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명나라 3대 황제로 즉위한 성조(成祖) 주체(朱棣)가 영락(永樂) 12년(1414) 11월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호광(胡廣) 등에게 조서를 내려 편찬한 유가경전(儒家經典) 주석의 집대성(集大成)이다. 《주역대전(周易大全)》 24권, 《서전대전(書傳大全)》 10권, 《시경대전(詩經大全)》 20권, 《예기대전(禮記大全)》 30권, 《춘추대전(春秋大全)》 70권 등 모두 15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사상적 통일을 목적으로 과거시험의 표준 주해서로 쓰였으므로 당시에는 지극히 중시되었으며, 조선의 유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지만 졸속 작업으로 인한 폐해도 적지 않았다.
2. 저자
(1) 성명:대표 편찬자 호광(胡廣)(1370-1418)
(2) 자(字)·호(號):자(字)는 광대(光大), 호(號)는 황암(晃庵).
(3) 출생 지역:강서(江西)의 길수(吉水)(現 산동성(山東省) 길안시(吉安市))
(4) 주요 활동과 생애:호광(胡廣)은 명나라의 문학가이자 학자로 남송(南宋)의 명신(名臣)인 호전(胡銓)의 후예이며 벼슬은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에 이르렀다. 건문(建文) 2년(1400)에 장원(狀元)을 하였으며, 영락(永樂) 12년(1414)에 《오경대전(五經大全)》 찬수의 명을 받아 《시경대전》과 《춘추대전》, 《주역대전》의 편찬을 주도하였으며, 아울러 양영(楊榮) 등과 《사서대전(四書大全)》의 교주(校注)에도 참여하였다. 서예에도 빼어나 중요한 비(碑)를 세울 때 영락제는 모두 호광이 쓰게 하였다. 영락16년(1418)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예부상서(禮部尚書)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인데 명대에 문신이 시호를 얻은 것은 호광이 처음이었다. 인종(仁宗)이 즉위한 뒤 다시 태자소사(太子少師)로 추증되었다.
그의 시대에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죽고 장손인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연왕(燕王)인 주체(朱棣)가 남경으로 쳐들어와 장조카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는 정난지역(靖難之役)이 발생하였다. 그로 인한 대살육의 참변을 거친 뒤, 새로운 황제의 신임을 얻어 영예로운 벼슬길을 오르는 삶을 살았던 셈인데, 그의 사람됨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체(朱棣)가 쳐들어오자 왕간(王艮)·호광(胡廣)·해진(解縉)·오부(吳溥) 등 건문제 신하 네 사람이 모였는데, 호광과 해진은 비분강개하며 순국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왕간은 울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오부는 호광과 해진은 말로만 저럴 뿐 진정한 충신은 왕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비분강개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호광이 가족에게 밖이 시끄러우니 돼지들 잘 보라고 소리 질렀다. 오부가 웃으며 “돼지 한 마리도 아까와 하는데 목숨을 버리겠는가?”라고 하고는 집에 와서 아들에게 “앞으로 순국할 사람은 왕간 아저씨야!”라고 하였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왕간은 자살하고 호광과 해진은 주체(朱棣)에게 영합하여 그의 편에 붙었다. 《명사(明史) 권40 열전(列傳)》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5) 주요 저작:호광의 저작으로는 《호문목공잡저(胡文穆公雜著)》와 《호문목집(胡文穆集)》 등이 전하며, 위에 언급한 대로 《오경대전》과 《사서대전》 편찬을 주도한 것이 가장 중요한 학술 활동이다.
3. 서지사항:
영락(永樂) 13년 3월부터 조서가 떨어지자 바로 인원수를 늘리고 박차를 가하였지만, 전반적으로 마치 시급한 공정에 맞추는 공사처럼 졸속으로 완성되었다.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영락 13년(1415) 9월에 《대전》이 모두 완성되어 영락제에게 바쳐졌으니 겨우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이 방대한 찬수작업이 다 이루어진 셈이다. 곧 황제의 명령에 따른 어찬(御纂)으로 간행 반포되었으며, 이후 청대(淸代)에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면서 《오경대전》을 수록하였으므로 가장 보편적인 판본이 되었다. 이후 사고전서의 영인본 이외에는 중국에서도 특별히 단행본으로 특기할 만한 판본은 찾기 어렵다.
《오경대전》이 편찬된 지 4년 후인 1419년에 조선에도 처음 수입이 된 것을 시작으로 세종(世宗) 시기 15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수입되었다. 세 번 모두 기증의 형식이었지만 다른 방식의 대가(代價)를 지불한 것은 당연하다. 조선에서는 두 번째 수입된 세종 8년부터 간행사업이 시작되었는데, 먼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간행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경상 감사·전라 감사·강원 감사에게 명하여 《오경대전》을 간행하였다.
4. 내용:
명대 초기 오경(五經)은 모두 고주소(古注疏)와 송유(宋儒)를 위주로 하였지만 전체적인 무게는 주자(朱子)에게 실려 있었다. 그러므로 당(唐)의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한(漢)과 위진(魏晉)의 경설(經說)을 집대성한 것이라면, 명(明)의 《오경대전》 찬수는 주자(朱子)의 학술과 사상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위까지 공고하게 하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각 오경(五經)에서 채택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주역대전(周易大全)》 24권 : 송(宋) 정이(程頤), 주희(朱熹)의 주(注)와 동계(董階), 원(元) 호일계(胡一桂), 호병문(胡炳文), 동진경(董真卿)의 소(疏)를 채택.
