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강락집(謝康樂集)》은 중국 산수시(山水詩)의 대가인 남조(南朝) 송(宋) 사령운(謝靈運)의 시문집으로, 명(明)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심계원(沈啓原) 등이 편집하고 초횡(焦竑)이 교감한 판본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이 책은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권1과 권2는 부(賦), 권3은 악부(樂府)와 시(詩), 권4는 문(文)이 수록되어 있다.
2. 저자
(1) 성명:사령운(謝靈運)(385∼433)
(2) 자(字)·별호(別號):원명(原名)은 공의(公義)이고, 자는 영운(靈雲)이다. 아명(兒名)은 객아(客兒)이고, 세칭 사객(謝客)이라 하며, 대대로 강락공(康樂公)에 세습되어 사강락(謝康樂)이라 불린다.
(3) 출생지역:조적(祖籍)은 진군(陳郡) 양하(陽夏)(現 하남성(河南省) 태강현(太康縣))이며, 동진(東晉) 태원(太元) 10년(385)에 회계(會稽) 시녕(始寧)(現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에서 출생하였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사령운(謝靈運)은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조부 사현(謝玄)은 진(晉)나라의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지내고 부친 사환(謝瑍)은 비서랑(祕書郞)을 지내어 대대로 강락공(康樂公)에 세습되어 봉해졌다. 처음에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희(義熙) 원년(405) 대사마에 임명된 낭야왕(琅邪王) 사마덕문(司馬德文)의 막부에서 행군참군(行軍參軍)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의희 8년(412) 형주자사(荊州刺史) 유의(劉毅)의 군중에서 기실참군(記室參軍)을 맡았으며, 유의의 사후 유유(劉裕)의 송(宋)에서 자의참군(諮議參軍), 중서시랑(中書侍郞), 황문시랑(黃門侍郞), 세자좌위솔(世子左衛率) 등을 역임하였다.
유유가 송 무제(宋武帝)로 즉위한 후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로 발탁되어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을 지냈다. 평소 무제의 차남인 여릉왕(廬陵王) 유의진(劉義眞)과 친분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무제 사후 장자인 유의부(劉義符)가 소제(少帝)로 추대되자 서선지(徐羨之) 등에 의해 경평(景平) 원년(423) 영가태수(永嘉太守)로 좌천되었고, 산수를 유람하며 다니다 이듬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시녕으로 돌아왔다.
원가(元嘉) 3년(426) 문제(文帝)가 즉위한 후 비서감(秘書監)이 되어 비각(秘閣)의 문서를 정리하고 ≪진서(晉書)≫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신임과 중용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고 자유분방한 언행으로 공무를 소홀히 하였던 탓에 탄핵을 받아, 원가 5년(428) 다시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시녕으로 돌아왔다. 이후 사혜련(謝惠連), 하장유(何長瑜), 순옹(荀雍), 양선지(羊璿之) 등 이른바 사령운의 ‘사우(四友)’들과 함께 산수를 유람하며 즐겼으나, 반역을 모의한다는 무고를 받아 원가 8년(431) 임천내사(臨川內史)로 부임하였다. 임천에서도 영가태수 때와 마찬가지로 종일 유람하며 정무를 돌보지 않다가 이로 인해 탄핵되어 체포를 당하게 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며, 광주(廣州)로 유배되었다가 농민군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한 죄목으로 처형당해 원가 10년(433)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5) 주요저작:《사강락집(謝康樂集)》
3. 서지사항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따르면 《사령운집(謝靈運集)》 20권이 있으며 《당지(唐志)》에도 《사령운집》 15권이 있다고 되어 있으나, 송(宋)나라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와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송대 말엽에 이미 일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하는 사령운의 시문집은 모두 명청(明淸) 시기에 여러 총집(總集)과 유서(類書), 사서(史書) 등에서 편집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사강락집(謝康樂集)》은 명(明) 심계원(沈啓原) 등이 편집하고 초횡(焦竑)이 교감한 것으로, 총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賦), 악부(樂府), 시문(詩文) 등 총 110편이 수록되어 있다. 