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창명선생집(滄溟先生集)》은 명(明)나라 이반룡(李攀龍)의 시문집이다.
2. 저자
(1) 성명:이반룡(李攀龍(1514~1570))
(2) 자(字)·별호(別號):자는 우린(于鱗), 호는 창명(滄溟)
(3) 출생지역:중국 산동성(山東省) 제남부(濟南府) 역성(歷城(현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4) 주요활동과 생애
가정(嘉靖) 23년(1544) 동진사(同進士)로 선발되어 이부문선사(吏部文選司)에 임명되었고, 순천향시동고시관(順天鄉試同考試官), 형부광동사주사(刑部廣東司主事), 형부산서사낭중(刑部山西司郎中), 순덕지부(順德知府), 섬서안찰사제학부사(陝西按察司提學副使) 등을 지냈으며, 가정 35년(1556)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융경(隆慶) 원년(1567)에 복귀하여 절강안찰사부사(浙江按察司副使), 절강포정사사좌참정(浙江布政使司左參政)·하남안찰사(河南按察使)를 지냈다. 융경 4년(1570)에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
허방재(許邦才)·은사담(殷士儋)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사진(謝榛)·왕세정(王世貞)·종신(宗臣)·양유예(梁有譽)·서중행(徐中行)·오국륜(吳國倫)과 시사(詩社)를 결성, 후칠자(後七子)로 일컬어졌다. 전칠자(前七子(이몽양(李夢陽)·하경명(何景明)·서정경(徐禎卿)·변공(邊貢)·강해(康海)·왕구사(王九思)·왕정상(王廷相)))를 계승하여 복고적 문풍을 창도하며 ‘종공거장宗工巨匠’으로 추앙받았으며, 그 영향이 청(清)나라 초기까지 이어졌다. 선조 가운데는 이름난 인물이 없으며, 9세 때 부친 이보(李寶)를 여읜 뒤 곤궁하게 학업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팔고문(八股文)을 배우기 싫어했고, 왕신중(王愼中)의 칭찬까지 받게 되자 당시 사람들이 광생(狂生)으로 취급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대각체(臺閣體)에 맞서 문(文)은 진한(秦漢)을 종주로 하고 시(詩)는 성당(盛唐) 이전의 시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5) 주요저작 : 개인문집인 《창명선생집(滄溟先生集)》 외에 《고금시산(古今詩刪)》, 《당시선(唐詩選)》 등이 전한다.
3. 서지사항
현전하는 《창명선생집》 중 가장 이른 판본은 왕세정이 이반룡 사후 2년 뒤인 융경(隆慶) 6년(1572)에 판각한 것이다. 이후 만력(萬曆) 연간에 호래공(胡來貢)·오용광(吳用光)·진승(陳陞) 등의 판각본이 있었으나 왕세정 사후 전·후칠자(前後七子)를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더 이상 번각되지 않았으며, 청(淸) 도광(道光) 27년(1847) 이반룡의 후손 이헌방(李獻方)이 가장본(家藏本)과 구본(舊本)을 대조하여 교감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선본(善本)으로 간주되고 있다. 포경제(包敬第)가 표점·교감한 《창명선생집》(전2책, 중국 상해고적출판사, 2014년 출판)도 이헌방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창명선생집》은 본집 30권 부록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집은 고악부(古樂府) 2권, 시(詩) 12권, 부(賦)·송(頌)·서(序) 4권, 기(記) 1권, 전(傳) 1권, 묘지(墓誌)·묘표(墓表)·신도비(神道碑)·행장(行狀)·제문(祭文) 4권, 잡문(雜文) 1권, 서(書)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에는 은사담이 지은 묘지명(墓誌銘)과 왕세정이 지은 〈이우린선생전(李于鱗先生傳)〉이 수록되어 있다.
4. 내용
이반룡의 복고적 문학관은 악부시(樂府詩)를 포함한 고시(古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고악부는 대체로 “옛 시에서 몇 자만 고쳐서 자신의 작품으로 삼았다.[或更古數字爲己作]”(《명사(明史)》 〈문원전(文苑傳)〉)는 혹평을 받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진솔하게 토로한 〈추호행(秋胡行)〉과 같은 작품도 있다. 순덕지부로 재임하던 기간에 지은 시로는 〈등황유마릉제산시태항절정처(登黃榆馬陵諸山是太行絕頂處)〉와 〈춘흥(春興)〉 등이 있으며, 섬서안찰사제학부사로 재직하던 기간의 시로는 〈초추등태화산절정(杪秋登太華山絶頂)〉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섬서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후 백설루(白雪樓)를 짓고 은거했는데, 이 기간 지은 시문이 문집 전체의 과반을 차지한다. 《창명선생집》이 출현하기 전에 판각된 문집의 명칭이 《백설루집》인 것도 이 때문이다. 문장의 경우, “이해하기 어렵고 껄끄러워 끝까지 읽지 못할 지경이었다.[文則聱牙戟口 讀者至不能終篇]”(《明史》 〈文苑傳〉)는 평을 들었는데, 선진(先秦)과 서경(西京)의 고문(古文)을 전범(典範)으로 하여 전고(典故)를 비틀어 인용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를 독려하는 내용인 〈보류도독(報劉都督)〉은 기세가 매우 뛰어나며, 당시(唐詩)를 논평한 〈선당시서(選唐詩序)〉는 그의 시관(詩觀)을 간결명료하게 드러낸 글로 평가받는다. 송서, 서신에는 관료생활 당시 지은 글과 문학적 동인들과 증답(贈答)한 글이 많으며, 비지(碑誌), 제문 등의 묘도문자도 상당히 많이 수록되어 있다.