《서전대전(書傳大全)》 10권 : 송(宋) 채침(蔡沈)의 주(注)와 원(元) 진력(陳櫟) 진사개(陳師凱)의 소(疏)를 채택.
《시경대전(詩經大全)》 20권 : 송(宋) 주희(朱熹)의 주(注)와 원(元) 유근(劉瑾)의 소(疏)를 채택.
《예기대전(禮記大全)》 30권 : 원(元) 진린(陳瀾)의 주(注)와 제가(諸家)의 소(疏)를 두루 채택.
《춘추대전(春秋大全)》 70卷 : 송(宋) 호안국(胡安國)의 주(注)와 원(元) 왕극관(汪克寬)의 소(疏)를 채택.
‘정난지변(靖難之變)’으로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한 주체(朱棣)는 쿠데타에 성공한 제왕들이 상당수 그러하듯 도서편찬 등 문화 사업에 힘쓰게 되는데, 이는 시급하게 정통성을 확보하고자하는 압박감과 함께 정권을 공고히 하는 정치적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5. 가치와 영향
반포 당시에는 과거 시험의 텍스트로 쓰여 지극히 중시되고, 사상의 통일을 가져오는 등 통치 차원에서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졸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훗날, 특히 청대 학자들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과 주이준(朱彛尊)의 《경의고(經義考)》의 비판이 비교적 상세한데, 청말(淸末) 피석서(皮錫瑞) 《경학역사(經學歷史)》의 비판이 종합적이다.
“당대(唐代)에 근거한 주석들은 육조(六朝) 시기의 옛 전적이었으므로 두루두루 다 갖춰져 있어 오히려 볼만하였다. 명대(明代)에 근거한 책들은 모두 원인(元人)들이 남긴 저서였으므로 그 천박하고 비루함이 더욱 심하였다. 이것이 《오경정의(五經正義)》는 지금에 와서도 깊이 연구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오경대전(五經大全)》은 그 후에 마침내 모두 침 뱉고 버리게 된 까닭이다. 원대(元代)에는 송유(宋儒)의 주석(注釋)으로 선비들을 등용하였지만, 명대에 와서는 정주(鄭注)를 다 버렸기 때문에 학자들로 하여금 옛 뜻의 전체 면모를 볼 수 없게 하고 공소하고 고루한 것으로써 대신하였으니, 《경의고(經義考)》에서 비속하다고 지목하는 책이 되었다. 그러므로 경학(經學)은 명대에 이르러 지극히 쇠미하게 되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대전(大全)》은 비록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찬수했다고는 하나 사실 찬수된 것이 아니다. 조정은 속일 수가 있으며 다달이 월급도 써서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내려주니 받을 수야 있었겠지만, 천하 후세를 어찌 속일 수가 있었겠는가.[大全雖奉勅纂修 而實未纂修 朝廷可罔 月給可糜 賜予可要 天下後世 詎可欺乎] (고염무(顧炎武), 《일지록(日知錄)》)
• 송(宋)・원(元)・명(明) 삼대의 경학을 논하자면, 원대는 송대에 미치지 못하고, 또 명대는 원대에 미치지 못한다. 송의 유창(劉敞)과 왕안석(王安石) 등의 학자는 먼저 주소(注疏)를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주소의 득실을 변별할 수 있었다. … 그러나 元人들의 경우 宋儒의 저서들을 그저 지키고만 있었을 뿐, 注疏에서 얻은 바는 매우 얕았다. … 그런데 明의 학자들은 또 元儒의 저서를 그저 지키고만 있었을 뿐, 宋儒에 대한 연구는 극히 적었다. … 이것이 明代의 經學이 元代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論宋元明三朝之經學 元不及宋 明又不及元 宋劉敞 王安石諸儒 其先皆嘗潛心注疏 故能辨其得失 … 若元人則株守宋儒之書 而於注疏所得甚淺 … 明人又株守元人之書, 於宋儒亦極少硏究 … 是明又不及元也](피석서(皮錫瑞), 《경학역사(經學歷史)》)
• 원대(元代) 사람들은 스승에게 전수받은 바를 돈독히 지키면서 스스로 밝힌 바가 있으니 모두 자신만의 심득(心得)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명대(明代)에는 정난(靖亂) 이후로 원로 유생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 호광(胡廣) 등도 함께 논의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에 옛 책들을 표절하여 황제의 조서에 대응한 것이다.[元人篤守師傳 有所闡明 皆由心得 明則靖亂以後 耆儒宿學 略已喪亡 胡廣等無可與謀 乃剽竊舊文以應詔]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2) 색인어:《오경대전(五經大全)》, 호광(胡廣), 영락제(永樂帝), 고염무(顧炎武), 《사서대전(四書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3) 참고문헌:
《經義考》 (朱彛尊, 中文出版社)
《四庫全書總目提要》 (永瑢 等)
《經學歷史》 (皮錫瑞, 河洛圖書出版社)
《中國經學史》 (馬宗霍, 臺灣商務印書館)
《國經學史》 (本田成之・江俠庵역, 中華書局)
《宋明經學史》 (章權才, 廣東人民出版社)
《中國古文獻學史》 (孫欽善, 中華書局)
《明代考據學硏究》 (林慶彰, 臺灣學生書局)
「《五經大全》之修纂及其相關問題探究」(林慶彰, 《明代經學硏究論集》)
「《五經・四書大全》의 수입 및 그 刊板 廣布」(鄭亨愚 《東方學志》)
「明代五經大全纂修의 배경과 經學史的意義」(李康範, 《中國語文學論集》)
【이강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