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원호문(元好問)은 금(金)·원(元) 시기를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문학이론가이기도 하다. 탁월한 문학적 성과로 인해 그는 훗날 ‘북방지역의 대문호[北方文雄]’, ‘한 시대의 본보기가 될 만한 대문인[一代文宗]’으로 불리며 존경과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원호문은 시와 문장을 모두 잘 지었지만 시가 창작에서 더욱 뛰어난 문학적 성과를 드러내 보였다. 시에서는 전란으로 인한 재난과 고통 그리고 국가 패망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이른바 상란시(喪亂詩)가 시사(詩史)로서의 의의를 지녀서 원호문 시의 독특한 특징을 구비하게 하였고 동시에 문학사에서의 지위와 위상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임종 무렵 후인들에게 묘비에 ‘시인 원호문의 묘[詩人元好問之墓]’라는 일곱 글자만 새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그는 시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가 창작성과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기도 하였다.
원호문의 최초 시문 전집은 그가 죽은 지 5~6년이 되던 해인 원 세조(元世祖) 중통(中統) 3년(1262)에 엄충걸(嚴忠杰)이 판각한 중통본인데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본서 《유산집(遺山集)》 40권은 이 원간본(原刊本)인 중통본을 저본으로 하여 명대 홍치(弘治) 12년(1499)에 이한(李瀚)이 중간(重刊)한 개봉본(開封本)이다.
2. 저자
(1) 성명:원호문(元好問)(1190~1257)
(2) 자(字)·별호(別號):자는 유지(裕之), 호는 유산(遺山), 별호는 유산선생(遺山先生)
(3) 출생지역:태원(太原) 수용(秀容)(現 산서성(山西省) 흔주(忻州))
(4) 주요활동과 생애
금(金)나라의 역사는 상경(上京)에 수도를 정했던 시기(1115~1153), 연경(燕京)으로 수도를 옮겨 국력이 왕성했던 전성기(1153~1214), 몽고군의 남침으로 수도를 변경(汴京)으로 옮겨 원나라에 멸망당하기까지 전란에 휩싸여 있던 시기(1214~1234) 등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원호문이 관리이자 문학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는 금·원의 교체기에 해당된다. 몽고군의 남침으로 인해 정치·경제의 혼란이 가속화되고 국운을 더 이상 진작시키지 못한 채 마침내 원(元)나라에 의해 멸망당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은 망국인으로서 원호문과 그의 문학에 중심 주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국가의 불행이 시인에게는 행운[國家不幸詩家幸]’이라는 말이 있듯이 망국의 아픔과 슬픔은 도리어 원호문을 뛰어난 문인으로 만들어주었다.
원호문의 먼 조상은 북위(北魏) 선비족(鮮卑族)의 탁발씨(拓跋氏)였는데 후에 성을 원(元)으로 개칭하였다. 그의 조상 중에는 성당(盛唐) 시인 원결(元結)이 있고, 고조와 증조는 북송(北宋)에서 무관(武官)을 지냈다. 부친 원명덕(元明德)은 시와 문장을 잘 지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 하자 산수 간을 방랑하다가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리하여 원호문은 만 한 살도 되지 않아 현령으로 있던 숙부 원격(元格)에게 양자로 보내져서 양육되었다. 원호문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세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면서 신동(神童)으로 불렸다. 금 선종(金宣宗) 흥정(興定) 5년(1221)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이어서 굉사과(宏詞科)에 합격한 뒤에 국사원(國史院) 편수(編修)의 직위를 부여받았고 나중에 관직이 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다. 금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원호문은 몽고군에게 포로로 잡혀 몇 년 동안 구금되기도 하였다. 만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저술에 전념하였다. 원 헌종(元憲宗) 7년(1257)에 세상을 떠났다.
