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완릉집(宛陵集)》은 북송(北宋) 중기 시단(詩壇)에서 활동했던 매요신(梅堯臣)(1002~1060)의 시문집으로, 여기에는 그의 시 2900여 수가 수록되어 있다. 송초(宋初)는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유미주의(唯美主義) 기풍(氣風)을 이어받아 내용 없이 화려하기만 한 시가 유행하였다. 매요신이 시단에 등장한 때 역시 서곤체(西崑體)의 유미주의 시풍이 풍미하고 있었으나, 매요신은 이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개성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에 남송의 유극장(劉克莊)(1187~1269)은 그의 시가 당말(唐末)·오대의 유습(遺習)을 타파했다는 의미에서 “송조(宋朝)의 시는 오직 매요신이 개산시조이다.[本朝詩惟宛陵爲開山始祖]”라고 평하였다.
2. 저자
(1) 성명:매요신(梅堯臣)(1002~1060)
(2) 자(字)·별호(別號):자는 성유(聖兪), 별호는 완릉(宛陵), 완릉선생(宛陵先生), 매완릉(梅宛陵) 등이다. 매요신은 시조(始祖)로부터 25대 손이어서 매이십오(梅二十五), 차남이어서 매이(梅二), 최종 관직이 상서도관원외랑(尙書都官員外郞)이어서 매도관(梅都官)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그가 지은 영물시(詠物詩) 가운데 복어[河豚]를 읊은 시가 당시에 유명해서 매하돈(梅河豚)이라고 부른다. 더불어 “매성유는 유원보(劉元甫)가 놀리듯 말했던 참언(讖言)으로 인해 마침내 도관의 벼슬에 그치고 선성(宣城)에 묻혔으니 속인들은 매부자(梅夫子)의 묘라고 불렀다. 그를 애도하는 자가 시에서 말하였다: ‘다행히 아이들에서 선생님[夫子]이라 불리었으나, 안타깝게도 명리는 도관에 그쳤구나.’[梅聖俞因劉元甫戲言之讖, 竟終於都官, 葬在宣城, 俗呼爲梅夫子墓。吊之者有句 : ‘贏得兒童叫夫子, 可憐名位只都官.’]”라고 한 구절로 인해 매부자(梅夫子)라고 부르기도 한다.
(3) 출생지역: 선주(宣州) 선성(宣城)(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선성시(宣城市))
(4) 주요활동과 생애
매요신은 그의 부친 매양(梅讓)의 나이 43세 때 육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를 배웠으며 간혹 시를 지으면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매요신은 13세 되던 해부터 지방관이 된 숙부 매순(梅詢)의 임지(任地)를 따라다니며 생활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시를 잘 지은 매순은 조카 매요신을 데리고 다니며 학문적 소양을 다져 주었다. 27세 때 숙부의 공적으로 태묘제랑(太廟齊郞)이 되었고, 그 후 동성주부(桐城主簿)로 옮기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매요신은 관직생활을 시작한지 8년 동안 다섯 번이나 임지를 옮겼을 정도로 관직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그의 나이 37세 때 경사(京師)에 가서 추시(秋試)를 치렀으나 낙제하였다. 이때의 마지막 과거 실패는 매요신에게 큰 좌절을 가져다주었다. 후일 여러 대신들의 추천으로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의 자격을 얻었으나 항상 조상의 공적으로 관직을 시작한 것에 대한 떳떳치 못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55세 때 한림학사(學林學士) 조개(趙槩)와 구양수(歐陽修) 등의 추천으로 국자감직강(國子監直講)이 되었다. 그 다음 해 구양수가 지공거(知貢擧)가 되면서 함께 지공거가 된 한위(韓緯)·왕규(王珪)·범진(范鎭)·매지(梅摯) 등의 추천으로 소시관(小試官)이 되었다. 이때 매요신은 구양수를 중심으로 하는 고문운동의 일환으로 새로운 인재를 뽑는 일에 참여하여 증공(曾鞏)·소식(蘇軾)·소철(蘇轍)을 진사에 급제시키는데 일조하였다. 58세에는 상서도관원외랑(尙書都官員外廊)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당서(唐書)를 편수(編修)하였으나 상주(上奏)하지 못하고 전염병에 걸려 1060년(가우(嘉祐) 5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5) 주요저작
저작으로 사부비요본(四部備要本)인 《완릉집(宛陵集)》 60권이 있다. 또한 사부총간초편축인본(四部叢刊初篇縮印本)인 《완릉선생집(宛陵先生集)》 60권, 《습유(拾遺)》 1권, 《부록(附錄)》 1권이 있다.
