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진천문집(震川文集)》은 명대(明代) 중·후기 문학가 귀유광(歸有光)의 문집이며, 진천(震川)은 그의 별호이다. 귀유광은 서정적인 산문으로 유명하며, 특히 어머니·아내·자식 등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한 문장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귀유광은 명대 제일의 문장가로 평가되었으며, 청대(淸代) 동성파(桐城派)에 의해 근조(近祖)로 추종되었다.
2. 저자
(1) 성명:귀유광(歸有光)(1506~1571)
(2) 자(字)·별호(別號):자는 희보(熙甫) 또는 개보(開甫), 별호는 진천(震川) 또는 항척생(項脊生)
(3) 출생지역:소주부(蘇州府) 곤산현(崑山縣) 선화리(宣化里)(현 중국 강소성(江蘇省) 곤산시(崑山市) 선화방(宣化坊)
(4) 주요활동과 생애
귀유광은 10세 때 처음으로 〈걸혜론(乞醯論)〉을 짓고 14세에 동자시(童子試)에 합격하면서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또 고문(古文)과 팔고문(八股文)에도 대가였지만 평생 6차례의 향시(鄕試)와 9차례의 회시(會試)를 보러 다니느라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다. 중앙에 진출하지 못하고 동남지역 지방 문인으로만 활동했지만, 평생 독서에 매진하여 경학(經學)과 사학(史學), 도학(道學), 그리고 당송(唐宋) 산문에 두루 뛰어났다. 60세에 진사가 되어 절강성(浙江省) 장흥지현(長興知縣)으로 부임했고, 모함을 받아 3년 만에 순덕통판(順德通判)으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에 남경태복시 시승(南京太僕寺寺丞)으로 발탁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찬수하게 되지만, 일 년이 채 안 되어 향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소재로 가족과 친구에 대한 진실한 감정을 그대로 서술하여 감수성이 풍부한 많은 명문을 남겼다. 그의 문장에는 특별히 정치부패와 과거제도에 대한 비판이 많았는데, 그는 그 원인이 팔고문(八股文)에 있다고 진단했다. 독서인들이 직접 경전과 고전을 읽고 성인의 도리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간단하게 정리된 팔고문 작성법만 공부하기 때문에 무능하고 부패한 관리가 양산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육경(六經)을 중심으로 《사기(史記)》·《한서(漢書)》 등 역사문장과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 심지어는 송(宋)·원(元)의 문장까지 폭넓게 공부하여 학문의 근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주요저작:《진천문집(震川文集)》 외에 《역경연지(易經淵旨)》 2권, 《삼오수리록(三吳水利錄)》 4권, 《토원잡초(兔園雜抄)》 10권이 있다. 평선집(評選集) 《문장지남(文章指南)》이 필사본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데, 후인의 위작으로 의심된다.
