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송(北宋)의 문인 증공(曾鞏)의 글 모음집. 50권. 원풍유고에 수록된 증공의 글은 문학의 개념과 범주를 새롭게 연구 검토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북송 당시는 물론, 명청(明淸) 시대로 내려올수록 최상의 찬사를 받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반열에 오르지만, 20세기에는 “무미건조하고 진부하다”며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로 그 원인을 찾기 위한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2. 저자
(1) 성명:증공(曾鞏)(1019~1083)
(2) 자(字)는 자고(子固). 세칭 남풍선생(南豊先生).
(3) 출생지역:강서(江西) 무주(撫州) 남풍(南豊)
(4) 주요활동과 생애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소문났던 증공은, 16세 무렵부터 당대 최고의 문인 구양수(歐陽脩)의 글을 읽고 배우며 정통 유학(儒學)에 깊이 심취하였다. 18세에 과거 응시 차 상경하는 길에 구양수를 찾아가지만 마침 이릉(夷陵)으로 폄적되어 만나지 못하고, 대신 동향(同鄕)인 왕안석(王安石)을 만나 지기(知己)가 된다. 그 해, 형식을 강조하는 시문(時文)에 능했던 왕안석은 과거에 급제하지만 증공은 낙방하였다.
23세에 두 번째 과거에 응시하러 상경한 증공은 드디어 구양수를 만난다. 구양수는 증공이 준비해 온 글들을 보고 크게 놀라며 최고의 찬사와 함께 그를 지극히 총애하게 된다. 이로부터 증공은 온 천하에 문명을 떨치게 되지만 이번에도 과거에 낙방하고 만다. 이에 구양수는 과거제도를 통렬히 비판하며 낙향하는 증공을 위로한다.
고향 남풍으로 돌아온 증공은 부친의 억울한 파직으로 부모와 동생 13명의 생계를 홀로 떠맡아 동분서주하다가 폐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등 16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고의 그 시절에도 증공은 스승 구양수에게 서신으로 계속 가르침을 구하며 학문과 글쓰기를 완성시켜 나간다.
증공이 39세 되던 인종 가우(嘉祐) 2년(1057), 구양수는 한림학사를 제수 받고 과거시험을 총괄하는 지공거(知貢擧)가 된다. 이때 구양수가 시험을 논술형으로 개혁하면서부터 수많은 인재들이 발탁되었다. 그 첫해에는 소식(蘇軾) ‧ 소철(蘇轍) 형제, 그리고 증공 본인 및 아우 처남 등 일가족 6명이 동시에 급제하여 천고의 미담이 되었다. (채점관은 답안 작성자를 절대로 알 수 없도록 시험은 매우 공정하게 진행되었다)
증공은 40세의 늦깎이 나이에 지방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가 구양수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와 관각교감(館閣校勘) 및 집현교리(集賢校理)로 8년 동안 각종 고서적의 정리 편찬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열녀전목록서(列女傳目錄序)〉, 〈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序)〉 등 교감 편찬 작업을 끝낼 때마다 쓴 11편의 목록서(目錄序)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새로운 관점 제시로 후세의 극찬을 받았다.
신종(神宗) 희녕(熙寧) 2년(1069), 51세가 된 증공은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 지기 왕안석과의 정치적 이견 때문에 자청하여 12년간의 지방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그는 누구보다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 특히 제주(齊州)(오늘날 산동 제남(濟南))에서 수리사업 등의 성공으로 백성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가 이임하게 되자, 백성들이 다리를 끊고 문을 잠그며 만류하여 밤에 몰래 떠날 정도였다.
증공은 부임지마다 민중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구습을 과감히 개혁하여 탁월한 치적을 쌓으면서도 늘 경비 절감으로 국고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종은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국사(國史) 편찬을 맡겼다가 다시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임명하지만, 평생 분투노력하며 몸을 학대했던 증공은 다음해인 원풍 6년(1083) 6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증공은 일생동안 가족과 백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삶을 살았으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도덕의 완성과 민본사상의 실천을 부단히 추구하였다. 순후하고 근면한 위인 됨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대아군자(大雅君子)로 칭하였고, 심지어 진사도(陳師道)는 그를 공자와 병칭하기도 하였다. 남송 이종(理宗) 연간에 문정공(文定公)으로 추존되었다.
(5) 주요저작:《속원풍유고(續元豐類稿)》 40권과 《외집(外集)》 10권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50권본 《원풍유고》 외에도 《속부(續附)》 1권이 포함된 51권본과, 《집외문(集外文)》 2권까지 포함된 53권본 《원풍유고》가 전해진다. 일설에는 《융평집(隆平集)》도 증공이 편찬했다지만 잘못이다. 증공의 저작이 아니다.
