집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7류로 나눈 것은 주제별 분류와 제재별 분류를 혼용한 것으로 분류의 기준 설정이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맹호연 시의 대체적인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다. 맹호연의 시를 큰 범주에서 분류한다면, 산수전원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 은일의 정취를 읊은 시, 증답시와 송별시 등 벗들과의 교유를 노래한 시, 유람의 정회를 노래한 시 등 네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인들의 시 역시 그러하듯, 산수전원시와 은일시는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으며, 증답시나 송별시 또는 유람을 주제로 한 시의 경우에도 산수나 전원의 풍광을 묘사한 시구가 적지 않으므로 어느 한 부류로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5. 가치와 영향

맹호연과 그의 시에 대한 후인들의 평가는 상반된다.
이백이 “젊은 나이에 벼슬을 멀리하고, 늙도록 초야에 묻혔다네. 달빛에 홀려 늘 술을 마셨고, 꽃에 반해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네.[紅顔棄軒冕 白首臥松雲 醉月頻中聖 迷花不事君]” (《이태백집(李太白集)》 권9 〈贈孟浩然〉)라고 하여, 은사(隱士)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맹호연을 칭송한데 반하여, “높은 궁궐 마음에 늘 있으니, 금마문(金馬門)에서 조서(詔書)를 기다리는 것 잊지 못하네.[魏闕心常在 金門詔不忘]”(〈범주경호해(泛舟經湖海)〉), “늘 산골짜기에 묻힐까 두려운데, 날개 펴고 떨쳐 오를 도리가 없구나. 곤궁(困窮)하고 현달(顯達)함에 명운(命運)이 있다면, 〈궁통론(窮通論)〉에서 그 이치를 찾아보련다.[常恐塡溝壑 無由振羽儀 窮通若有命 欲向論中推]”(〈만춘와질기장팔자용(晩春臥疾寄張八子容)〉) 등의 시구에 드러나 있는 맹호연의 입신(立身) 지향(志向)이나, 나이 40이 되어서도 진사과에 응시하며 출사(出仕)하고자 하였던 그의 행적을 근거로 삼아, 그의 은둔은 어쩔 수 없었던 소극적 선택이었으므로 맹호연을 진정한 은사로 보기 어렵다고 폄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진사도(陳師道)의 〈후산시화(後山詩話)〉에는 “소식(蘇軾)은 맹호연의 시를 일컬어 ‘운치(韻致)는 높으나 재학(才學)이 부족하니, 마치 어주(御酒)를 만들 만한 고수(高手)이나 재료가 없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子瞻謂孟浩然之詩 韵高而才短 如造内法酒手 而无材料爾]”라고 소식의 맹호연 시에 대한 평어를 전하고 있다. “운고이재단(韵高而才短)”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의 앞뒤를 견주어보면 분명해진다. 즉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나나 시의 소재나 제재가 빈약하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견해는 엄우(嚴羽)가 “맹호연의 학력(學力)은 한유(韓愈)에 훨씬 못 미치나 그의 시가 유독 한유보다 나은 것은 신묘한 깨달음뿐이다.[孟襄陽學力下韓退之遠甚 而其詩獨出退之之上者 一味妙悟而已]”(《창랑시화(滄浪詩話)》<시변(詩辨)〉)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밖에도 왕세정(王世貞)은 “그 시구는 5자 밖을 벗어나지 못하며, 그 시편은 40자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그 부족한 바이다.[其句不能出五字外 篇不能出四十字外 此其所短也]”(《예원치언(藝苑卮言)》 권사(卷四))라고 하여, 맹호연의 시 창작이 오언시에 치중되어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비판적 견해가 있으나, 맹호연은 성당 산수전원시의 개조(開祖)이자 그 대표시인이라고 일컬어지며, 평이하고 질박(質朴)한 시어를 운용하여 청담(淸淡)한 시풍으로 성당 시단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명구
‧ “거문고를 타보려 하지만, 애달프게도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이런 생각에 친구가 그리워, 한밤중 꿈에서나 떠올리려 애쓰네.[欲取鳴琴彈 恨無知音賞 感此懷故人 中宵勞夢想]” 〈하일남정회신대(夏日南亭懷辛大)〉
‧ “재주가 없어 영명한 군주에게 버림받고, 병이 많아 친구마저 멀어지네. 허연 머리 늙어감을 재촉하는데, 봄볕은 그믐으로 내달리네.[不才明主棄 多病古人疎 白髮催年老 靑陽逼歲除]” 〈세모귀남산(歲暮歸南山)〉
‧ “푸른 나무 마을 주변을 둘렀고, 푸른 산이 성곽 밖에 드러누웠네. 방문 열고 채마밭을 내다보며, 술잔 들고 뽕과 삼을 이야기한다.[綠樹村邊合 靑山廓外斜 開軒面場圃 把酒話桑麻]” 〈과고인장(過故人莊)〉
‧ “봄잠에 날 새는 줄 몰랐는데, 여기저기 새 우는 소리 들리네. 밤새 비바람 소리가 났으니, 꽃잎은 얼마나 떨어졌을까?[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춘효(春曉)〉
(2) 색인어:맹호연(孟浩然), 시백(詩伯), 산수전원시파(山水田園詩派), 은일(隱逸), 청담(淸談)
(3) 참고문헌
‧ 孟浩然集笺注(游信利, 學生書局)
‧ 孟浩然詩索引(中國學術考究會, 汲古書院)
‧ 孟浩然詩集校注(李景白校注, 巴蜀書社)
‧ 孟浩然集注(趙桂藩注, 旅游敎育出版社)
‧ 孟浩然集校注(徐鵬校注, 人民文學出版社)
‧ 孟浩然詩硏究(이남종, 서울대학교출판부)
‧ 歷代詩話(何文煥, 藝文引書館)
‧ 歷代詩話續編(丁福保, 中華書局)

【최웅혁】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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