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돈이집(周敦頤集)》은 중국 송대(宋代) 도학(道學)의 비조(鼻祖)로 꼽는 주돈이(周敦頤)의 문집(文集)이다.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는 《주돈이집》은 본문 3권과 부록 3권으로 편집된 중화서국(中華書局)본이다.
2. 저자
(1) 성명:주돈이(周敦頤)(1017~1073). 원래 이름은 돈실(惇實), 후에 영종(英宗)의 옛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돈이(敦頤)로 개명
(2) 자·별호: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
(3) 출생지역:도주(道州) 영도(營道)(現 호남성(湖南省) 영릉현(零陵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주돈이는 북송(北宋) 진종(眞宗) 천희(天禧) 원년(1017)에 태어나 신종(神宗) 희녕(熙寧) 6년(1073)에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돈이의 사승과 학맥은 뚜렷하지 않으며, 주로 자득(自得)한 것으로 보인다. 15세(1031)에 부친 주보성(周輔成)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을 따라 고향 영도현에서 외숙 정향(鄭向)이 있는 개봉(開封)으로 이거하여 성장했다.
20세(1036)에 장작감(將作監)의 시용주부(試用主簿)로 관직에 첫발을 내딛었다. 24세(1040)에는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現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수수현(修水縣))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분녕현 주부로 있을 때 오랫동안 미결로 남아 있는 의안(疑案)을 단번에 해결함으로써 고을 사람들의 경탄과 현령(縣令)의 인정을 받았다. 능력을 인정받은 주돈이는 부사(部使)의 추천으로 28세(1044)에 남안군(南安軍)(現 강서성 대여현(大餘縣)) 사리참군(司理參軍)이 되었다. 29세(1045)에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무고한 죄수를 죽이려는 전운사(轉運使) 왕규(王逵)에게 끝까지 대항하며 죄수의 목숨을 지켜냈다.
30세(1046)에는 정향(程珦)이 그의 기상(氣象)이 남다른 것을 알아보고 결교(結交)하고, 아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에게 주돈이를 스승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38세(1054)에는 대리사승(大理寺丞)으로 홍주(洪州) 남창현(南昌縣)(現 강서성 남창시) 지현(知縣)이 되었다. 그는 지방 수령이 되자 법과 원칙을 엄정하게 적용하여 부와 권력을 소유한 채 불법과 비리를 자행하며 백성들의 삶을 피폐케 하는 교활한 무리들을 과감하게 척결하였다. 한편 이 해에 그는 갑자기 죽었다가 하루 만에 되살아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목도했던 반흥사(潘興嗣)(1023~1109)에 따르면, 당시 주돈이가 가진 것이라곤 평소 입던 옷가지를 담은 낡은 상자 하나와 얼마 되지 않은 돈뿐이었다고 한다.
40세(1056)에 주돈이는 합주(合州)(現 중경시(重慶市) 합천(合川)) 첨판(僉判)으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4년 동안 거주하였다. 45세에는 건주(虔州)(現 강서성 공주(贛州)) 통판(通判)이 되었다. 부임하는 길에 그는 강주(江州)(現 강서성 구강(九江))를 지나며 여산(廬山)의 풍경을 사랑하여 그곳에 땅을 사 집을 짓고 복거(卜居)의 뜻을 두었다. 54세(1070)에는 광남동로(廣南東路) 제점형옥(提㸃刑獄)으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관대하게 대하며, 비록 전염병이 창궐하는 궁벽한 벽지라도 힘들다고 꺼리는 일 없이 찾아다니며 일을 처리하다 병을 얻기도 하였다. 환로에서 자신의 인생을 매우 적극적으로 개척하던 주돈이는 신종(神宗) 희녕(熙寧) 6년(1073)에 향년 57세로 구강(九江)에서 숨을 거두었다.
주돈이 사후 남송(南宋) 영종(寧宗)은 가정(嘉定) 13년(1220)에 주돈이에게 ‘원공’元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고, 이종(理宗)은 순우(淳祐) 원년(1241)에 그를 여남백(汝南伯)에 봉하고 공자(孔子)의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였다.
