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상산선생전집(象山先生全集)》은 남송(南宋) 시기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유문(遺文)들을 수집하여 간행한 문집이다. 육상산(陸象山)은 아호(鵝湖)논쟁에서 무극태극(無極太極)논쟁에 이르기까지 주자(朱子)와 20년 가까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심학의 기틀을 확립한 자이다. 왕양명(王陽明)은 성인의 학문은 심학임을 천명하고, 주자 사상이 지리멸렬한 것과 달리 상산의 관점은 간이명료하여 맹자(孟子)의 도통을 이었다고 평가한다. 《상산선생전집》은 다원적인 세계인식을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문헌이다.
2. 저자
(1) 성명:육구연(陸九淵)(1139~1192)이다. 연보에서는 고종(高宗) 소흥(紹興) 9년(1139) 2월 을해일(乙亥日)에 태어나 광종(光宗) 소희(紹熙) 3년(1192) 12월 계축일(癸丑日)에 세상을 마쳤다고 적고 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각각 1139년 3월 24일과 1193년 1월 18일에 해당된다.
(2) 자(字)·별호(別號):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는 상산(象山)이다. 만년 귀계(貴溪)에 있는 응천산(應天山)에 올라 강학활동을 하였는데, 산의 형상이 코끼리와 닮았다 하여 이름을 ‘상산(象山)’으로 고치고 스스로를 상산거사(象山居士) 또는 상산옹(象山翁)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세인(世人)들이 그를 상산선생(象山先生)으로 칭하였다.
(3) 출생지역:무주(撫州) 금계(金溪)(現 중국 강서성(江西省))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육산상의 생애는 구도(求道)시기·강학(講學)시기·관직(官職)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학(聖學)에 뜻을 두고 구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13세가 되던 해(1151) 고서를 읽다가 ‘우주(宇宙)’ 두 글자에 대한 해석을 접하고 홀연히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입학하고는 책 종이 모서리가 말리거나 접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책을 아끼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8세(1146)에는 《논어(論語)》를 읽다가 유자(有子)의 말에 의혹을 품기 시작하였으며, 11세(1149)에는 막내 형 복재(復齋)와 함께 소산사(疏山寺)에 들어가 《논어》를 독파하였다고 한다. 16세(1154)에는 《대인시(大人詩)》를 지어 입지(立志)의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입으로 암기하고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공부나 과거시험과 같은 세속의 학문은 성학에 뜻을 둔 자신에게 그리 큰 의미가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과거시험은 관직생활을 구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과 정학(正學)을 말하는 수단이었다. 24세(1162)에 성시(省試)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향시에서 4등으로 급제하지만 부친상(喪)을 당하여 임안(臨安)으로 가서 이듬해에 있는 성시를 치르지 못하였고, 복상(服喪)을 마친 후 9년이 지나서 비로소 33세(1171)의 나이에 다시 향시에 응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그는 한탄하기보다는 오히려 절차탁마(切磋琢磨)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강학활동은 34세(1172)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남궁(南宫)에서 치르는 성시(省試)에 급제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작성한 걸출한 답안지는 시험관으로 있었던 여조겸(呂祖謙)의 격찬을 받았고, 금세 학자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임안에 머물며 연시(延試)를 준비하고 있는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였고, 고향 금계로 돌아온 이후 풍문을 접한 학자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여, 집안 동편에 있는 괴당(槐堂)을 ‘존재(存齋)’라 이름 짓고 강학활동을 이어갔다. 주자와의 만남인 아호모임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강의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순희(淳熙) 14년(1186) 조정 대신들의 모략으로 사록관(司祿官)을 제수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그의 세 번째 강학활동은 이어진다. 상산(象山)에 올라 정사(精舍)를 짓고 소흥 2년(1191) 임지로 떠나기 전까지 5년간 지속되었다. 상산정사에서 강학활동을 하던 시기에 주목할 만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바로 주자와 무극태극(無極太極)에 관한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의 관직생활은 34세(1172)의 늦은 나이에 시작되었다.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의 명을 받고, 3년의 대기시간을 거쳐 융흥부(隆興府) 정안현(靖安縣) 주부(主簿) 직책을 제수 받았다. 순희 9년(1182) 국자정(國子正)을 제수 받고, 순희 10년(1183) 겨울에는 칙령소(勅令所) 산정관(刪定官)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순희 16년(1189) 지형문군(知荊門軍)을 받았지만 관직에 뜻이 없었던 그는 수차례 사양하다가, 소희(紹熙) 2년(1191) 7월에서야 제자 부자운(傅子雲)에게 강학활동을 맡기고 임지로 가서 부임하였다. 형문(荊門)은 남송의 군사적 요충지로 전략적 방어선의 최전방이므로 군비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성곽건설에 착수하였고, 탈영병을 엄격히 문책하고 호적제도를 정비하여 군대조직을 완비하였다. 세금제도와 화폐제도를 개선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하였고 세수의 증대를 이루었다. 치안정책 역시 강화하여 도적이 발붙일 곳이 없게 하였다. 또한 강학 공간인 군학(郡學)과 공원(貢院)을 정비하여 교육개선에 힘을 기울였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강학활동에 매진하였다.