3. 서지사항
사부비요본 《완릉집》은 총 60권(卷)으로 부록이 실려 있으며 10책(冊)으로 되어있다. 맨 앞에는 1046년(경력(慶曆) 6년)에 구양수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판본은 목판본(木版本)이다. 간행연도는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전반(만력(萬曆) 연간(年間))인 1567-1623년이며, 간행지(刊行地)와 간행자(刊行者)는 미상(未詳)이다. 책 크기는 25.8×16.8cm이다. 사부비요(四部備要) 집부(集部)에 수록되어 있으며, 1970년 대만(臺灣)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간행하였다.
4. 내용
이 책의 체제는 다음과 같다. 책의 맨 앞에는 구양수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서문에는 시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매요신이 현실에서 맺힌 바를 충어(蟲魚)·초목(草木)·조수(鳥獸)를 통해 기탁(寄託)하였는데, 곤궁함은 매요신의 작시(作詩) 동기이자 공교(工巧)한 시 탄생의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구양수가 서문에서 “대개 곤궁할수록 작품은 더욱 공교해진다.[蓋愈窮則愈工]”라고 한 주장은 이후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란 말로 회자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총 60권으로 되어있는데, 제1권에서 제59권까지는 시가 실려 있으며, 제60권에는 기(記), 서(序), 부(賦)가 실려 있다.
5. 가치와 영향
송초의 시단은 백체(白體)·만당체(晩唐體)·서곤체(西崑體)의 순으로 서로 이어지면서 유미주의 기풍이 공존하였다. 백체는 왕우칭(王禹稱)을 대표로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풍격을 이어받았으며, 만당체는 구승(九僧)·임포(林逋) 등을 대표로 당나라 가도(賈島)의 시풍을 모방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서곤체의 역량을 능가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매요신이 시단에 등장할 때는 서곤체의 세력이 가장 컸다. 서곤체는 만당(晩唐)과 오대(五代)에 유행했던 왕실 측근의 문인들에 의해 주로 지어진 유미주의적인 시풍이다. 서곤체 문인들은 만당의 시풍을 본 떠 교묘한 대구와 전고를 많이 썼으며 대체로 화려하고 감상적인 시를 많이 썼다. 이들 주요 작가인 양억(楊億)과 유균(劉筠) 등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대표적인 시인 15명의 작품을 모아 펴냈던 《서곤수창집(西崑酬唱集)》이 유래가 되어 이들을 서곤파(西崑派)라 불렀다. 매요신은 당말·오대의 유습(遺習)인 서곤체의 기풍을 바꾸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매요신의 시는 청려하고 평담한 특징을 지녔고, 만년으로 갈수록 심원한 맛과 기력(氣力)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는 구양수에게 인정을 받아 매요신이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우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들에 의하여 서곤체의 부미(浮靡)한 풍조가 쇄신되고 새로운 풍격의 송시(宋詩)가 형성되었다. 