(5) 주요 저작:지금 전하는 주돈이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주요 작품으로는 〈태극도(太極圖)〉·〈태극도설(太極圖說)〉·《통서(通書)》 외에 〈양심정설(養心亭說)〉, 〈애련설(愛蓮說)〉, 〈졸부(拙賦)〉 등을 들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태극도설〉 249자, 〈통서〉 2,832자, 기타 시문(詩文)·서간(書簡)·제기(題記) 3,143자, 그리고 〈태극도〉 표주(標注) 24자 등을 합쳐 도합 6,248자에 불과하다.
3. 서지사항
《주돈이집》은 《주자전서(周子全書)》, 《주염계선생전집(周濂溪先生全集)》, 《주염계집(周濂溪集)》, 《주원공집(周元公集)》 등 다양한 표제가 붙어 있지만, 모두 주돈이의 저작을 모아 엮은 문집이다. 《주돈이집》은 그의 생전에 편찬된 적이 없고, 사후 이정(二程)의 일부 문인들이 〈태극도〉, 〈태극도설〉, 〈통서〉 등을 전사(傳寫)하거나 편집 간행하다가, 남송 순희(淳熙) 6년(1179)에 이르러 주희(朱熹)가 남강(南康)에서 태극도설과 통서를 교정하고, 유문(遺文) 9편, 유사(遺事) 15조, 사상(事狀) 1편을 수집 교정하여 출간하였다.
명실상부한 주돈이 문집의 편찬과 간행은 남송 순희 16년(1189)에 섭중개(葉重開)가 간행한 용릉속본(舂陵續本) 《염계집(濂溪集)》이나, 섭중개의 《염계집》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 후 주돈이 저작은 〈통서〉·〈태극도〉·〈태극도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문과 서신, 기타 유문(遺文) 그리고 생평(生平)·교유·일사(逸事) 등의 기록을 함께 모으고, 주돈이와 교유했던 인물들의 창화(唱和)와 후대 학자들의 각종 기문(記文)·제문(祭文) 등을 모두 수록한 체제로 간행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일치(蕭一致)가 간행한 7권본 《염계선생대성집(濂溪先生大成集)》이다. 이 책 역시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대성집은 다시 역통(易統)이 간행한 《염계선생대전집(濂溪先生大全集)》의 편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대전집은 대성집을 평향(萍鄕)(現 강서성 평향)에서 중간한 것으로 남송 이종(理宗) 소정(紹定) 원년(1228) 경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남송 말기에 편찬 간행된 《주돈이집》 중에 완전한 문헌으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원공주선생염계집(元公周先生濂溪集)》(12권)으로 현재 중국국가도서관(中國國家圖書館)에 소장되어 있고, 근래 영인본이 출간되어 유통되고 있다. 주돈이집의 편찬과 간행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취급되는 이 책은, 세가(世家), 연표(年表) 1권, 본문 12권으로 구성되었으며, 남송 도종(度宗) 연간(1265~1274)에 강서 구강에서 주희의 후학이 편찬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중화서국본 주돈이집은 권3, 부록3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태극도와 태극도설, 권2에는 통서, 권3에는 잡저(雜著)를 수록하였다. 태극도와 태극도설 그리고 통서에는 각각 주희의 해설과 후서(後序) 등이 덧붙어 있다. 잡저는 다시 문(文), 서(書), 부(賦), 시(詩), 제명(題名)으로 분류하여 해당 작품을 수록하였다. 부록1에는 주돈이의 전기(傳記)와 묘지명(墓誌銘), 묘갈명(墓碣銘), 사상(事狀), 연보(年譜) 등을 수록하였고, 부록2에는 송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후대 유자들의 통서와 염계문집에 대한 각종 서(序), 발(跋)을 수록하였다. 부록3에는 송대 주진(朱震)부터 청대 모기령(毛奇齡)에 이르기까지 태극도와 관련된 몇 가지 자료를 수록하였다.
