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등신화(剪灯新話)》는 중국 명나라 때 구우(瞿佑)가 저술한 소설집이다. ‘전등신화’는 “등불의 심지를 잘라서 불을 밝혀가며 읽는 재미나고 새로운 이야기”란 뜻이다. 구우는 본래 〈전등록(剪燈錄)〉 40권을 엮었다고 하였지만 현재는 4권만 전하며, 단편소설 21편을 수록하였다. 홍무(洪武) 11년(1378) 무렵에 이루어졌다. 구우는 당나라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영향을 받아 괴이담(怪異談)을 지었는데, 염정(艶情)과 유현(幽玄)의 묘사가 뛰어나다. 본문은 고문체를 사용하면서, 각종 양식의 시가(詩歌)와 사륙변려문(四六駢儷文)의 산문을 삽입하였다.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널리 유행하여, 후대의 문체 연마에 교본이 되었다. 《금오신화》는 이 《전등신화》의 양식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2. 저자
(1)생몰년:구우(瞿佑)(1341~1427)
(2)자(字)·별호(別號):자는 종길(宗吉), 호는 존재(存齋)
(3)출생지역: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4)주요활동과 생애
14세 때부터 양유정(楊維楨)에게 시재(詩才)를 인정받았으나 관리로서는 불운하였다. 임안(臨安) 등의 지방 현에서 훈도를 지냈고, 국자감조교(國子監助敎) 등을 역임했다. 뒤에 주왕부 우장사가 되었으나 필화사건에 휘말려 섬서성(陝西省) 보안(保安)으로 유배되었다. 1425년 사면되어 귀향했다.
구우는 문필에 뛰어나 시문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귀전시화(歸田詩話)》 〈자서(自序)〉에는, 14세 때의 어느 날 부친의 친우 장언복(張彦復)이 찾아왔다가 그의 시재(詩才)를 높이 사 계화(桂花) 한 가지를 그린 다음 찬(贊)을 지어 넣어주었으며, 이에 부친이 기뻐하며 특별히 집안 한 곳을 정해 전계당(傳桂堂)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 문인 양유정(楊維楨)이 만년에 송강(松江)에 머물러 항주를 지나칠 때 구우의 숙부 구사형(瞿士衡)을 자주 방문하여 전계당에서 연일 술을 마시며 시 짓기를 즐겼는데, 양유정이 어린 구우의 시재에 놀라 “이 아이는 그대 가문의 천리마이다!”라며 찬탄했다고 한다. 시인 능운한(凌雲翰)도 구우가 하루 만에 자신의 2백수 매사(梅詞)·유사(柳詞)를 모두 화답하자 ‘나의 어린 벗’이라고 부르며 아꼈다고 한다. 하지만 《전등신화》와 《귀전시화》 외에는 전해오는 작품이 없다.
(5)주요저작:《귀전시화(歸田詩話)》
3. 서지사항
《전등신화》는 구우가 보안으로 귀양간 후 원고가 대부분 흩어져 없어졌으나, 사천성(泗川省) 포강(浦江)에서 벼슬하던 호자앙(胡子昻)이 남아있는 4권을 구하여 보안의 구우에게 교정을 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1420년 호자앙이 《전등신화권후기(剪燈新話卷後紀)》를 쓰고, 1421년 구우 자신이 발문을 지어, 구우의 조카 구섬(瞿暹)이 항주에서 간행 유포시켰다. 이것이 《전등신화》의 원본이다. 전체 4권이고 매권은 5편으로 되어 있으며 부록 1편까지 포함하여 모두 21편이다.
