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왕수인은 양명학(陽明學)의 개창자로 처음에는 정주학(程朱學)을 종주로 삼다가 뒤에 육구연(陸九淵)을 신봉하였다. 《전습록(傳習錄)》은 명(明)나라 왕수인(王守仁)의 어록과 그가 제자들과 학문을 논한 편지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致良知) 등 양명학의 근본 사상을 알 수 있는 기본 전적이다.
2. 저자
(1)성명:왕수인(王守仁)(1472~1528)
(2)자(字)·별호(別號):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
(3)출생지역:절강성(浙江省) 여요현(余姚縣)
(4)주요활동과 생애
1499년 진사가 되어 형부주사(刑部主事)에 임명되었다. 35세 되던 해, 효종(孝宗)이 죽고 무종(武宗)이 즉위하자 환관 유근(劉瑾) 일당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 때 대선(戴銑)과 박언휘(朴彦徽)가 유근을 규탄하다 하옥되었는데, 왕수인이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소(疏)를 올렸다가 오히려 장형(杖刑)을 받고 귀주성(貴州省)의 용장(龍場)으로 좌천되었다. 용장에서의 경험은 왕수인 사상 형성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주자의 학설은 리(理)와 심(心)을 둘로 나눈 것이 잘못이라고 하여 심즉리(心卽理)로 수정할 것을 주장하였고, 지(知)와 행(行)도 본래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역설하였다.
유근이 죽자 여릉현지사(廬陵縣知事)가 되었고, 이후 비적(匪賊)을 토벌하고, 영왕(寧王) 신호(宸濠)를 토벌하는 등 군사 업무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동시에 사상마련(事上磨鍊), 치양지(致良知), 사구교(四句敎) 등 그의 핵심 사상을 정립하였다.
왕수인은 각종 민란과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전장을 떠돌았는데, 그것이 병든 몸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고 결국 1528년 지병이던 폐질환이 재발해 사망했다.
(5)주요저작:《대학문(大學問)》, 《대학고본방석(大學古本旁釋)》, 《주자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 《왕문성공문집(王文成公文集)》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전습록》은 왕수인이 47세 되던 해(1518) 7월에 문인 설간(薛侃)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설간은 서애(徐愛)의 기록 14조, 제언(題言), 발문(跋文)과 육징(陸澄)의 기록 80조, 자신의 기록 35조를 합하여 간행하였다. 6년 뒤 왕수인이 53세 되던 해(1524)에 문인 남대길(南大吉)이 앞서 간행된 《전습록》을 상책(上冊)으로 하고 왕수인의 논학서(論學書)를 하책(下冊)으로 하여 상하 두 책으로 다시 간행하고 추후에 보충하였다. 이후 왕수인이 세상을 떠난 28년 되던 해(1556) 전덕홍(錢德洪)이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고 앞의 상·하권을 상·중권으로 편집한 뒤, 새로 보충된 내용을 하권으로 하여 현행의 《전습록》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4. 내용
‘전습(傳習)’이란 말은 《논어(論語)》 〈학이(學而)〉 4장의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또는 익히지 않은 것을 전했는가?)[傳不習乎]”에서 따온 말이다. 《전습록》의 상권은 왕수인의 전기사상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문인들의 왕수인의 사상에 대한 이해나 왕수인의 답변은 모두 완숙되지 못한 형태를 보인다. 중권은 어록 형태인 상하권과 달리 서간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수인 만년의 성숙한 사상이 조리 정연하게 서술된 글들이다. 하권은 왕수인 만년에 모여든 제자들의 어록이 수록되어 있다. 왕수인 심학의 본령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왕수인은 송대 육구연이 주장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설(致良知說) 등으로 발전시켜 심학(心學)을 완성시켰다. 왕수인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래의 마음[양지(良知)]이 바로 선천적 도덕 원리인 천리(天理)라고 보았다. 그 마음 밖에 또 다른 이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앎과 행동이 함께 중요하며 동시에 구현되어야 한다는 지행합일을 강조하였다. ‘치지(致知)’는 《대학》에서, ‘양지(良知)’는 《맹자》에서 나온 말인데, 왕수인은 이를 결합하여 ‘치양지’를 주장하였다.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인간의 본래 능력인 ‘양지’를 제대로 구현하면 올바른 실천이 된다는 점에서, ‘치양지’는 바로 ‘지행합일’의 의미를 갖는다.