(5) 주요저작
육상산은 일생동안 경전에 대한 주석서나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소량의 시문(詩文)·잡저(雜著)·서증(序贈)·서신(書信)·어록(語錄)만 남아있을 뿐이다. 생존 당시 이미 그의 문집을 베껴 공부하고 점검받겠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핵심사상을 읽어낼 수 있는 초록(抄錄) 형태의 문집이 회자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그는 종종 문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관점을 명확히 드러낸 문장을 동봉하기도 하였고, 주자도 문인들을 통해 육상산의 글을 읽어 보고 자신 관점과 다른 지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문집이 세상에 처음 선보인 것은 육구연 사후 20여 년이 지나서였다.
《상산선생어록》은 전체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산선생전집》과 더불어 육상산 철학사상의 핵심을 풍부하게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어록은 육상산이 제자들에게 베푼 훈어(訓語)나 주고받은 말을 당대 구어(口語)를 섞어가며 기록해놓은 자료이다. 논리적 사유와 정제된 언어로 철학사상을 펼친 서신이나 문장과는 달리, 상산의 감정과 성격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송시기 학술경향과 상산의 핵심사유를 다채로운 측면에서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육상산 생존 당시 이미 통행되고 있던 어록이 있었고, 육상산 사후에도 정식으로 간행되기 이전 이미 학자들에게 유전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록이 정식으로 간행된 것은 육상산 사후 40여 년이 지난 가희(嘉熙) 원년(元年)(1237)의 일이다. 양간(楊簡) 문하에 있던 진훈(陳塤)은 육상산의 유문을 틈틈이 수집하다가 일실(逸失)될 것을 우려해, 문인들이 주고받은 문답을 모두 수집하여 귀계(貴溪) 상산서원(象山書院)에서 간행하였다. 주자어류를 편집하는 데 참여했던 포현도(包顯道)도 육상산 어록을 남겼고, 황원길(黃元吉)의 기억에 의하면, 주렴부(周廉夫)가 기록한 《육자어록(陸子語錄)》이 가장 빼어났다고 한다. 어록이 문집에 수록된 것은 명대(明代) 정덕(正德) 16년(1521)에 이르러서다. 이무성(李茂成)은 이전 《상산선생전집》과 별도로 전해지던 《상산선생어록》을 합하여 《육자전서(陸子全書)》를 간행하였다. 이외 명대(明代) 왕종목(王宗沐)이 편찬한 《상산수언(象山粹言)》, 경정향(耿定向)이 편집한 《육상산선생어요(陸象山先生語要)》, 만력(萬曆) 25년(1579) 섭랑기(聂良杞)가 작성한 《육상산선생집요(陸象山先生集要)》 등이 있다. 모두 문집과 어록의 일부를 선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육상산 생애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상산선생연보》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 원섭(袁燮)과 부자운(傅子雲)에 의해 초고가 쓰여졌고, 이종(理宗) 보우(宝佑) 4년(1256) 이자원(李子愿)에 의해 다시 편집되어, 유림(劉林)이 형양(衡陽)에서 간행하였다.
3. 서지사항
《상산선생전집》은 개희(開禧) 원년(元年)(1205) 아들 지지(持之)가 집안에 남아 있거나 문인들이 가지고 있던 유문들을 수집한 후, 양간(楊簡)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모두 28권이고, 외집(外集) 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보에서도 이에 근거하여 총 34권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희(開禧) 3년(1207) 괄창(括蒼)의 고선생(高先生)도 《상산문집(象山文集)》을 군상(郡庠)에서 간행하였고, 가정(嘉靖) 5년(1212) 지지(持之)가 전에 간행한 《상산선생전집》에 빠진 내용이 많아 다시 유문을 모아 32권으로 합하여 간행하였다. 이후 육상산 학문을 기리고 전하는 상산정사가 중수(重修)되고 점차 상산서원이 곳곳에 건립되면서 문집의 출간 역시 요청되어 지속적으로 간행 되었다.
명대(明代) 정덕(正德) 16년(1521) 무주(撫州)의 태수 이무원(李茂元)은 문집(文集)과 어록(語錄)을 합하여 간행하였고, 왕양명(王陽明)이 서문을 썼다. 가정(嘉靖) 40년(1560)에는 덕안(德安)의 하길양(何吉阳)이 문집·어록·연보를 합치고, 문안익의(文安謚議)와 행장(行狀), 그리고 주륙(朱陸)의 학문적 관점이 결국 하나로 일치한다고 논증한 서계(徐階)의 〈학칙변(學則辯)〉과 주륙논쟁 서신을 추가하여 총 36권을 간행하였다.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출판한 《육구연집(陸九淵集)》은 명(明) 가정본(嘉靖本)을 저본으로 하고, 명(明) 성화(成化) 연간 간행한 육화본(陸和本)과 정덕(正德) 16年(1521) 이무원(李茂元) 판본, 만력(萬曆) 43년(1616) 주희단(周希旦)이 간행한 판본, 청(淸) 도광(道光) 2년(1822) 금계(金溪) 괴당서옥(槐堂書屋)에서 간행한 판본을 참고하여 교감(校勘)하였다.
