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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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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재집(誠齋集)》은 남송(南宋)시대 양만리(楊萬里)의 문집이다. 시(詩)와 부(賦), 문(文)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모두 13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문절공집(楊文節公集)》이라고도 한다.

2. 저자

(1) 성명:양만리(楊萬里(1127~1206))
(2) 자(字)·호(號):자(字)는 정수(廷秀), 호는 성재(誠齋), 자호는 성재야객(誠齋野客)
(3) 출생지역:길주(吉州) 길수(吉水(현 중국 강서성(江西省) 길수현(吉水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양만리는 어려서부터 유가경전을 탐독하며 학문에 정진하였고, 소흥 24년(1154)에 진사가 되어 고종(高宗)과 효종(孝宗), 광종(光宗) 등 세 군주를 모시며 관직생활을 하였다. 양만리는 영주(永州) 영릉현(零陵縣) 현승(縣丞)에 부임했을 때, 영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주전파 영수인 장준(張浚)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정심성의(正心誠意)의 학문에 힘쓰라는 장준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삼아, 자신의 서재를 ‘성재(誠齋)’라고 하고, 이를 호로 사용하였다.
관직은 태상승(太常丞), 광동제점형옥(廣東提點刑獄),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 겸 태자시독(太子侍讀), 비서감(祕書) 등을 역임하였다. 소희(紹熙) 원년(1190)에 퇴직을 청하였는데 반려되어 강동전운부사(江東轉運副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철전회자(鐵錢會子)를 사용하라고 명하였는데, 통용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상소를 올리고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재상의 미움을 사 공주지주(贛州知州)로 폄적되었는데,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5년 동안 여러 차례 조정에서 관직을 내렸지만 응하지 않았다.
개희(開禧) 2년(1206) 양만리는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북벌을 위해 거병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요행을 바라는 경거망동한 행동으로 국가에 커다란 피해를 가져올 것을 탄식하며 그의 죄상을 낱낱이 기록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추증되었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시단에서 육유(陸游), 범성대(范成大), 우무(尤袤)와 함께 중흥사대가(中興四大家)로 칭해졌으며, 자유롭고 활달한 성재체(誠齋體)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5) 주요저작
시집과 문집이 수록되어있는 《성재집(誠齋集)》과 17년간의 집필 끝에 완성한 《성재역전(誠齋易傳)》 20권과 《성재시화(誠齋詩話)》 1권이 있다.양만리는 생전에 2만 여수(首)의 시를 창작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성재집(誠齋集)》에 4,232수가 실려 있다.

3. 서지사항

《성재집》은 양만리의 전집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큰아들인 양장유(楊長孺)가 편찬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성재집》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사부총서(四部叢刊)》로 영인된 송대 각본이다.
현재 북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나라 순희(淳熙)‧소희(紹熙) 연간에 간행된 《성재선생강호집십사권형계집십권서귀집사권남해집팔권강서도원집오권조천속집팔권퇴휴집십사권(誠齋先生江湖集十四卷荊溪集十卷西歸集四卷南海集八卷江西道院集五卷朝天續集八卷退休集十四卷)》의 잔본(殘本)을 보면, 양만리 생전에 이미 그의 시집이 간행되어 유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청(明淸) 이래로 《성재집》은 여러 종류의 초본(抄本)과 초교본(抄校本)이 통용되었는데, 권수가 제각기 달랐다. 대표적인 것은 명말(明末) 급고각(汲古閣) 초본과 청나라 때 간행된 수곡정(綉谷亭) 초교본과 명야산방(鳴野山房) 초본이 있다. 시집 부분은 비교적 정확하고 완전하게 전해져왔지만, 문집 부분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상당부분 훼손되었다. 이는 《성재집》의 분량이 133권이나 되어 판각하기가 쉽지 않아 주로 초본이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청대에는 《성재집》이 시집과 문집으로 나뉘어져 따로따로 세상에 전해졌다. 그리고 양만리 시집의 해외 판각본으로 1808년에 일본 오사카의 청목숭산당(靑木嵩山堂)에서 판각한 5책본(冊本)이 있다. 이 판각본은 《송시초(宋詩鈔)》를 저본으로 하여 시의 체제별로 편집했다. 청나라 건륭 60년(1795)에 양만리의 20세손 양진린(楊振鱗)이 《성재집》을 다시 간행하고서, 제목을 《양문절공집》이라고 바꾸었다.

