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은 북송(北宋)시대 소옹(邵雍)(1012~1077)의 시집이다. 소옹은 이학(理學) 그리고 역학(易學)에 정통하였으며, 철리(哲理)를 말하는 대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앞일을 알 수 있었다고도 하는데, 이로 인하여 후세 점술가들이 그를 조사(祖師)로 추앙하기도 하였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소옹의 순수 유자의 본래적 모습을 감추려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더불어 북송오자(北宋五子)로 불리는 이학 분야의 큰 학자이다
2. 저자
(1) 성명:소옹(邵雍)(1011~1077)
(2) 자(字)·별호(別號):자(字)는 요부(堯夫), 호는 백원(百源), 안락선생(安樂先生), 이천옹(伊川翁)이고,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3) 출생지역:임현(林縣) 상간장(上杆莊)(現 하남성(河南省) 임주시(林州市) 소강촌(邵康村)). 일설에는 범양(范阳)(現 하북성(河北省) 탁주(涿州) 대소촌(大邵村))이라고도 한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소옹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공성(共城)(現 하남 휘현시(輝縣市))으로 이주했다. 16세 때 소문산(蘇門山) 백원(百源)에 거주하다가, 30세 이후 하남 지역에 머물고 이후 낙양에 거주하였다. 청년 시절 북해(北海)의 이지재(李之才)를 스승으로 모시며 도서선천학(圖書先天學)을 전수받았다. 그는 문왕역(文王易)을 후천역(後天易)이라 하고, 복희역(伏羲易)을 선천역(先天易)이라 하여 선천괘위도(先天卦位圖)를 그렸다. 그의 역학을 선천학이라고 한다. 후에 낙양(洛陽)에 정착하여 가르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당시 낙양에는 전임 재상이었던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저명한 시인 여공저(吕公著) 등이 퇴거하여 지내고 있었다. 이들은 소옹을 존경하여 자주 함께 노닐고, 나중에는 그를 위하여 천진교(天津橋) 근처에 동산이 딸린 집을 구입해주었다. 소옹은 그 집을 안락와(安樂窩)라 하고 스스로를 안락선생이라 하였다. 그는 여름과 겨울에는 칩거하여 독서하고, 봄과 가을에는 한 사람이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외출하였다고 한다.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 등에 천거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은거하다가 1077년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이천현(伊川縣)에 그의 무덤이 있다.
송 철종(宋哲宗) 원년(1086)에 강절(康節)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도종(度宗) 초에 문묘에 종사(從祀)되고 신안백(新安伯)에 추봉되었다. 명 세종(明世宗) 때 선유소자(先儒邵子)라고 존칭하였고, 청나라의 옹정(雍正) 2년(1724)에 그의 자손들에게 오경박사(五經博士)의 벼슬을 세습하게 하였다. 조선에서는 숙종 40년(1714)에 문묘 정전에 올렸다.
(5) 주요저작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62편),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2편), 《선천도(先天圖)》, 《어초문대(漁樵問對)》,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20권), 《매화시(梅花詩)》.
3. 서지사항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은 《정통도장(正統道藏)》 태현부(太玄部)에 들어있고,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것이 있는데, 이는 20권으로 되어 있고, 소옹의 서문(序文)이 있다. 서문을 쓴 것은 송 치평(治平) 병오(丙午)(1066) 중추일(仲秋日)로 되어 있으니 그의 나이 55세로 추정된다. 이외에 원우(元祐) 육년(六年) 신미(辛未)(1091) 유월(六月) 갑자(甲子) 십삼일(十三日) 원무(原武) 형서(邢恕)의 후서(後序)가 있다. 이를 저본으로 한 《이천격양집》이 단행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에 인쇄본과 필사본이 있다. 중국에서 간행된 최근의 것으로는 2003년 12월 학림출판사(学林出版社) 진명(陈明)의 점교(点校)본, 2013년 1월 중화서국(中华书局)에서 《伊川击壤集(精)》 중화국학문고(中华国学文库)로 곽욱(郭彧)이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 있다. 《이천격양집》의 국역본은 아직 없다.