조선본(朝鮮本) 《전등신화》의 백문본(白文本)으로는 충남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판본이 있다. 명종(明宗) 연간에 나온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보다 앞서는 목활자본이다. 전4권, 부록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에는 ‘전등신화(剪燈新話)’ 네 글자를 썼고, 판형은 ‘사주단변(四周單邊), 유계(有界), 흑구상흑어미(黑口上黑魚尾), 반엽(半葉) 14행(行), 매행(每行) 18자’이다. 각 권마다 첫줄에 ‘전등신화(剪燈新話) 권지일(卷之一)’과 같이 기록하고 둘째 줄에 ‘전당(錢塘) 구우(瞿佑) 종길(宗吉) 저(著)’라고 저자명을 밝힌 후 셋째 줄에 작품의 제목을 실었다. 부록으로 〈추향정기(秋香亭記)〉 한 편을 실었다. 명간본의 번각(翻刻)인 듯하다. 일본(日本) 동양문고(東洋文庫)에는 이와 달리 상하내향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의 2권 2책 목판본이 있다.
4. 내용
《전등신화》 수록 단편은 다음과 같다.
권1:〈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 〈삼산복지지(三山福地志)〉, 〈화정봉고인기(華亭逢故人記)〉, 〈금봉채기(金鳳釵記)〉, 〈연방루기(聯芳樓記)〉.
권2:〈영호생명몽록(令狐生冥夢錄)〉, 〈천태방은록(天台訪隱錄)〉, 〈등목취유취경원기(滕穆醉遊聚景園記)〉, 〈모란등기(牧丹燈記)〉, 〈위당기우기(渭塘奇遇記)〉.
권3:〈부귀발적사지(富貴發跡司志)〉, 〈영주야묘기(永州野廟記)〉, 〈신양동기(申陽洞記)〉, 〈애경전(愛卿傳)〉, 〈취취전(翠翠傳)〉.
권4:〈용당영회록(龍堂靈會錄)〉, 〈태허사법전(太虛司法傳)〉, 〈수문사인전(修文舍人傳)〉, 〈감호야범기(鑑湖夜泛記)〉, 〈녹의인전(綠衣人傳)〉.
부록:〈추향정기(秋香亭記)〉.
《전등신화》의 언해본으로는 서울대학교 소장본, 단국대학교 소장본, 고려대학교 소장본, 서강대학교 소장본 등의 필사본이 있다. 서울대 소장본과 서강대 소장본은 같은 판본의 번역본이되, 서울대본은 13話, 서강대본은 4話를 수록하였다. 《전등신화》 원문의 21편 가운데 서울대본과 서강대본은 〈수궁경회록〉·〈삼산복지지〉·〈화정봉고인기〉·〈금봉채기〉 4편을 생략하였다.
[서울대 소장본] 〈모란등기〉, 〈위당기우기〉, 〈부귀발적사지〉, 〈영주야묘기〉, 〈신양동기〉, 〈애경전〉, 〈취취전〉, 〈용당영회록〉, 〈태허사법전〉, 〈수문사인전〉, 〈감호양범기〉, 〈녹의인전〉, 〈추향정기〉 등 13화.
[서강대 소장본] 〈연방루기〉, 〈영호생명몽록〉, 〈천대방음록〉, 〈등목취유췌경원기〉 등 4화.