5. 가치와 영향
이반룡은 ‘해내의 문병을 20년 간 쥐었다.[操海內文柄垂二十年]’(전겸익(錢謙益), 《열조시집소전(列朝詩集小傳)》 〈이안찰반룡(李按察攀龍)〉)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명대 후기 문단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후기 문풍의 다양화에도 상당한 작용을 하였다. 때문에 그와 더불어 복고적 문풍의 유행에 공헌한 왕세정은 “한漢나라에 사마천과 사마상여가 있었다면 우리 시대에는 이반룡 한 사람이 있다[漢朝兩司馬 吾代一攀龍]”(시윤장(施閏章), 〈이우린선생묘비(李于鱗先生墓碑)〉 《학여당문집(學餘堂文集)》)고 극찬하였던 것인데, 모의(模擬)와 표절을 일삼았다고 비판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반룡은 “진한 이후에는 문(文)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秦漢以後無文矣]”(〈答馮通書〉)고 할 정도로 극단적인 복고적 경향을 보였으며, 한위(漢魏)의 고시(古詩)와 성당(盛唐)의 근체시(近體詩)를 추숭하여 《고금시산(古今詩刪)》을 편찬할 때도 송宋·원元의 시는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국조의 작가로서 세상에 알려진 이가 대략 수십 명인데, 북지(北地) 이몽양(李夢陽)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차라리 이치를 잃을지언정 옛글에 견주어 수식(修飾)하였다. 오늘날의 문장가 가운데 진강(晉江)과 비릉(毘陵)의 두 세 사람(귀유광(歸有光), 왕신중(王愼中), 당순지(唐順之))의 글도 어찌 집집마다 전하여 낭송되지 않겠는가마는 지론이 너무 과해 기운(氣韻)과 풍격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잦고 수식하기를 꺼려 이치로 덮어 가린다. 저들은 아마도 좌구명(左邱明)이 쓴 글을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의 말로 여기고 사마천(司馬遷)이 서사한 것을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다고 여긴 것인가. [國朝作者無慮數十家稱於世 即北地李獻吉輩 其人也 視古修辭 寧失諸理 今之文章 如晉江毘陵二三君子 豈不亦家傳户誦 而持論太過 動傷氣格 憚於修辭 理勝相掩 彼豈以左邱明所載爲皆侏離之語 而司馬遷叙事不近人情乎] 〈송왕원미서(送王元美序)〉
• “칠언고시의 경우, 오직 두보(杜甫)만이 초당(初唐)의 기운과 격조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유자재로 글을 썼다. 이백도 자유자재로 글을 쓰긴 했지만, 이따금 강한 쇠뇌의 끝에다 중간 중간 장황한 말을 섞었으니, 영웅이 사람을 속인 것일 뿐이다.[七言古詩 唯杜子美不失初唐氣格 而縱横有之 太白縱横 往往强弩之末 間雜長語 英雄欺人耳]” 〈선당시서(選唐詩序)〉
• “여항의 가요(歌謠)는 경술(經術)을 말미암지 않았고 〈초은(招隐)〉과 같은 시편은 현지(玄旨)와 무관하다. 그 의리는 각각 다다른 바에서 비롯한 것이니, 이것이 시교(詩敎)다. [里巷之謠 非緣經術 招隐之篇 無涉玄旨 義各於其所至 是詩之爲教也]” 〈포기황생시집서(蒲圻黄生詩集序)〉
(2) 색인어:창명선생집(滄溟先生集), 창명집(滄溟集), 백설루집(白雪樓集), 이반룡(李攀龍), 복고파(復古派), 후칠자(後七子)
(3) 참고문헌
• 復古派與明代文學思潮(廖可斌, 臺灣 文津出版社, 1994)
• 前後七子硏究(鄭利華, 中國 上海古籍出版社, 2015)
• 明代前後七子의 詩論 硏究(원종례,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9)
• 선조‧광해 연간 文風의 변화와 그 의미(김우정, 《韓國漢文學硏究》 39, 한국한문학회, 2007)
• 18세기 조선과 일본 문단에서의 상고적 문학론의 배경과 그 추이(하지영, 《古典文學硏究》 48, 한국고전문학회, 2015)
【김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