4. 내용
소옹은 시를 즐겨 읊었는데, 그가 일생 지은 시는 3,000여 수라고 한다. 대부분 《이천격양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가 쓴 서문이 그의 나이 55세 때이고 그 후로 12년을 더 살았으니, 이후에 쓴 시가 《이천격양집》에 수록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20권 4책본에는 집외시(集外詩)라는 이름으로 14수가 추가 수록되어 있으나 이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그는 시로써 정(情)을 펴내고 뜻을 말하며 철학적 이치를 밝혀 서술했다. 그는 북송의 국력이 한창 왕성하고 경제가 크게 번영할 때 태어났다. 그의 시는 한가로움과 자유로움을 표현한다. 그는 자기의 거처 안락와(安樂窩)를 소재로 삼아 여러 수의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주제는 한가로움 편안함 그리고 즐거움이었다.
《이천격양집》의 ‘이천(伊川)’은 하남 낙양(洛陽)의 한 지명으로 소옹은 자신을 ‘이천옹’이라 했다. ‘격양(擊壤)’은 옛날에 있었던 일종의 던지기 놀이로서 딱딱한 작은 흙덩이나 돌덩이를 손으로 집어 멀리 있는 토루(土壘)에 던지는 놀이인데 과녁 맞추기와 비슷하다. 토루는 홍수나 외적을 막기 위하여 만든 토벽 또는 보루를 말한다. 나중에는 흙덩이나 돌덩이 대신에 화살이나 활을 사용하기도 했다. 대체로 사람들이 노동을 끝낸 다음 길가나 밭둑에서 여럿이 함께 참여하는 놀이로서, 흔히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그래서 후한 왕충(27-104)의 《논형(論衡)》 〈예증(藝增)〉에서는 “나이 오십이 되면 길에서 격양한다. 보는 사람들이 ‘크다. 요(堯)의 덕이여.[有年五十擊壤於路者 觀者曰 大哉 堯德乎]’라고 노래한다”라고 하였다.
《이천격양집》에 있는 서문에서 소옹은 나름의 시론을 펼친다. “이천옹의 스스로 즐긴 시이다. 단지 스스로 즐긴 것만이 아니라 또한 능히 때를 즐긴 것이요, 만물과 더불어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이천옹은 말한다.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시(詩)라는 것은 뜻[志]이 가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이 지이고 말을 하면 시가 된다. 정(情)이 속에서 움직여 말로 형용이 되고, 소리는 그 문(文)을 이루어 음(音)이라 한다. 이는 그 때를 회상할 수 있음을 알면 지라고 부르고 감각적인 물건을 정이라 부른다. 자기 지향을 표현하는 방식을 일러 어언(語言)이라고 하고, 자기 정서를 전파하는 것을 일러서 소리[聲]라고 하며, 어언을 격율과 조직에 맞추어 문장을 일으키면 시라고 한다. 성음(聲音)으로 조성된 문장을 음악(音樂)이라고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시를 듣고 그 음을 들으면 사람의 지향과 정회를 알 수 있다. 사람에게 칠정(七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요지는 두 방면으로 체현된다. 하나는 몸이고 다른 하나는 때이다. 자신이 감수한 것으로는 개인의 편안함과 근심 곧 휴척(休戚)과 관련된 내용이고, 때와 연관된 것으로는 폐색(閉塞)과 통태(通泰)이다. 한 몸의 편안함과 근심은 빈부귀천이고, 한 때의 막히고 통함[否泰]은 시대의 흥폐치란(興廢治亂)이다.”라고 하였다.
《이천격양집》 권1에는 〈관기대음(觀棊大吟)〉이라는 긴 시가 있다. 권2는 〈추일음정주송원시관성부주정숙(秋日飲鄭州宋園示管城簿周正叔)〉이 있고 권3은 〈하인치정(賀人致政)〉으로, 권20은 〈수미음(首尾吟)〉 135수로 시작한다. 이외에 나중 간사된 판본에는 집외시(集外詩)로 〈과비간묘(過比干墓)〉, 〈자견(自遣)〉 등 14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물관물(以物觀物)을 기본 태도로 삼아 선천세계(先天世界), 황왕제패(皇王帝伯)의 역사, 심성의 영역,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의 인간사, 바람·꽃·눈·달 등 자연물 등을 음영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송사(宋史)》에서는 소옹의 인물을 평하여 “맑으나 과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나 휩쓸리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와 사귐이 오래되면 더욱 존경하고 신뢰하였으니, 하남(河南)의 정호(程颢)가 그를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이라고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주희는 “정씨 형제와 소옹의 학문이 참으로 같지 않으나 두 정씨가 강절(康節)을 추존한 것이 지극하다. 그 도를 믿고 의혹하지 않았고, 이단에 물들지 않았으며, 온공(溫公)과 횡거(橫渠)의 사이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이덕무(李德懋)는 “소옹은 심사가 고명(高明)하고 덕행과 기국이 순수하였다. 시가 평이(平易)하고 혼융(渾融)하며 현묘한 깊은 이치에 들어갔다.”고 평하였다.
