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위소주집(韋蘇州集)》은 중당(中唐) 시기 시인(詩人) 위응물(韋應物)의 시가(詩) 571수가 실려 있다.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부(詩賦)・잡의(雜儀)・연집(燕集)・기증(寄贈)・송별(送別)・수답(酬答)・봉우(逢遇)・회사(懷思)・행려(行旅)・감탄(感歎)・등조(登眺)・유람(遊覽)・잡흥(雜興)・가행(歌行) 14류(類)로 구분해놓았다. 그는 도연명(陶淵明)과 사령운(謝靈運)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에 얽매이지 않고 평담(平淡)하고 고고(高古)한 그만의 특징을 시에 담아내어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을 잇는 산수전원시파(山水田園詩派)의 대표 시인으로서 자리 잡았다. 《위소주집(韋蘇州集)》은 이러한 그의 시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2. 저자
(1) 성명:위응물(韋應物(735~791))
(2) 자(字)・별호(別號):자는 의박(義博). 그가 소주자사(蘇州刺史)와 강주자사(江州刺史)를 지냈으므로 세칭 위소주(韋蘇州), 위강주(韋江州)라고도 하며, 검교좌사낭중(檢校左司郎中)을 지냈으므로 위좌사(韋左司)라고도 한다.
(3) 출생지역:경조(京兆) 두릉(杜陵)(현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에서 출생하였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위응물의 자는 의박(義博)이며 경조(京兆) 두릉(杜陵)(현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사람이다. 당나라의 관리이자 시인으로, 세칭 ‘위소주(韋蘇州)’, ‘위좌사(韋左司)’, ‘위강주(韋江州)’라 한다. 그는 평생 출사(出仕)와 한거(閑居)를 반복하면서, 각 시기마다 부침(浮沈)에 따른 감정의 변화를 걸출한 시작품으로 남겼다.위응물은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에 초년 시절을 보냈다. 천보 10년(751), 그는 장안(長安)에서 시위관(侍衛官)이 되었는데, 당 현종(唐玄宗)이 근시(近侍)로 삼아 궁중을 드나들며 호종하였다. 그러나 천보 15년(756), 안사(安史)의 난 직후 현종이 촉(蜀) 땅으로 피난하면서 위응물 역시 직을 잃게 된다. 비록 생활은 궁핍하였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태학(太學)에서 독서하다가 광덕(廣德) 원년(元年)(763)에 낙양승(洛陽丞)이 되어 본격적인 벼슬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765년 무렵에는 군법 소송을 당한 후 벼슬을 버리고 낙양(洛陽) 동덕사(同德寺)에 들어가 한가한 시절을 보냈는데, 이 기간에 지은 작품으로 〈전옹율지노주알이중승(餞雍聿之潞州謁李中丞)〉・〈부득모우송이주(賦得暮雨送李胄)〉・〈동덕정사양질기하남병조동청연(同德精舍養疾寄河南兵曹東廳掾)〉・〈동덕사우후기원시어이박사(同德寺雨後寄元侍禦李博士)〉・〈동덕각기원시어・이박사부지각투증이수(同德閣期元侍禦)・(李博士不至) (各投贈二首)〉 등의 시가 있다. 769년, 그는 낙양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재직하였고, 이후 778년까지 경조부공조(京兆府功曹)・고릉재(高陵宰)・역양현령(櫟陽縣令) 등 다수의 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779년, 칭병(稱病)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장안 서쪽 교외 지역의 선복사(善福寺)에서 시작 활동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이 당시 지은 작품으로는 〈답창교서당(答暢校書當)〉・〈춘일교거기만년길소부중부삼원소부위하후교서심(春日郊居寄萬年吉少府中孚三原少府偉夏侯校書審)〉・〈기영호시랑(寄令狐侍郎)〉 등의 시가 있다. 785년 강주 자사로 부임한 이후 위응물 본격적인 지방관 생활로 접어든다. 787년에는 좌사낭중이 되고 이듬해, 소주자사로 부임했다가 790년에 해임되었다. 빈곤함으로 인해 당장 장안으로 돌아갈 수 없자 영주(永州) 영정사(永定寺)에 기거하다가 791년 소주에서 세상을 떠난 후, 장안으로 옮겨져 소릉의 선영에 묻혔다. 이후 796년 부인과 합장되었다.