4. 내용
《주돈이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대표작을 꼽자면 단연 〈태극도〉와 〈태극도설〉 그리고 〈통서〉일 것이다. 〈태극도〉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으로부터 “만물화생(萬物化生)”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도상(圖像)으로 제시하고 있다. 〈태극도설〉은 “무극이태극”으로부터 “만물화생”까지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태극도〉에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인간, 성인, 수양 그리고 생사의 문제까지도 간요하고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
〈통서〉는 주돈이가 자신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필기(筆記) 혹은 독서후기(讀書後記)로 볼 수 있으며, 《주역》에 대한 그의 이해와 해석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주역》에 대한 그의 이해와 해석은 선유(先儒)들의 주소(注疏)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기존의 성과에 대한 학습보다는 자신의 이해에 더 충실하다. 《중용》 역시 통서의 사상적 기반 중 하나인데, 성명지도(性命之道)에 대한 탐색과 성(誠)과 성(聖)에 대한 천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애련설은 120자에 불과한 단편 산문이지만 산뜻한 서술과 깊은 여운으로 주돈이 산문의 백미로 꼽는다. 47세(1063)에 지은 이 단편은 그가 건주(虔州) 통판(通判)으로 재임할 때 여산에 염계서당을 짓고 그곳에서 지은 것이다. 문학적 아름다움과 철학적 여운 그리고 인격적 이상이 잘 어우러진 작품으로, 북송 시대 고문운동의 영향이 크고 작자의 문예론인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원칙이 잘 녹아 있다.
5. 가치와 영향
《주돈이집》에 수록된 〈태극도〉와 〈태극도설〉은 송대 도학의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 것으로, 우주생성론, 인간론, 수양론 등 철학의 제반 영역을 아우르며,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세계 이해와 해석의 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제시된 우주론과 인간론, 수양론 등은 송대 신유학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남송 이후 약 700여 년에 걸쳐 동아시아인들의 세계 이해와 해석의 주류 담론이 되었다.
〈통서〉는 중당(中唐)시대 이고(李翶)(772~841)로 대표되는 유학의 맥을 이으며 송대 신유학의 문호를 연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주돈이의 문학 작품은 광풍제월(光風霽月)로 표상되는 그의 인격과 기상이 맑고 깨끗하게 빛나며 후대 학자들의 이상적 인격과 수양의 한 유형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성인은 하늘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이 되기를 바라며,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바란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 〈통서(通書) 지학(志學)〉
• “움직이면 고요하지 않고, 고요하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물이다. 움직이되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되 고요함이 없는 것은 신(神)이다. 움직이되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되 고요함이 없는 것은, 움직이지 않거나 고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물은 통하지 않지만, 신은 만물을 묘합한다.[動而無靜 靜而無動 物也 動而無動 靜而無靜 神也 動而無動 靜而無靜 非不動不靜也 物則不通 神妙萬物]” 〈통서(通書) 동정(動靜)〉
•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탕에서 피어나지만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텅 비어 통하고 겉은 곧으며, 넝쿨지어 있지도 가지를 뻗지도 않고, 향기는 거리가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우뚝 서 있으니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희롱할 수는 없음을 사랑한다.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予獨愛蓮之出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妖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玩焉 予謂菊 花之隱逸者也 牡丹 花之富貴者也 蓮 花之君子者也]” 〈애련설(愛蓮說)〉
• “교묘한 사람은 말이 많지만 졸박한 사람은 말이 없다. 교묘한 사람은 애쓰지만 졸박한 사람은 편안하다. 교묘한 사람은 해를 끼치지만 졸박한 사람은 덕을 쌓는다. 교묘한 사람은 흉하고 졸박한 사람은 길하다. 오호라! 천하가 졸박하면 형벌과 정령이 사라지고, 윗사람은 편안하고 아래 사람은 순순하며, 기풍은 맑아지고 폐단은 사라질 것이다.[巧者言 拙者黙 巧者勞 拙者逸 巧者賊 拙者德 巧者凶 拙者吉 嗚呼 天下拙 刑政徹 上安下順 風清弊絶]” 〈졸부(拙賦)〉
(2) 색인어:주돈이(周敦頤), 주돈이집(周敦頤集), 태극도(太極圖),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 애련설(愛蓮說)
(3) 참고문헌
• 周敦頤集(中華書局)
• 元公周先生濂溪集(書目文獻出版社)
• 〈宋刻本 元公周先生濂溪集 一考〉(소현성, 中國學報 56집)
• 〈주돈이 저작의 간행과 권위의 형성에 대한 문헌 해석학적 연구〉(소현성, 東洋哲學硏究 46집)
• 〈주돈이 사상의 이해를 위한 몇 가지 단서〉(소현성, 東洋哲學硏究 54집)
【소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