4. 내용
《상산선생전집》은 육상산이 남기 저작과 제자들의 기록 및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된 문집의 서문과 발문, 주자와의 논쟁 서신 등에 이르기까지 육상산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망라하고 있다. 전체 36권 가운데 학자들과 교류했던 서신이 17권에 이른다. 잡저(雜著)·강의(講義)·책문(策問)·시(詩)·정문(程文)·습유(拾遺) 이외에 행장(行狀)·어록(語錄)·연보(年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5. 가치와 영향
동아시아 철학사의 좌표에서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철학사상이 점유하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주자가 상산을 이단으로 비판한 후 줄곧 공정한 평가와 객관적 연구의 노력은 홀시되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갈래가 여럿이듯이, 어느 하나의 관점이 유일하고 절대적일 수 없다. 어느 시점에서, 어느 공간에서, 어느 누군가에게 어느 하나의 철학사상이 의미 있을 수는 있지만,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은 존재하기 어렵다. 둘의 관점은 근본적인 세계 인식에서 비롯된 차이이므로, 어느 한쪽으로 합치거나 한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방식을 제시한 상산의 관점은 주자성리학의 큰 맥을 반대편의 시각에서 조망하고, 명대 양명심학과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며, 한국유학사의 다원적 전개양상을 다른 잣대로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우주 안의 일은 바로 내 안의 일이고, 내 안의 일은 곧 우주 안의 일이다.……우주는 바로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곧 우주이다. 동해에 성인이 나셨다 하더라도 이 마음은 같고 이 리(理)도 같다. 서해에 성인이 나셨다 하더라도 이 마음도 같고 이 리도 같다. 남해와 북해에 성인이 나셨다 하더라도 역시 이 마음도 같고 이 리도 같다. 천년 이전이나 천년 이후 성인이 나셨다 하더라도 이 마음과 리는 또한 같지 않음이 없다.[宇宙内事 乃己分内事 己分内事 乃宇宙内事……宇宙便是吾心 吾心即是宇宙 東海有聖人出焉 此心同也 此理同也 西海有聖人出焉 此心同也 此理同也 南海北海有聖人出焉 此心同也 此理同也 千百世之上 至千百世之下 有聖人出焉 此心此理 亦莫不同也]” 〈상산선생연보〉
• “도리는 그저 눈앞에 있는 도리일 뿐이다. 비록 성인의 경지를 터득한다 할지라도, 역시 눈앞의 도리일 뿐이다.[道理只是眼前道理, 雖見到聖人田地 亦只是眼前道理]” 〈상산어록〉
• “측은함은 인의 단서이고, 부끄러워함은 의의 단서이며, 사양함은 예의 단서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함은 지의 단서이다. 이것이 바로 본심이다.[惻隱 仁之端也 羞惡 義之端也 辭譲 禮之端也 是非 智之端也 此卽是本心]” 〈상산선생연보〉
• “먼저 사람의 본심을 밝힌 후 널리 관람해야 한다.[欲先發明人之本心 而後使之博覧]” 〈상산선생연보〉
• “자네들의 눈과 귀는 저절로 총명하고, 부모 섬김에는 저절로 효도할 수 있으며, 형제 섬김에는 저절로 공경할 수 있으므로, 본심에는 본래 조금도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으니,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저 스스로 확립할 뿐이다.[女耳自聰目自明 事父自能孝 事兄自能弟 本無欠闕 不必他求 在自立而已]” 〈상산어록〉
• “잘못을 알면 본심이 이미 회복된 것이다.[知非則本心即復]” 〈상산어록〉
(2) 색인어: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 회암(晦庵), 주희(朱熹), 주륙논쟁(朱陸論爭), 아호모임(鵝湖之會), 백록동서원강의(白鹿洞書院講義),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
(3) 참고문헌
• 韓國
상산어록역주(고재석, 세창출판사, 2017)
육상산의 도덕철학(안영석, 세종출판사, 2000)
육구연 철학 연구(이동욱, 서울대 박사논문, 2010)
리학 심학 논쟁, 연원과 전개 그리고 득실을 논하다(황갑연, 예문서원, 2014)
• 中國
陸九淵集(中華書局, 1980)
象山先生語錄(上海古蹟出版社, 1992)
陸九淵知軍著作硏究(王心田, 武漢大學出版社, 1999)
陸九淵敎育思想硏究(郭齊家, 江西敎育出版社, 1996)
陸九淵門人(趙偉,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9)
象山語錄(王佃利, 山東友誼出版社, 2000)
• 臺灣
從陸象山到劉蕺山(牟宗三, 上海古籍出版社. 2002)
陸象山弟子硏究(徐紀芳, 文津出版社, 1990)
• 日本
陸象山文集(福田殖, 明德出版社, 1972)
【고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