(5) 주요저작:현전하는 위응물의 작품으로는 《위강주집(韋江州集)》 10권・《위소주시집(韋蘇州詩集)》 2권・《위소주집》 10권이 있다. 《전당시(全唐詩)》에도 위응물의 시 568수(보유 4수 포함), 이 외에 《전당문(全唐文)》 권375에 〈빙부(冰賦)〉 1편이 전한다.
3. 서지사항
《위소주집》은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록된 시의 편수는 559~561편으로 차이가 있다. 송대(宋代) 판본으로 가우본(嘉祐本)(왕흠신본(王欽臣本))은 산실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위소주집》의 모본으로 간주되며, 시체에 따라 15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희녕본(蘩寧本)은 희녕 9년(1076), 한유가 조보지(晁補之)가 소장한 위응물 시 559편을 교감하게 하고 갈번(葛蘩)이 10권으로 정리했다고 하나, 이 역시 산실 되었다. 완정하게 남아 있는 판본으로 서붕본(書棚本) (원극문장본(袁克文藏本))이 있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송간본(宋刊本)으로 비정하였다. 송각원수본(宋刻元修本) 《위소주집》 10권 및 습유(拾遺) 1권 송대의 대표적인 판본이다.
원대(元代)에는 원대복건각본(元代福建刻本)인 《수계선생교본위소주집(須溪先生校本韋蘇州集)》이 대표적이며 완본으로 작품 10권과 습유 1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미 영인이 된 통행본 중 하나이다. 아울러, 영인본 《원간위소주집(元刊韋蘇州集)》은 《수계선생교본위소주집》을 편간을 온전하게 재현하였는데, 기존 10권을 14개의 항목으로 편성, 모두 561편의 시와 습유 1권을 추가한 형태이다. 시편 외에도 유진옹(劉辰翁)의 서(序)와 왕흠신(王欽臣)의 서(序)를 추가했고, (詩評)이 부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역대 《위소주집》의 종합본이라 할 수 있다.
명대(明代) 판본으로는 《사부총간위강주집(四部叢刊韋江州集)》이 가장 대표적인데 섭몽계(葉夢桂)의 교기(校記)를 부기(付記)했다. 청대(淸代)에는 상당히 많은 판본이 등장했는데, 강희 연간에 부기되다간행된 《전당시(全唐詩)》 본 10권과 사부비요본(四部備要本) 《위소주집》이 대표적이다.
4. 내용
위응물의 시격(詩格)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소재로서 분류하면 산수시(山水詩), 영물시(詠物詩), 도망시(悼亡詩)가 있다.
위응물의 산수시는 청유(清幽)한 시풍이 특징인데, 이는 자신의 내면 상태를 산수에 투영하여 풍경과 구도를 설정하는 주관적 경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산수시 전반에 유정(幽靜)한 분위기가 드러나는데, 전란의 시대를 관통하면서도 청정(淸靜)하고 평온한 정신세계를 추구했던 그의 산수시에 잘 스며 있다.
영물시에 있어서는 성당 시기의 이백(李白)・두보(杜甫)를 본받으면서도 백거이(白易易)・유우석(劉禹錫)・한유(韓愈) 등의 영물시와 크게 다른 풍모를 개척한다. 그의 시는 송대 유학자들의 관물(觀物)과 궁리(窮理)를 중심으로 한 이학(理學) 영물시 창작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위응물은 아내와의 정이 깊었는데,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예술적 시작법에 기반한 도망시를 다수 남겼다. 도망시를 쓰면서 사물에 빗대거나, 옛일을 추억하는 방식, 꿈속의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청려(淸麗)하고 한담(閑淡)한 시어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도망시에서는 이러한 시어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그의 도망시는 전체적으로 많은 전고(典故)를 사용하지 않고 진솔하게 애통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위응물의 시풍은 대력연간(大曆年間)에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성당(盛唐)시기의 웅장하고 활발한 기상은 거의 사라지고 왕유와 맹호연의 맑고 담백한 풍격이 유행했다. 위응물은 율시(律詩)를 중요시하던 동시대 시인들과는 달리, 각종 시체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특히 고체시(古體詩)에 능했다. 시구의 조탁(彫琢)과 대장(對仗)에 치우치지 않고 고박(古樸)하고 자연스러웠다. 위응물 시대는 전후(戰後)의 영향으로 전반적인 시의 정조가 처량하고 쓸쓸했다. 그러나 위응물은 《시경(詩經)》의 정신과 비흥 수법을 그대로 전승하여 그만의 의경과 개성적인 풍격을 체득했다.