후에 명(明) 장부(張溥)가 《한위육조백삼명가집(漢魏六朝百三名家集)》에서 《사강락집(謝康樂集)》 2권을 편찬하였으며 여기에는 총 119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외 시문집으로 명(明) 설응기(薛應旂)의 《육조시집(六朝詩集)》 1권본, 명(明) 장섭(章燮)의 《칠십이가집(七十二家集)》 8권본, 근인 정복보(丁福保)의 《한위육조명가집(漢魏六朝名家集)》 5권본 등이 있는데 모두가 완전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4. 내용
사령운은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기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으로, 중국 고전시가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다만 사령운의 시 뿐만 아니라 산문을 비롯하여 부(賦)와 악부(樂府)까지 모두 포괄함으로써 사령운의 문학세계를 전반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철학과 사상까지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사령운은 중국 시가의 대표적인 형식인 오언시(五言詩)의 발전을 선도하였다. 오언시는 동한 시기에 발생하였으며, 위진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인들에 의해 다량으로 창작되었다. 문인들은 오언시를 창작하면서 기존에 자신의 감개를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탈피하고 경물에 빗대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였으며 형식적으로도 대구나 격률 등을 중시하며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나갔는데, 사령운은 이러한 경향을 주도적으로 개척하였다.
《송서(宋書)》 〈사령운전(謝靈運傳)〉에서는 “매번 그의 시가 도성에 이르면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누구도 다투어 베껴 쓰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하룻밤 사이에 모든 백성들이 두루 보았다. 먼 곳의 사람이나 가까운 곳의 사람이나 모두 흠모하였으니 그 이름이 수도를 뒤흔들었다.[每有一詩至都邑 貴賤莫不竟寫 宿昔之間 士庶皆遍 遠近欽慕 名動京師]”라고 하였으니, 당시 그의 시의 위상과 영향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사령운은 산수시(山水詩)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어 후에 중국 산수시의 전형으로 간주되었다. 사령운 이전에도 산수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의 산수시들이 다만 객관적인 산수의 외관만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하였던 것에 비해, 사령운의 산수시는 산수의 풍광과 시인의 감정을 융합시켰으며 묘사의 방식에 있어서도 핍진함과 생동감을 더함으로써 그 예술적 성취를 한층 더 높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이불 속에서 어느 때인지 모르다가 휘장 걷어 열고서 잠시 굽어보네. 귀를 기울여 물소리를 듣고 눈을 들어 높은 산을 바라보네. 갓 따뜻해진 볕은 남은 겨울바람을 바꾸고 새로운 햇빛은 오랜 그늘을 바꾸었으니, 연못에는 봄풀이 생겨나고 정원 버들에 새 울음소리 변하였네.[衾枕昧節候 褰開暫窺臨 傾耳聆波瀾 擧目眺嶇嶔 初景革緖風 新陽改故陰 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 〈연못가 누대에 오르다[登池上樓]〉
• “아침저녁으로 기후가 바뀌며 산과 물은 맑은 햇살 머금었네. 맑은 햇살이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으니 노니는 이는 편안하여 돌아가길 잊었네. 골짜기 나설 때는 해가 아직 이르더니 배에 오르자 볕이 이미 희미해지고, 숲과 계곡에는 어두운 빛이 모이고 구름과 노을에는 저녁안개 자욱하네.[昏旦變氣候 山水含清暉 清暉能娛人 游子憺忘歸 出谷日尙早 入舟陽已微 林壑斂暝色 雲霞收夕霏]” 〈석벽정사에서 무호로 돌아와서 짓다[石壁精舍還湖中作]〉
(2) 색인어:사령운(謝靈運), 사강락집(謝康樂集), 산수시(山水詩), 영가태수(永嘉太守), 한위육조백삼명가집(漢魏六朝百三名家集), 육조시집(六朝詩集), 칠십이가집(七十二家集), 한위육조명가집본(漢魏六朝名家集)
(3) 참고문헌
• 謝康樂詩注(黃節, 中華書局)
• 謝靈運集校注(顧紹柏, 中州古籍出版社)
• 사령운·사혜련 시(주기평 외, 학고방)
【주기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