3. 서지사항
귀유광의 문집은 4종의 판본이 있다. 첫째, 가장 빠른 판본인 민본(閩本)은 귀유광의 제자 왕자경(王子敬)이 복건성(福建省) 건녕(建寧)에서 판각한 것이다. 상·하권으로 구성되었는데 널리 유포되지 못했다. 둘째, 곤산본(崑山本)은 귀유광의 아들 자우(子祐)와 자녕(子寧)이 곤산(崑山)에서 판각한 것이다. 모두 32권, 총 350여 편의 문장인데 함부로 수정하여 좋은 판본이 못 된다. 셋째, 상숙본(常熟本)은 귀유광의 친척 귀도전(歸道傳)이 상숙(常熟)에서 판각한 것이다. 모두 20권에 편수는 곤산본과 같이 350여 편이지만, 100여 편은 곤산본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각본(家刻本)이 있는데, 귀유광의 증손인 귀장(歸莊)이 청대(淸代) 강희제(康熙帝) 때에 새로 판각한 전집이다. 문집 30권에 별집 10권, 척독(尺牘)과 고금시(古今詩)를 제외하고 596편의 문장이 있는데, 곤산본과 상숙본의 차이를 교정한 가장 좋은 판본이다. 교정은 먼저 전겸익(錢謙益)과 귀유광의 손자인 귀창세(歸昌世)가 시작했고, 이후 귀장과 조카인 귀개(歸玠)가 이어 작업에 참여했다. 현재의 《사부총간(四部叢刊)》본과 《사부비요(四部備要)》본은 모두 이를 원본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 때는 피휘법(避諱法)이 엄격하여 황제 관련 글자뿐만 아니라 이(夷)·적(狄)·호(胡)·로(虜) 등의 글자도 일률적으로 삭제된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가경(嘉慶) 원년(1796) 옥약당(玉鑰堂)에서 이를 다시 교정하여 《진천선생대전집(震川先生大全集)》을 간행했고, 이를 원본으로 1981년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에서 교점본(校點本) 《진천선생집(震川先生集)》이 출판되었다. 2015년 상해인민출판사(上海人民出版社)에서 경·사·자·집(經)·史·子·集으로 분류하고 또 《역경연지(易經淵旨)》·《삼오수리록(三吳水利錄)》·《토원잡초(兔園雜抄)》 등의 저술까지 포괄하여 《귀유광전집(歸有光全集)》이 출판되었다.
4. 내용
《진천문집》 30권의 구성을 보면 경해(經解)(9), 서(序)(30), 논(論)·의(議)·설(說)(22), 잡문(雜文)(13), 제발(題跋)(31), 서(書)(34), 증송서(贈送序)(63), 수서(壽序)(76), 기(記)(57), 묘지명(墓志銘)(57), 권조지(權厝誌)·생지(生誌)·광지(壙誌)(9), 묘표(墓表)(7), 비갈(碑碣)(13), 행장(行狀)(8), 전(傳)(21), 보(譜)·세가(世家)(5), 송(頌)·명(銘)·찬(贊)(15), 제문(祭文)·애뢰(哀誄)(31) 총 50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별집 10권은 응제론(應制論)(13), 응제책(應制策)(4), 제고(制誥)·주소(奏疏)·책문(策問)(11), 지(志)(5), 송사논찬(宋史論贊)(22), 기행(紀行)(4), 소간(小簡)(78), 공이(公移)·언사부(讞辭附)(13), 고금시(古今詩)(86) 총 236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집의 구성은 전겸익(錢謙益)이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소식(蘇軾) 세 사람의 문집을 참고한 것이다.
권1 경해는 경학 관련 문장으로 당시 경학 중시 현상을 보여준다. 권2 서(序)와 권5 제발은 다양한 서문과 발문으로 문학 사상이 잘 드러나 있고, 권3 논·의·설과 권4 잡문은 의론문으로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권6~8 서(書)는 관리와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주로 정치·경제에 관한 견해나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권9~11 증송서, 권12~14 수서, 권18~21 묘지명은 모두 196편으로 전체 산문 651편 중 약 30%를 차지하는데, 대부분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쓴 것이므로 내용이 단조롭고 평가도 높지 않지만, 종종 가족과 친구에 관한 글은 진실하고 감동적이다. 권15~17 기(記)는 주변의 사소한 것을 제재로 서정적인 문장을 많이 창작하여 명문이 많다. 권25 행장은 대부분 친지를 위한 것인데 그중 어머니의 생전 모습을 적은 〈선비사략(先妣事略)〉이 가장 유명하다. 권26 전(傳)은 주로 주변 보통사람들에 관한 것이고, 권27 전(傳)은 열녀전이다. 권28 보·세가에는 종족관념이 드러나 있고, 권29 송·명·찬은 건물에 관한 것이 많으며, 권30 제문·애뢰에는 개인뿐만 아니라 기우제에 관한 것도 들어있다. 별집 권1~3까지는 모두 과거(科擧) 응시문장이고, 권4 지(志)는 마정지(馬政志)로서 말 행정에 관한 전문서이며, 권5 송사논찬은 《송사(宋史)》 관련 저술이다. 권6 기행은 장편 기행문이고, 권7~8 소간은 78편이지만 짧은 쪽지 편지로 실제 분량은 많지 않다. 권9 공이·언사부는 공문서이고, 권10 고금시는 시이다.