3. 서지사항
《원풍유고》는 신종 원풍 연간에 사망한 증공의 유작 모음집이라는 의미로, 증공의 동생 증조(曾肇) 등 친척들이 임시로 정한 명칭이다. 증공의 사후 2년에 왕진(王震)은 문집 서문에서 《남풍선생문집》으로 호칭하였으나, 후인들은 자신의 소장본이 최초의 판본임을 주장하기 위해 계속 《원풍유고》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편찬자는 알려지지 않는다. 당시 민감했던 정치 상황 때문에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410수의 시와 738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원대(元代)의 정사경(丁思敬) 각본이다. 명청을 거쳐 민국(民國) 시대에도 몇몇 판본이 나왔으나 많은 문제점이 있다. 1984년에 등장한 천싱전(陳杏珍) ‧ 자오지저우(晁繼周)가 점교(點校)한 《증공집》 52권본이 현재 가장 좋은 판본이다.
4. 내용
《원풍유고》에 수록된 작품의 주제는 민본사상의 구현이다. 소재는 북송 당시의 정치 ‧ 경제 ‧ 군사 ‧ 문화 ‧ 교육 등 현실사회의 제반 현상이며, 문장의 풍격은 수양이 깊은 도덕군자가 낮은 톤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찬찬히 가르침을 전해주는 느낌의 음유(陰柔) 스타일이다.
증공도 20대 초반까지는 “맹수가 울부짖고, 놀란 파도가 밀려드는” 양강(陽剛) 스타일의 글을 썼다.(초기의 글은 망일된 《속원풍유고》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글이란 대동사회의 구현을 위해 도를 밝히는 것(文以明道)”이므로, 독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작가 개인의 감정 표출을 최대한 억제해야한다는 구양수의 가르침을 받고, 당송팔대가 중에서 원칙에 가장 충실한 글쓰기를 하였다. 물론 스승 구양수와 아내 조씨(晁氏), 그리고 두 딸이 사망하였을 때 지은 글처럼 애통의 감정이 넘쳐흐르는 예외도 있지만, 이러한 감정 노출의 작품은 망일된 《속원풍유고》에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역대의 평에 의하면 목록서와 기서문(記序文)이 가장 뛰어나다.
5. 가치와 영향
증공 산문의 가치는 주로 그의 글을 낭송할 때 나타나는 청각적 심미효과에 있다. 증공의 산문은 후세로 내려갈수록 글쓰기의 모범으로 크게 추존되었다. 그 이유는 ①민본사상에 기초한 정통파 유가 ②도덕적 깊이에서 우러나온 전아(典雅)한 분위기 ③논리 정연함 ④부드럽고 완만한 어조 속에 담긴 설득력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에 주희(朱熹)를 위시한 남송의 문인들은 정통 유가의 흐름이 공맹(孔孟)에서 구양수와 증공으로 이어진다고 인식하였고, 명대 당송파 문인들은 ‘당송팔대가’라는 명칭을 만들며 특히 구양수와 증공의 산문을 배우기에 힘썼다. 청대에 미친 영향은 더욱 지대했다. 동성파(桐城派)는 증공의 산문을 아예 자신들의 핵심 문장이론인 ‘의법(義法)’의 표준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1919년 오사운동(五四運動) 이후로 “공자의 집을 타도((打倒孔家店))”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시대적 흐름 속에 증공 산문의 가치는 낡고 진부한 옛 시대의 유물쯤으로 취급받았다가, 1980년대 이후로 그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만약 문학의 개념을 서구 이론대로 문자적인 것에 국한시킨다면 주로 논설문을 남긴 증공의 글은 문학의 범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전통 인식에 의한다면, 문학 작품의 참된 가치는 낭송할 때 발현되는 청각적 심미 효과에 있다. 이 점에 주목하여 청각적 각도에서 재조명한다면 그의 글이 800여 년 동안 대환영을 받았던 이유를 알 수 있겠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법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니 완전히 같을 필요가 없지만, 도는 근본을 세우는 것이니 완전히 같지 않으면 안 된다. [蓋法者, 所以適變也, 不必盡同; 道者, 所以立本也, 不可不一]” 〈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序)〉
•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공정하고 정확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요? 도덕을 구비하고 또 문장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然則孰爲其人, 而能盡公與是歟? 非畜道德而能文章者, 無以爲也]” 〈구양사인에게 보내는 편지(寄歐陽舍人書)〉
• “교육이 사람들의 내면에 깊이 자리하면 어지러운 세상이 되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其(敎)入人之深, 則雖更衰世而不亂]” 〈의황현현학기(宜黃縣縣學記)〉
(2) 색인어:증공(曾鞏), 《원풍유고》, 구양수, 왕안석
(3) 참고문헌
• 《元豐類稿》 (臺灣商務印書館)
• 《曾鞏集》 (陳杏珍 晁繼周 點校, 北京中華書局)
• 《曾鞏評傳》 (王琦珍, 江西高校出版社)
• 《曾鞏散文硏究》(金容杓, 江西高校出版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