4. 내용

《성재집》은 총 133권으로, 시 42권과 문 90권, 부록(附錄)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시기별로 《강호집(江湖集)》, 《형계집(荊溪集)》, 《서귀집(西歸集)》, 《남해집(南海集)》, 《조천집(朝天集)》, 《강서도원집(江西道院集)》, 《조천속집(朝天續集)》, 《강동집(江東集)》, 《퇴휴집(退休集)》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4,232수가 수록되어 있다. 양만리 사후에 엮어진 《퇴휴집》을 제외한 다른 시집은 모두 양만리가 직접 창작시기 별로 편집한 것이다.
문은 부(賦), 사(辭), 조(操), 표(表), 전(箋), 계(啟), 서(書), 주대찰자(奏對札子), 기(記), 서(序), 심학론(心學論), 천려책(千慮策), 정식론(程試論), 용언(庸言), 해(解), 잡저(雜著), 척독(尺牘), 동궁권독록(東宮勸讀錄), 순희천사록(淳熙薦士錄), 시화(詩話), 전(傳), 행장(行狀), 비(碑), 묘표(墓表), 묘지명(墓志銘) 등 25개의 문체(文體)에 따라 편집했다. 주대찰자에는 그의 정치사상이 잘 드러나 있고, 천려책에는 시사(時事)에 대한 그의 견해가 담겨있다. 동궁권독록은 양만리가 시독관(侍讀官)으로 태자 시절의 광종(光宗)에게 경전을 가르치면서 지었던 것이다. 산문 중 문학적 성취가 가장 뛰어난 것은 기(記)이다.