귀유광의 문집에는 청탁받고 써준 응수문(應酬文)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당시 문학의 상품화·대중화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정미를 중시하는 그의 문학관의 결과이기도 하다.
5. 가치와 영향
명대 중기는 과거학(科擧學)과 주자학에 대한 혐오가 당송(唐宋) 산문에까지 미쳐 진한(秦漢) 산문이 크게 주목받았다. 하지만 진한파들의 표절 악습이 심각해지고, 심학(心學)이 유행하면서 다시 당송 산문을 좋아하는 당송파가 나타났다. 귀유광은 당송파 문인으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진한 문장과 당송 문장, 송원 문장까지 섭렵하여 진한·당송으로 대립했던 복고의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또한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서정적인 고문으로 숨김없이 토로하여, 명말(明末) 공안파(公安派) 탄생과 소품문(小品文) 출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역 문인으로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귀유광을 오늘날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 전겸익(錢謙益)이다. 그는 귀유광을 명대(明代) 제일의 산문가로 추대하는 한편, 귀유광의 경학사상을 수용하여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을 주장했다. 이후 귀유광은 청대(淸代) 대명세(戴名世)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종되었는데, 대명세는 동성파(桐城派)의 창시자이자 방포(方苞)의 스승이다. 그러므로 귀유광은 동성파에 의해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구양수(歐陽修)·소식(蘇軾)의 뒤를 잇는 명대 유일한 고문가로 추대를 받아, 결국 귀유광-당송팔대가-사기·한서-육경으로 이어지는 문통(文統)을 계승한 자로 인정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후기에 당송파 문장과 함께 귀유광의 문장도 조선 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귀유광의 아들’이라 불렸던 김택영(金澤榮)은 귀유광 문장의 원류는 구양수(歐陽脩)가 아니라 《사기(史記)》라고 주장하며, 귀유광과 사마천(司馬遷)의 생동감 있는 필법을 배우고자 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아이들은 가족들이 우는 것을 보고 따라 울면서도, 여전히 어머니가 자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슬프다! [諸兒見家人泣 則隨之泣 然猶以爲母寢也 傷哉]” 권25 〈선비사략(先妣事略)〉
• “정원에 비파나무가 있는데 아내가 죽던 해에 손수 심은 것이다. 지금은 이미 높이 자라 우산과 같다. [庭有枇杷樹 吾妻死之年所手植也 今已亭亭如蓋矣]” 권17 〈항척헌지(項脊軒志)〉
• “하루는 아버지께서 한가로이 세미당에 앉아 계시다 서글프게 내게 말씀하시길 ‘집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없구나. 난 네 아내가 보고 싶다.’라고 하셨다. 나는 물러 나와 이를 슬퍼했다. [一日 家君燕坐堂中 慘然謂余曰 其室在 其人亡 吾念汝婦耳 余退而傷之]” 권17 〈세미당후기(世美堂後記)〉
(2) 색인어:귀유광(歸有光), 당송파(唐宋派), 공안파(公安派), 동성파(桐城派), 고문(古文), 팔고문(八股文), 복고(復古), 경학(經學), 진정(眞情), 사기(史記), 김택영(金澤榮)
(3) 참고문헌
• 진천선생집(震川震川集)(주본순(周本淳) 교점본(校點本),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 귀진천평전(歸震川評傳)(여신창(呂新昌),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 명귀진천선생유광연보(明歸震川先生有光年譜)(장전원(張傳元)·여매년(余梅年),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 진천산문시론(震川散文試論)(곽중녕(郭仲寧), 흥국출판사(興國出版社))
• 귀유광평전(歸有光評傳)·연보(年譜)(심신림(沈新林), 안휘출판사(安徽文藝出版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