특히 위응물의 악부가행(樂府歌行)은 두보(杜甫)와 원결(元結)에 가깝다. ‘시사(時事)’를 반영한 위응물 시는 훗날 백거이(白居易)의 풍유시(諷諭詩) 창작 및 그가 주도한 중당(中唐) 시기 신악부(新樂府)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위응물의 시는 유종원(柳宗元)의 시와 깊은 영향 관계를 보이는데, 송나라의 소식(蘇軾)은 두 사람을 병칭하여 ‘위유(韋柳)’라고 칭하기도 했다. 엄우(嚴羽) 또한 《창랑시화(滄浪詩話)》 〈시체(詩體)〉에서 ‘위소주체(韋蘇州體)’를 언급하며 그의 시체(詩體)가 지닌 독립적 가치를 인정했다. 중국 시사(詩史)에 있어 위응물의 시작품은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로 상징되는 주류 시파와 다르며, 원결이 추구하던 간고(簡古)하고 졸박(拙樸)한 풍격과도 차이가 있으므로 개성적 시풍에 있어 일정한 위상을 점한다고 평가받는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서글프게도 사랑하는 그대를 떠나, 안개 자욱한 곳으로 아득히 들어간다, 돌아가는 배를 탄 낙양사람에겐, 광릉 숲 속의 아련한 종소리 들리는구나, 오늘 아침 여기서 이별하면, 어디에서 다시 만나랴. 세상일은 물결 위의 배와 같아, 물결 따르다 보면 어찌 머물 수 있겠는가?[悽悽去親愛 泛泛入煙霧 歸棹洛陽人 殘鐘廣陵樹 今朝此爲別 何處還相遇 世事波上舟 沿洄安得住]” 〈초발양자기원대교서(初發揚子寄元大校書)〉
• “초강(楚江)은 가는 비 속에 흐르고, 건업(建業)에 저녁 종이 울릴 때, 막막한 가운데 돛단배가 무겁게 오고, 어둠 속에 새는 더디 떠난다. 해문(海門)은 깊이 있어 보이지 않는데, 포구의 숲은 멀리서 물기를 머금고 있다. 그대 보내는 정은 다함이 없어, 옷깃을 적시는 눈물은 가랑비 같네.[楚江微雨裡 建業暮鐘時 漠漠帆來重 冥冥鳥去遲 海門深不見 浦樹遠含滋 相送情無限 沾襟比散絲]” 〈부득모우송이주(賦得暮雨送李冑)〉
• “오늘 아침 관사가 싸늘하여, 문득 산에 있는 사람 떠올렸네. 계곡물 밑에서 땔나무 묶어 돌아와서는 흰 돌 삶고 있겠지. 술 한 병 가지고 멀리 가 비바람 치는 밤 위로하고 싶은데, 낙엽이 빈산에 가득하니 어디서 발자취 찾을 수 있을까?[今朝郡齋冷 忽念山中客 澗底束荊薪 歸來煮白石 欲持一瓢酒 遠慰風雨夕 落葉滿空山 何處尋行跡]” 〈기전초산중도사(寄全椒山中道士)〉
(2) 색인어:위응물(韋應物), 위소주(韋蘇州), 당시(唐詩), 산수전원시(山水田園詩), 영물시(詠物詩), 도망시(悼亡詩), 대력연간(大曆年間)
(3) 참고문헌
• 宋刻元修本 《韋蘇州集》 十卷
• 元代福建刻本 《須溪先生校本韋蘇州集》 十卷
• 韋應物集校注(陶敏, 王友勝 校注, 상해고적, 2006)
• 韋應物詩集系年校箋(孫望 編著, 中華書局, 2002)
• 韋蘇州集(臺灣商務印書館, 1968)
• 韋應物的人生困境與消解及詩歌創作研究(王柯茹, 江南大学碩士學位論文, 2017)
• 韋蘇州體研究(楊巧羽, 揚州大學碩士學位論文, 2022)
• 《元刊韋蘇州集》研究(李興, 遼寧師範大學碩士學位論文, 2012)
• (譯註)唐詩三百首 1~3(宋載卲 外 譯註, 傳統文化硏究會, 2011)
【김영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