(5) 주요저작:원호문은 유명한 문학가이자 역사가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중 문학 방면의 대표작은 본서 《유산집(遺山集)》 40권을 들 수 있으며, 역사 방면의 대표작은 《중주집(中州集)》 10권을 들 수 있다. 《중주집》은 금대(金代) 시가의 총집으로서 금대 시인 251인의 시 2,062수를 수록하였는데 작가의 소전(小傳)에 생애 사적과 명구 및 시의 특징을 기록하는 동시에 때때로 금대 시단의 기풍이나 시가의 원류 및 계승발전 관계는 물론이요, 당시의 정치와 역사적 사실까지 같이 소개함으로써 시를 통해 역사를 기록하는 새로운 시사(詩史)의 체재를 열었다. 《금사(金史)》를 편찬하는 데 역사 자료의 주요 출처가 바로 원호문의 《중주집》이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임진잡편(壬辰雜編)》 등 많은 작품들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일실(佚失)되었고, 현존하는 작품으로 《유산선생신악부(遺山先生新樂府)》 5권, 《속이견지(續夷堅志)》 4권, 《당시고취(唐詩鼓吹)》 10권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본서 《유산집(遺山集)》 40권은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 집부(集部) 오(五)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판본은 명대(明代) 어사(御史)인 이한(李澣)이 중간(重刊)한 개봉본(開封本)이다. 이 개봉본은 5·7언 고시(古詩), 5·7언 절구(絶句)와 율시(律詩), 잡언(雜言), 고악부(古樂府) 등 1,280수의 시와 부(賦)를 수록한 권1~권14, 과거시험과목인 굉사(宏詞)를 수록한 권15, 비명(碑銘)·묘지명(墓誌銘)·묘표(墓表) 등을 수록한 권16~권31, 기(記)·서인(序引)·명(銘)·찬(贊)·송(頌)·서(書)·소(疏)·잡체(雜體)·상량문(上梁文)·청사(靑詞)·제문(祭文)·제발(题跋) 등을 수록한 권32~권40까지 총 4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개봉본 외에도 원유산의 시와 관련하여 청 도광(道光) 2년(1822)에 시국기(施國祁)가 전주(箋注)하고 서송당(瑞松堂) 장씨(蔣氏)가 간행한 서송당본 《원유산시집전주(元遺山詩集箋注)》 14권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원유산시집전주》의 서례(序例)에 의하면 원호문의 시는 원래 최초의 중통본에 수록되었던 1,280수에다가 다시 뒤에 조지겸(曹之謙)이 채록한 82수가 보태어져 총 1,362수가 전해지고 있다. 이를 다시 체재별로 나누면 7언 절구가 582수로 가장 많고 7언 율시가 327수, 5언 고시가 141수, 5언 율시가 92수, 7언 고시가 82수, 악부가 50수, 5언 절구가 44수, 잡언시가 39수, 6언시가 4수, 5·7언시가 1수이다.
4. 내용
원호문의 시와 문장은 전반적으로 빼어나면서도 조탁(彫琢)을 일삼지 않고 화려하지 않아서 금·원 시기의 문학을 대표한다고 평가된다. 원호문의 시는 내용적 측면에서 보자면 서사(敍事), 사경(寫景), 서정(抒情), 논리(論理), 응수(應酬), 제화(題畫) 등 다양하고 폭넓은 제재를 취하고 있다. 시의 제재는 이처럼 다양하지만 내용상 주요 기조는 정치·사회·역사·민생 등의 현실과 대부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창작정신과 내용적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시는 중국 고전시가의 현실주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통은 《시경(詩經)》의 《국풍(國風)》과 《아(雅)》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일반적으로 풍아(風雅)의 전통이라 부르기 때문에 원호문을 금·원대 풍아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후대 비평가들 역시 원호문의 시에 대해 《시경》 풍아의 전통과 이백·두보의 시 정신을 직접 계승하였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원호문의 시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시가 바로 전란을 다루고 있는 상란시(喪亂詩)인데, 이 시들은 대부분 7언 율시로서 국가가 패망해가는 비참하고 비통한 광경을 친히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창(悲愴)·강개(慷慨)한 정감을 강건(剛健)한 기백과 웅혼(雄渾)한 필력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원호문은 또한 뛰어난 문학이론가로서 〈논시절구삼십수(論詩絶句三十首)〉 등을 남겼다. 