《전등신화》 언해본은 한문 원문에 들어 있던 삽입시 가운데 많은 부분을 산절(刪節)하였다.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는 명종 연간에 임기(林芑)가 주로 구해(句解)하고 윤춘년(尹春年)의 자문을 받아 이루어졌다. 수호자(垂胡子) 임기의 〈전등신화구해발(剪燈新話句解跋)〉과 창주(滄洲) 윤춘년의 〈제주해전등신화후(題註解剪燈新話後)〉에 따르면, 원래 임기와 윤춘년이 함께 《전등신화》에 주석을 시작하였으나 윤춘년이 상을 당해 선성(宣城)(현 교하(交河))으로 나가자 임기가 단독으로 주해를 완성하였고, 1547년 예부영사(禮部令史) 송분(宋糞)에게 간행을 부탁하자 송분은 사정상 목활자(木活字)를 이용해서 1549년에 초간본을 냈다. 하지만 오탈자가 많아 환영받지 못했다. 후에 윤춘년이 교서관 제조가 되자 관원 윤계연(尹繼延)이 목판으로 다시 간행할 것을 품의(稟議)하였다. 임기는 초간본의 주해(註解)를 정리하고 윤춘년이 이를 정정(訂正)하여, 1559년 윤계연이 교서관(校書館)에서 목판으로 재간(再刊)하였다. 그 후 1564년 윤춘년이 〈제주해전등신화후(題註解剪燈新話後)〉를 쓰면서 한 차례 더 간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5. 가치와 영향
1380년 능운한은 《전등신화》 〈서(序)〉에서 “이것을 읽으면 사람들에게 기쁠 때는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게 하기도 하고 슬플 때는 책을 덮어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한다.”라고 했고, 1389년 목인계형(睦人桂衡)은 《전등신화》 〈시병서(詩幷序)〉에서 “거기에는 문(文)이 있고 시(詩)가 있고 가(歌)가 있고 사(辭)가 있고, 기뻐할 것이 있고 슬퍼할 것이 있고 놀랄 것이 있고 웃을 것이 있다는 것만 보인다.”라고 밝혔다. 《전등신화》는 이창기(李昌祺)[이정(李禎)]의 《전등여화(剪燈餘話)》(1420), 소경첨(邵景詹)의 《멱등인화(覓燈因話)》(1592) 등 후속작을 낳았고, 명나라 말의 통속소설집 《삼언이박(三言二拍)》과 청나라 초의 〈요재지이(聊齋志異)〉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에 일찍 유입되어, 이변(李邊)과 김시습(金時習) 등이 열람하였다. 김시습은 〈제전등신화후(題翦燈新話後)〉에서, 《전등신화》에는 시(詩)도 있고 소(騷)도 있고 기사(記事)도 있는데다가 유희와 골계가 차례가 있다고 하고, 굴원과 장주·한유·유종원의 문장을 뛰어넘는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시에서는 “김정(金定)과 취취(翠翠)의 무덤 앞에는 시내와 산이 아름답고, 나애애(羅愛愛)와 조륙(趙六)의 집에는 이끼와 풀이 가늘구나. 취경원(聚景園) 밖에는 연꽃 향기 멀리 풍기고, 추향정(秋香亭) 가에는 달빛이 밝도다.”라고 하여, 《전등신화》의 인물과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도 《전등신화》 소설의 양식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명종 연간에 임기는 《전등신화》 원문에 단구(斷句)를 하고 주해(註解)하여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를 엮고, 윤춘년의 감수를 거쳐 목활자본과 목판본의 2종으로 간행하였다. 낙선재본 《태평광기언해》에는 《태평광기》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등신화》와 《전등여화》 속의 이야기도 함께 언해하여 수록하였다.
한편 《전등여화》도 세종 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주석에 인용될 만큼, 일찍 조선에 수용되었다. 1505년 연산군은 《전등신화》와 《전등여화》 등 서너 종의 전기소설을 사은사(謝恩使)에게 사오도록 하였는데, 《전등신화》와 《전등여화》가 합본되어 있는 《중증전등신화(重增剪燈新話)》를 열람한 후 주해를 하여 간행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연산군의 폐위로 중앙에서의 인쇄와 주해는 완료되지 못한 듯하다. 다만 어숙권(魚叔權) 《고사촬요(攷事撮要)》의 〈팔도책판(八道冊板)〉에는 전라도 순창(淳昌)에 《전등여화》의 판목(板木)이 있다고 되어 있다. 《전등여화》의 부록 《가운화환혼기(賈雲華還魂記)》는 조선후기에는 《빙빙전》으로 번안되어 유포되기도 하였다.