북송오자 중에서 소옹은 시가(詩歌) 영역에서 단연 뛰어나다. 소옹의 시는 대부분 철학적 이치를 말하고 있다. 시로써 철학적 이치를 말하는 것은 송대 이후 이학자(理學者)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는 이학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학이 도(道)를 중시하고 문(文)을 가볍게 여기는 이른바 ‘중도경문(重道輕文)’의 태도를 지녔다는 편견으로 인하여 시론가(詩論家)들은 《이천격양집》의 이학시적(理學詩的) 문학성취에 대해 그리 우호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철학적 이치를 분명하게 말할수록 종종 시적인 의미가 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 어떤 일을 갖고 그 도리를 매우 투철 명료하게 말할 때에 그 시는 어떤 조짐과 뉘앙스를 완전히 잃어버리기도 한다. 시의 어떤 주제를 확정하게 되면 이에 기초하여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게 된다. 뜻을 시로 말하는 것이 우선이고, 이치를 말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송 시절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이치를 주로 말하는 ‘강절체(康節體)’라는 말로 그를 다른 송시론자들과 나란히 거론함으로써 소옹이 지닌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이는 문학비평사에서 소옹 시가에 대한 첫 번째 자리매김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천격양집》은 송시 가운데 정격(正格)은 아니라는 평이 일반적이지만 송시 정신의 창건, 그 풍모의 형성 또한 중요한 촉진작용을 하였다.
《이천격양집》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애중되었다. 조선왕조 500년 기간 동안 성리학자들은 소옹의 철리를 표현한 시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선천세계뿐만 아니라 그의 안락 자재하는 삶을 동경하여 산림학자나 조정의 대관들도 그를 매우 존모하였다. 그의 〈수미음(首尾吟)〉을 모방하여 시를 지은 경우도 있고, 그의 시 전반을 사랑하여 자신의 시에 인용한 경우도 많다. 격양집 안에 있는 철학적 이치를 표현한 구절 등을 따서 경연이나 상소등에 활용하였고 정치적 학문적 학자들과의 담론의 소재로 활용하였다. 소옹은 도연명과 더불어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가장 존중하고 본받으려 한 시인이다. 서거정(徐居正), 신광한(申光漢),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조성기(趙聖期), 신흠(申欽), 송시열(宋時烈), 윤증(尹拯), 김창협(金昌協) 등 하나하나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학자들이 소옹의 《격양집》과 그의 《황극경세서》를 즐겨 읽었고 그 삶을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 효종(孝宗)은 1657년에 《격양집》 한 질을 송시열에게 하사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술을 마셔도 곤드레만드레 취하지는 말고, 꽃을 보아도 활짝 피어 떨어질 때는 피하라.[飮酒莫敎成酩酊 賞花愼勿至離披]” 《이천격양집》 권10, 〈안락와중음(安樂窩中吟)〉
• “지란은 심어도 잘 자라지 않고, 형극은 베어도 사라지지 않네. 두 가지 일 모두 어찌할 수 없어, 배회하노라니 해가 저물려 하네.[芝蘭種不榮 荊棘剪不去 二者無奈何 徘徊歲將暮]” 《이천격양집》 권16 〈감사음(感事吟)〉
• “비록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이 눈앞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운다 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사시의 바람 꽃 눈 달이 우리의 눈을 한번 스쳐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雖死生榮辱 轉戰於前 曾未入于胸中 則何異四時風花雪月一過乎眼也]” 《이천격양집》 〈소옹 서문(序文)〉
• “태극을 가지고 놀다가 틈이 나면 한가로이 왔다 갔다 하네.[弄丸餘暇 閑往閑來]”《이천격양집》 권12, 〈자작진찬(自作眞贊)〉
(2) 색인어:소옹(邵雍), 격양(擊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觀物), 안락(安樂)
(3) 참고문헌
• 四庫提要 集 別集類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 곽신환 저 《조선유학과 소강절 철학》 예문서원 2014년
• 高懷民 저 곽신환 역 原題 《邵子先天易哲學》 譯題 《소강절의 선천역학》 예문서원 2011년
•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10, 167-195
[곽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