매요신은 송시의 개산시조로서 뿐만 아니라, 시 창작에 전념한 작가로서 주목할 만하다. 시인으로서 매요신은 소순흠(蘇舜欽)·구양수 등과 같이 성당(盛唐) 시대의 시풍을 되살리는 운동을 통해 새로운 송시의 개척자가 되었다. 이런 공으로 두보(杜甫) 이래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또 율시는 왕유(王維)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북송 시문혁신운동에서 구양수·소순흠과 함께 이름을 함께 날려 ‘매·구(梅歐)’ 또는 ‘소·매(蘇梅)’라고 불렸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물건은 아름다워서 칭송되거니와, 혹은 못생겨도 쓰이는 법, 미추에는 정한 규정 실로 없으니, 때를 만나면 역시 마찬가지라네. 버림받으면 경시되지만, 쓰여지면 중시된다네.[物以美好稱 或以醜惡用 美惡固無然 逢時乃亦共 棄則爲所輕 用則爲所重]”〈[화영배(和癭盃)]〉
• “사람의 마음 풀과는 다를진대, 어찌 나무가 근심을 잊게 하고 풀리게 하겠는가. 만약 근심이 이로써 잊을 수 있다고 하면, 바로 인심이 사물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라.[人心與草不相同 安有樹萱憂自釋 若言憂及此能忘 乃是人心爲物易]”〈[화석창언학사관사십제(和石昌言學士官舍十題) 기오(其五) 훤초(萱草)]〉
• “기름등불 밤을 비추는데, 이 물건 쓸 수 있으리니, 머리를 태워도 끝내 후회치 않고, 몸을 던져도 빛을 밝게 하기 위함이네. 마음을 다해 환하게 하고자 하는데, 땅에 내려놓으니 비로소 가벼운 줄 알겠네. 만약 펄럭이는 나뭇가지에 견주려면, 어찌 세상에서 이름을 구하겠나.[油燈方照夜 此物用能行 焦首終無悔 橫身爲發明 盡心常欲曉 委地始知輕 若此飄飄梗 何邀世上名]”〈[도등장(挑燈杖)]〉
• “봄 섬에 물억새 자라고, 봄 언덕에 버들꽃 날리네. 복어 맛 이때가 되면, 귀하여 물고기와 새우로는 비할 수 없네. 생김새 괴상하기 그지없고, 그 독도 더할 수 없네......한유(韓愈)는 조주(潮州)에 와서, 처음으로 바구니 속의 뱀 먹기를 꺼렸고, 유종원(柳宗元)은 유주(柳州)에 살면서, 두꺼비를 맛있게 먹었다네. 두 동물 비록 보기에는 밉지만, 생명임에는 틀림없다네. 복어 그것과 비할 수 없이 좋지만, 배 속에 끝없는 재앙 감췄네. 아주 아름다운 건 악(惡) 또한 그에 걸맞는 법, 이 말 참으로 기릴만하네.[春洲生荻芽 春岸飛楊花 河豚當是時 貴不數魚鰕 其狀已可怪 其毒亦莫加……退之來潮陽 始憚粲籠蛇 子厚居柳州 而甘食蝦蟆 二物雖可憎 性命無舛此 斯味曾不比 中藏禍無涯 甚美惡亦稱 此言誠可嘉]”〈[범요주좌중객어식하돈어(范饒州坐中客語食河豚魚)]〉
(2) 색인어:완릉집(宛陵集), 매요신(梅堯臣), 완릉선생집(宛陵先生集), 구양수(歐陽修), 소순흠(蘇舜欽), 매·구(梅歐), 소·매(蘇梅)
(3) 참고문헌
• 宛陵集(四部備要本, 臺灣中華書局)
• 宛陵先生集(四部叢刊初篇縮印本, 上海商務印書館)
• 梅堯臣集編年校注(朱東潤 著, 上海古籍出版社)
• 梅堯臣詩之硏究及其年譜(劉守宜 著, 文史哲出版社)
• 梅堯臣詩評注(夏敬觀·趙熙原 著, 曾克耑 纂集, 臺灣商務印書館)
• 梅堯臣詩選(朱東潤 選注, 北京人民出版社)
• 梅堯臣(朱東潤 著, 北京中華書局)
• 梅堯臣硏究(文明淑, 高麗大學校博士學位論文)
• 梅堯臣硏究(禹在鎬, 서울(大學校碩士學位論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