그의 시론 주장은 대략 네 가지로 개괄할 수 있다. 첫째, 건안(建安) 이래의 우수한 시가 창작 전통이었던 풍골(風骨)을 시에 담을 것을 제창하였으며 건안 시대와 마찬가지로 비분강개하고 기개가 넘치는 현실주의적인 시가전통을 중시하였다. 둘째, 청신(淸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시가 풍격을 고취하고자 하여 도연명(陶淵明)과 사령운(謝靈運)의 시풍을 높이 평가하고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점철성금론(點鐵成金論)과 같은 모방을 반대하였다. 셋째, 작가의 인품과 작품의 내용은 상호 일치해야 한다는 이른바 문행(文行) 일치를 주장하였다. 넷째, 정제되어 간결한 언어표현을 통해 뜻을 전달하는 것을 중시하고 번다하게 나열하거나 화려하게 과장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원호문은 또한 금대에 가장 많은 사(詞)를 쓴 사인으로서 모두 377수의 사를 남겼다. 그가 쓴 사의 제재는 산수·전원·영회(詠懷)·영사(詠史)·영물(詠物)·서정(抒情)·증별(贈別)·수답(酬答) 등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장조(長調)의 회고사(懷古詞)를 가장 많이 남겼다. 사풍은 송대 소식(蘇軾)과 신기질(辛棄疾)을 모범으로 삼아 호방(豪放)하면서도 동시에 완약(婉約)한 풍격까지도 함께 겸하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원호문의 시에는 금·원 교체기 당시의 역사와 사회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금·원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래서 두보가 시사(詩史)로 불리듯이 그 역시 한 시대의 시사(詩史) 또는 논사(論史)로 불리기도 하였다.
원호문은 금나라가 멸망한 뒤 고향에서 유민(遺民)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금대의 역사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고 편찬하는 데 전심전력하였다. 이 시기에 금시총집(金詩總集)이라 할 수 있는 《중주집(中州集)》을 편찬하였고, 역사 저작인 《임진잡편(壬辰雜編)》을 편찬함으로써 금대 역사자료의 보존에도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원호문이 남긴 〈논시절구삼십수〉는 7언시 형식으로 각종 시가풍격과 주요 시인들을 논평한 일종의 논시시(論詩詩)인데, 두보(杜甫)의 뒤를 이어 ‘시로써 시를 논하는[以詩言詩]’ 새로운 창작전통을 후대에 열어주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세상에 묻노니 정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삶과 죽음까지도 함께 하게 만드는가?[問世間 情是何物 直敎生死相許]” 〈모어아(摸魚兒)〉·〈안구(雁丘)〉
‧ “찬 물결은 잔잔하게 일렁이고, 흰 새는 유유히 내려오네.[寒波澹澹起 白鳥悠悠下]” 〈영정유별(穎亭留別)〉
‧ “하늘에게 만약 정이 있었더라면 하늘 역시 늙어버렸으리니, 세상 살아가자면 원래 오직 무정한 게 좋으리라.[天若有情天亦老 世間原只無情好]” 〈접련화(蝶戀花)〉
(2) 색인어:원유산(元遺山), 유산집(遺山集), 개봉본(開封本), 중주집(中州集), 상란시(喪亂詩), 논시절구삼십수(論詩絶句三十首)
(3) 참고문헌
‧ 遼金元詩歌史論(張晶 著, 吉林敎育出版社, 1995)
‧ 元好問及金人詩傳(章必功 著, 吉林人民出版社, 2000)
‧ 元好問硏究(李長生 著, 文史哲出版社, 1979)
‧ 元明詩槪說(吉川幸次郞 著, 鄭淸茂 譯, 幼獅文化事業公司, 1986)
【최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