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왕임천문집(王臨川文集)》은 북송(北宋) 때의 유명한 정치가·사상가·문학가인 왕안석(王安石)의 시문집이다. 《왕임천문집》은 기존에 전해오던 판본을 남송 소흥(紹興) 10년(1140)에 첨대화(詹大和)가 교정하여 100권으로 간행하였다. 이후 이 판각들을 보완하여 100권으로 된 《임천집》 외에도 130권, 160권으로 된 판본 등도 있다. 《왕임천문집》 100권 가운데 고시(古詩) 13권과 율시(律詩) 21권을 제외한 66권이 문장이다. 《왕임천문집》에 실려 있는 시문(詩文)들은 자신의 개혁정치의 역정에서 볼 수 있듯이 시폐(時弊)나 사회문제를 신랄히 비판한 정치색이 짙은 작품들이 많다.
2. 저자
(1)성명:왕안석(王安石)(1021~1086)
(2)자(字)·별호(別號):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 별호는 왕형공(王荆公), 왕문공(王文公), 임천선생(臨川先生)
(3)출생지역:무주(撫州) 임천(臨川)(현 중국 강서성(江西省))
(4)주요활동과 생애
왕안석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유명한 정치가·사상가·문학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에 열중하여 다양한 서적들을 읽었으며 한번 읽은 글은 잊는 일이 없었다. 인종(仁宗) 경력(慶曆) 2년(1042) 22세 되던 해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첨서회남판관(簽書淮南判官)을 시작으로 10여 년을 지방관으로 생활하며 사회의 많은 적폐를 경험하였다. 이후 수년간 지방과 수도를 오가며 벼슬하다가 가우(嘉佑) 3년(1058)에 인종에게 〈만언서(萬言書)〉를 올려 정치의 폐단(弊端)을 지적하여 개혁을 요구하였다. 치평(治平) 4년(1067) 신종(神宗)이 즉위하면서 한림학사(翰林学士)가 되었다가, 희녕(熙寧) 2년(1069)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되면서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여 균수법(均輸法)을 시작으로 청묘법(靑苗法)·모역법(募役法)·보갑법(保甲法)·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시역법(市易法)·보마법(保馬法) 등의 신법(新法)을 잇달아 실시하였다. 이듬해 재상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임명되어 강력히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구법당(舊法黨)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희녕 7년(1074) 재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다시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임명되었지만 내홍(內訌)과 외침(外侵)으로 혼란에 빠진데다 황제의 신임도 엷어지고 큰 아들 왕방(王雱)마저 죽자 56세(1076)에 재상에서 물러나 강녕부(江寧府)로 은거하였다. 원풍(元豊) 3년 60세 때에 형국공(荆国公)으로 책봉되었다가 원우(元祐) 원년(元年)(1086)에 죽었다. 죽은 뒤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주요저작:《임천집(臨川集)》 100권, 《왕문공문집(王文公文集)》 100권, 《왕형공시주(王荊公詩注)》 50권, 《주례신의(周禮新義)》 16권, 《자설(字說)》 20권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왕안석은 많은 저작을 남긴 사람이다. 그 가운데 《임천집》은 처음 민본(閩本)과 절본(浙本) 두 판본이 전해오다가 남송 소흥(紹興) 10년(1140)에 첨대화(詹大和)가 교정하여 다시 100권으로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소흥(紹興) 21년(1151)에는 왕안석의 증손 왕각(王珏)이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여 간행하였는데, 첨대화본(詹大和本)과 수록한 시(詩)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후 이 판각들이 복간(復刊)되거나 보완되면서 후대에까지 내려왔다. 서명(書名)도 처음의 《임천집》에서 《임천선생집(臨川先生文集)》으로 점차 바뀌었고, 100권으로 된 《임천집》 외에도 130권, 160권으로 된 판본 등도 있다. 《임천집》의 이본(異本)으로 《왕문공문집(王文公文集)》 100권이 있는데, 편장(篇章)의 순서만 차이가 있다.
4. 내용
왕안석이 변법혁신(變法革新)이라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듯이 《왕임천집(王臨川集)》에 실려 있는 자신의 시문(詩文)도 이러한 정치활동과 연관이 깊다. 그의 문장 가운데 서(書)·표(表)·기(記)·서(序) 등과 같은 문장들은 대부분 시폐(時弊)나 사회문제를 신랄히 비판한 정치색이 짙은 글이다. 이러한 문체의 특징은 언어는 간결하지만 관점이 분명하고 분석적이다. 이것은 일체의 성색(聲色)과 사치를 배제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과도 매우 닮아 있다. 그의 시(詩) 또한 그의 문장과 마찬가지로 시폐를 비판하고 하층민들을 동정하는 등 정치적인 문제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다만 왕안석이 은거한 이후의 시들을 보면 산수전원에서 한적함을 노래한 사경시(寫景詩)나 영물시(詠物詩) 같은 작품이 많다.
5. 가치와 영향
《왕임천집》의 〈시의서(詩義序)〉·〈서의서(書義序)〉·〈주례의서(周禮義序)〉 등을 보면, 《시경(詩經)》·《서경(書經)》·《주례(周禮)》 같은 유학경전을 실용적으로 해석하여 〈시의(詩義)〉·〈서의(書義)〉·〈주례의(周禮義)〉를 지어서 재상으로 재직하는 동안 학교의 교재로 사용하거나 과거시험 출제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그가 실각한 뒤에는 다 폐기되었고, 그 또한 선왕(先王)의 도를 왜곡하고 민중을 오도한 간악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 구법당(舊法黨)의 사상을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는 배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자들도 대체로 그를 소인이나 간신 등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하였다. 김시습(金時習)·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이 대체로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변계랑(卞季良)은 왕안석의 문장과 정사(政事)와 부국강병을 도모한 그 마음 씀을 높이 평가하였고, 세종(世宗)도 소인이기는 하지만 능력은 있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조선의 많은 사대부들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왕안석의 글만은 높이 평가하여 널리 읽었다. 오늘날에도 그의 개혁 정책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가난한 사람은 책으로 인해 부자가 되고, 부유한 사람은 책으로 인해 귀하게 된다.[貧者因書而富 富者因書而貴]” 〈권학문(勸學文)〉
•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면, 천하는 잘 다스려진다.[家給人足 天下大治]” 〈상인종활제만언서(上仁宗皇帝萬言書)〉
• “천하에 하루라도 정치와 교화가 없어서는 안 되므로, 정치와 교화를 맡은 학교도 천하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天下不可一日而無政敎 故學不可一日而亡於天下]” 〈자계현학기(慈溪縣學記)〉
(2)색인어:왕안석(王安石), 형국공(荆国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만언서(萬言書), 변법혁신(變法革新), 구법당(舊法黨), 왕임천집(王臨川集), 왕문공문집(王文公文集)
(3)참고문헌
• 譯註 唐宋八大家文抄 王安石(申用浩·許鎬九 譯註, 傳統文化硏究會)
• 唐宋八大家散文總集 卷5 王安石(郭預衡, 河北人民出版社)
• 王安石散文精選(王運熙, 東方出版中心)
• 王荆公文集笺注(全3册)(李之亮, 巴蜀書社)
• 王安石文集(王安石, 遼海出版社出)
• 臨川文集(王安石, 吉林出版集團有限責任公司)
【노장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