5. 가치와 영향
왕수인은 생전에 도처에서 강학하였기 때문에 중국 각지에 제자들이 있었다. 절중(浙中)의 서애(徐愛)·전덕홍(錢德洪)·왕기(王畿), 강우(江右)의 추수익(鄒守益)·섭표(聶豹)·나홍선(羅洪先), 월민(粤閩)의 설간(薛侃), 태주(泰州)의 왕간(王艮)·나근계(羅近溪)가 대표적인 제자이다.
제자들 간에는 양지(良知)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어 이들에 의해 양명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양명학은 명대 사상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나, 청대에 들어 급격히 쇠락하였다. 그러나 현대 신유학의 등장에 따라 웅십력(熊十力), 모종삼(牟宗三) 등의 학자에 의해 다시 조명되었다.
조선에는 대략 중종(中宗) 16년(1521) 이전에 《전습록》이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선조(宣祖)의 경우 양명학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황(李滉)이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쓴 이후로 양명학은 조선에서 이단사설로 배척당했다.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해 양명학에 대한 연구가 근근이 이어지다가, 정제두(鄭齊斗)에 이르러 양명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정제두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정립된 한국 양명학은 정제두가 강화로 은거한 뒤에 계승되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하였다. 이광사(李匡師) 일족과 정제두의 아들인 정후일(鄭厚一), 정제두의 외손인 신작(申綽) 등이 주요 인물이다. 주로 가학으로 이어지던 한국 양명학은 근대에 들어 박은식(朴殷植)과 정인보(鄭寅普)에 의해 계승되었다.
일본에서 양명학은 에도시기의 대표적 주자학자였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에 의해 처음 수용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명학이 연구된 것은 나카에 도주(中江藤樹)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문하의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 등을 통해 발전되었다.
6. 참고사항
(1)명언
• “몸을 주재하는 것이 마음이며, 마음이 발동한 것이 생각이며, 생각의 본체가 곧 앎이고, 생각이 있는 곳이 곧 물(物)이다. 만약 생각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다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物)이다.[身之主宰便是心 心之所發便是意 意之本體便是知 意之所在便是物 如意在於事親 卽事親便是一物]” 권 상(上) 〈서애록(徐愛錄)〉
• “마음 밖의 이치가 없으며, 마음 밖의 사물이 없다.[無心外之理 無心外之物]” 권 상(上) 〈서애록(徐愛錄)〉
• “무릇 사람은 반드시 먹고자 하는 마음이 있은 뒤에야 음식에 대해 알게 된다. 먹고자 하는 마음이 곧 의향이며 바로 행위의 시작이다. 음식 맛의 좋고 나쁨은 반드시 입에 넣은 뒤에야 알게 된다. 어찌 입에 넣어 보지도 않고 음식 맛의 좋고 나쁨을 먼저 알 수 있겠는가?[夫人必有欲食之心 然後知食 欲食之心卽是意 卽是行之始矣 食味之美惡 待人口而後知 豈有不待入口 而已先知食味之美惡者邪]” 권 중(中) 〈답고동교서(答顧東橋書)〉
• “양지(良知)가 바로 도(道)이다. 양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성현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夫良知卽是道 良知之在人心 不但聖賢 雖常人亦無不如此]” 권 중(中) 〈우(又)〉
(2)색인어:전습록(傳習錄), 왕양명(王陽明), 왕수인(王守仁),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치양지(致良知), 사구교(四句敎), 사상마련(事上磨鍊)
(3)참고문헌
• 王陽明全集(上海古籍出版社)
• 王陽明 傳習錄 詳註集評(陳榮捷 撰, 臺灣學生書局)
• 新譯 傳習錄(李生龍 注譯, 三民書房)
• 전습록(정인재·한정길 譯註, 청계)
• 신완역 전습록(김학주 역, 명문당)
• 내 마음이 등불이다:왕양명의 삶과 사상(최재목, 이학사)
• 조선의 양명학(中純夫 著, 이영호 외 共譯,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이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