5. 가치와 영향

양만리는 남송시단의 중흥사대가 중 한 사람이며, 강서시파(江西詩派)의 폐단으로 모방과 표절이 난무하던 시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성재체(誠齋體)’는 중국시가사상 개인의 이름으로 명명된 마지막 시체(詩體)로, 후대 시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새로운 시풍이었다. 그는 시의 본질은 심성(心性)의 표현이고, 시의 사회적 공능인 교화(敎化)와 풍자의 기능을 중시하였다. 또 시와 선(禪)을 융합시켜 깨달음을 중시하였고, 모든 시법과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인의 자유로운 정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가이론에 입각하여 무법(無法)의 활법(活法)과 시미(詩味),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성재체를 완성시켰다. 남송의 시인들은 성재체를 활법시(活法詩)로 평가하며, 양만리를 시단의 맹주로 추종하였다.
그리고 《성재선생문회(誠齋先生文膾)》와 책론(策論)을 모은 《금수책(錦綉策)》은 가장 뛰어난 문선집(文選集)으로 꼽히는데, 과거시험 대비용으로 사용되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벼이삭 구름처럼 가득한 논에 비 안 와 누렇게 여문 벼 드문데, 메밀은 괜시리 꽃만 피고 일찌감치 서리 맞아버렸네. 배고픔 참으며 남은 해 보내야 함을 이미 알았지만, 윤달까지 더해 이 해가 길어졌으니 또 어찌 견딜까?[稻雲不雨不多黄 蕎麥空花早著霜 已分忍飢度殘歲 更堪歲裏閏添長]” 《성재집》 권2 〈민농(憫農)〉
• “서호로 나오니 달 아직도 남아, 연꽃 가득한 못 안에 버드나무 그림자로 칸칸을 지어놓았네. 붉은 연꽃 향 가득한 서늘한 날, 남산을 다 지나면 또 북산으로 가겠지. / 필경 서호의 유월은 경치가 다른 계절과는 다르네. 하늘의 푸른빛과 잇닿은 연잎들은 끝없이 푸르기만 하고, 햇살 받은 연꽃들은 유달리 붉네.[出得西湖月尙殘 荷花蕩裏柳陰間 紅香世界淸涼國 行了南山又北山 / 畢竟西湖六月中 風光不與四時同 接天蓮葉無窮碧 映日荷花別様紅]” 《성재집》권23 〈새벽 정자사를 나와 임자방을 보내며 2수[曉出浄慈送林子方二首]〉
• “양 기슭의 배들은 각기 남북으로 등 돌리고 내달리니, 뱃전의 물결도 서로 만나기 어렵네. 오직 갈매기와 해오라기만이 구속도 간섭도 받지 않고, 북으로 가고 남으로 오며 자유롭게 나네.[兩岸舟船各背馳 波痕交涉亦難爲 只餘鷗鷺無拘管 北去南來自在飛]” 《성재집》 권27 〈처음으로 회화에 들어가[초입회화사절구(初入淮河四絶句)]〉 其三
• “나는 일찍이 글 짓는 법을 배웠는데,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쓸 뿐, 다른 세상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말할 뿐, 다른 사람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吾嘗學爲文矣 吾書吾口 不曰異世 吾目吾心 不曰異人]” 《성재집》 권79 〈이거비우언서(李去非愚言序)〉
• “‘시는 어떻게 짓는 것인가?’ ‘그 문사를 숭상할 뿐이다.’ ‘시를 잘하는 사람은 문사를 버린다.’ ‘그렇다면 그 뜻을 숭상하는 것일 뿐이다.’ ‘시를 잘하는 사람은 뜻을 버린다.’ ‘그렇다면 문사를 버리고 뜻을 버리는 것인데, 시는 어디에 있는가?’ ‘문사를 버리고 뜻을 버리더라도 시는 있다.’ ‘그렇다면 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엿과 차를 먹어 보았는가? 사람들 중 누가 엿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엿은 처음엔 달지만 결국 신맛이 느껴진다. 차는 사람들이 그 쓴맛 때문에 싫어하는데, 쓴 맛이 다하기도 전에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단맛이 생긴다. 시도 또한 이와 같다. 예전에 포공(暴公)이 소공(蘇公)을 헐뜯자 소공(蘇公)이 이를 풍자한 적이 있다. 지금 그 시(〈하인사(何人斯)〉)를 구해보아도, 풍자의 문사가 없고 풍자의 뜻도 없다. 소공이 말한 것을 보자. 「두 사람이 동행하였는데, 누가 그 재난을 불러왔던가?」 포공(暴公)이 이 말을 듣는다면, 「나를 가리켜 한 말은 아니지만, 내가 아니면 그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라며 밖으로 드러내고 화를 내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죽도록 부끄러워할 것이다. 《시경》 이후 이 맛이 끊겨졌었다. 오직 만당의 여러 시인들만이 그 풍격에 가깝다.’ [夫詩 何爲者也 尙其詞而已矣 曰 善詩者 去詞 然則尙其意而已矣 曰 善詩者 去意 然則去詞去意 則詩安在乎 曰 去詞去意 而詩有在矣 然則詩果焉在 曰 嘗食夫飴與荼乎 人孰不飴之嗜也 初而甘 卒而酸 至於荼也 人病其苦也 然苦未旣 而不勝其甘 詩亦如是而已矣 昔者暴公譛蘇公 而蘇公刺之 今求其詩 無刺之之詞 亦不見刺之之意也 乃曰 二人從行 誰爲此禍 使暴公聞之 未嘗指我也 然非我其誰哉 外不敢怒 而其中媿死矣 三百篇之後 此味絶矣 惟晩唐諸子差近之]” 《성재집》 권84 〈이암시집서(頥庵詩集序)〉
(2) 색인어:양만리(楊萬里), 성재집(誠齋集), 양문절공집(楊文節公集), 성재체(誠齋體), 중흥사대가(中興四大家)
(3) 참고문헌
• 《楊萬里詩文選注》(于北山 選注, 上海古籍出版社)
• 《楊萬里詩文集》(王琦珍 整理, 江西人民出版社)
• 《楊萬里集箋校》(辛更儒 編, 中華書局)
• 《楊萬里選集》(周汝昌 選注, 上海古籍出版社)
• 《楊萬里評傳》(張瑞君 編, 南京大學出版社)
• 《楊萬里和誠齋體》(周啓成, 上海古籍出版社)
• 《全宋詩》(北京大學出版社)
• 《全宋文》(上海辭書出版社)
• 《양만리의 시문학 연구》(노은정,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노은정】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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