《전등신화》는 4언의 가지런한 구를 많이 사용하여, 초학자의 한문 연습과 아전들의 문서 작성 연습에 응용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시골에서는 유생들이 향시에 대비하여 문체를 연마하거나 아전들이 공문서 문체의 숙련을 위해서 《전등신화》를 많이 읽었다. 심로숭(沈魯崇)의 글을 보면, 경상도 기장(機張)의 학생들이 《전등신화》의 〈천태방은록〉과 〈용당영회기〉 두 편을 천 번 읽는 방법으로 향시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후기의 향촌에서 《전등신화》를 널리 읽은 사실은 이옥(李鈺)(1760~1815)이 자신의 〈필영상사(必英狀辭)〉라는 글에 붙인 식어(識語)에서도 확인된다. 이옥은 궁벽진 시골 동자들 가운데 《전등신화》를 공부하는 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필영의 장첩을 대강 베껴내고 어구를 고쳤다고 하였다. 《전등신화》는 조선의 궁중 귀족들과 사대부들 그리고 평민들의 독서물로도 애호되었다.
《전등신화》는 조선을 경유하여 일본에 전하여 경장(慶長) 연간(1596~1615)에 번각본이 나왔다. 《전등신화구해》도 일본에 전하여, 일본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사이 료이(浅井了意)의 《오토키보코(伽婢子)》나, 〈모란정기(牡丹灯記)〉에 기초한 삼유정원조(三遊亭圓朝)의 〈모란정롱(牡丹灯籠)〉은 《전등신화》의 번안(翻案)이다. 또한 《전등신화》는 베트남 완서(阮嶼)의 《전기만록(傳奇漫錄)》에도 영향을 주었다. 《전등신화》는 중국 청나라에서는 그리 읽히지 않았으나, 일본의 판본이 1917년에 동강(董康)에 의해 번각(翻刻)되어 중국에 거꾸로 수입되었다.
6. 참고사항
(1)명언(줄거리)
• 유생 여선문(余善文)은 남해 광리왕(廣利王)의 초청을 받는다. 영덕전(靈德殿)의 상량문(上梁文)을 지어 올리고 글 값으로 야광주(夜光珠)와 통천서각(通天犀角)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다. 보물을 팔아 큰 재산을 얻었지만 부귀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을 돌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종적을 감추었다. 〈수궁경회록(水宮慶會錄)〉
• 유취취와 김정(金定)은 동갑내기로 서당을 함께 다니며 사랑했다. 김정은 가난하였으나 유씨 집에서는 예를 갖추어 그를 데릴사위로 맞았다. 1년이 못되어 장사성의 난으로 두 사람은 헤어지고 김생은 이장군의 첩이 된 취취를 재회한다. 그는 상심 끝에 병들어 죽고 이어 취취도 병들어 김생의 묘 왼쪽에 묻힌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을 죽음으로 완성한다. 〈취취전(翠翠傳)〉
(2)색인어:전등신화(剪燈新話), 구우(瞿佑), 전등여화(剪燈餘話), 멱등인화(覓燈因話), 금오신화(金鰲新話), 김시습(金時習), 전등신화구해(剪燈新話句解), 임기(林芑), 윤춘년(尹春年), 아사이 료이(浅井了意), 오토키보코(伽婢子), 전기만록(傳奇漫錄)
(3)참고문헌
• 剪燈新話 外二種(周夷 校注, 典文學出版社)
• 剪燈新話 外二種(周楞伽 校注, 上海古籍出版社)
• 剪燈新話(飯塚朗 譯, 平凡社東洋文庫48, 平凡社)
• 剪燈新話(竹田晃·小塚由博·仙石知子 譯·注解, 明治書院, 中國古典小說選 8卷)
• 금오신화(심경호, 홍익출판사)
• 剪燈新話句解(정용수 역주, 푸른세상)
• 剪燈新話(周夷 校注, 古典文學出版社出版)
• 전등삼종(최용철, 소명출판)
• 전등신화(최용철·박재연·우춘희 역주, 학고방)
• 전등신화 서강대본(이재홍 역주, 선문대학교 중한번역문헌 연구소)
【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