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초사(楚辭)》는 굴원(屈原)·송옥(宋玉) 등 초(楚)나라 문인들의 사(辭)와 한(漢)나라 초기 사람들의 모방작을 모아놓은 것으로, 전한시대 유향(劉向)이 편찬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산일(散逸)하였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랜 《초사》의 모음집은 후한(後漢)의 왕일(王逸)이 자신의 작품까지 포함시켜 엮은 《초사장구(楚辭章句)》로, 전부 17권이다.
《초사》의 ‘사(辭)’와 한나라의 ‘부(賦)’를 아울러 ‘사부(辭賦)’라고 부른다. 사는 초나라 지방의 문학양식과 방언·음운을 사용하고 지방의 풍물을 많이 묘사하였다. 송나라 때 황백사(黃伯思)는 〈익소서(翼騷序)〉에서 “모든 작품이 초나라 말을 쓰고 초나라 곡조를 내며 초나라 땅을 기록하고 초나라의 물명을 붙였으므로 이를 초사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 ‘초사’의 대표작가로는 굴원, 송옥, 경차(景差) 등이 있으며, 한나라의 작가로는 회남수산(淮南水山), 동방삭(東方朔), 장기(莊忌), 유향, 왕일 등이 있다. 왕일의 《초사장구》 이후 남송 때는 홍흥조(洪興祖)가 《초사보주(楚辭補注)》를 지어 왕일의 주석에 설명을 더하였고, 주희(朱熹)가 《초사집주(楚辭集注)》를 저술하여 《초사장구》와 《초사보주》의 미비점을 보완하였다. 한국에서는 왕일의 《초사장구》 이후 주희의 《초사집주》가 널리 읽혔다.
2. 편저자
(1)성명:편자는 왕일(王逸)(89?~158)이다. 저자인 굴원(屈原)(B.C. 339?~B.C. 278?)의 본명은 굴평(屈平)이며, 그 외 저자들은 송옥(宋玉), 경차(景差), 가의(賈誼)(B.C. 200~B.C. 168), 회남소산(淮南小山), 동방삭(東方朔)(B.C. 154~B.C. 92), 엄기(嚴忌), 왕포(王褒), 유향(劉向)(B.C. 77~6) 등이다.
(2)자(字)·별호(別號):왕일(王逸)의 자는 숙사(叔師), 굴원(屈原)의 원(原)은 자(字).
(3)출생지역:왕일은 후한 남군(南郡) 의성(宜城)(현 호북(湖北))
(4)주요활동과 생애
왕일의 《초사장구》에 의하면 〈이소(離騷)〉·〈구가(九歌)〉·〈천문(天問)〉·〈구장(九章)〉·〈원유(遠遊)〉·〈복거(卜居)〉·〈어부(漁父)〉 등 7편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역사상의 굴원은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그의 사적은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대략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굴원은 초나라 왕족과 동성(同姓)으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학식과 포부를 지니고, 한때 좌도(左徒)로 있으면서 국사를 도모하고 제후들을 응대하여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초나라의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 자란(子蘭) 등과 진(秦)나라의 첩자 장의(張儀)의 참소와 농간으로 버림을 받아 추방당했다. 회왕은 군사·외교적으로 실패한 후에 다시 굴원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굴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유폐되어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 회왕의 뒤를 이은 경양왕(頃襄王) 때 굴원은 다시 간신들의 모함으로 강남으로 추방되었다. 굴원은 초나라의 현실과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다가 호남(湖南)의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7작품 가운데 〈이소〉·〈구가〉·〈천문〉·〈구장〉만을 굴원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이소〉는 굴원이 자신의 신세와 임금에 대한 충정을 노래한 것이고, 〈구가〉는 고대의 무가(巫歌)들을 모아놓은 것이며, 〈천문〉은 굴원이 실의하여 산천을 방황하다가 하늘을 보고 탄식하며 부른 노래이고, 〈구장〉은 강남의 들로 쫓겨난 뒤 군왕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구가〉·〈천문〉·〈구장〉은 굴원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기》 〈굴원가생열전〉과 유향의 《신서(新序)》 〈절사편(節士篇)〉에 실린 굴원의 전기가 서로 모순되고 사실(史實)과 맞지 않는다는 점, 전국시대에는 강호를 방황하는 사람이 개인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 굴원이 실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가 초사체의 작품을 쓴 이후 100여년이 지나서야 그와 유사한 문학양식이 성행하였다는 점 등이 의문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청나라 말 요평(廖平)이 《초사강의(楚辭講義)》에서 굴원의 존재를 부정한 이후, 하천행(何天行)은 〈초사작어한대고(楚辭作於漢代考)〉에서 “〈이소〉는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지은 유선시(遊仙詩)이고 그 밖의 작품들도 모두 한대(漢代)에 이루어졌다.”고 고증하였다. 한국의 김학주 교수도 《중국고대문학사》에서 초사를 한대의 작품으로 보았다.
한편 왕일의 《초사장구》는 송옥의 〈구변(九辯)〉·〈초혼(招魂)〉‚ 경차의 〈대초(大招)〉‚ 가의의 〈석서(惜誓)〉‚ 회남소산의 〈초은사(招隱士)〉‚ 동방삭의 〈칠간(七諫)〉‚ 엄기의 〈애시명(哀時命)〉‚ 왕포의 〈구회(九懷)〉, 유향의 〈구탄(九歎)〉을 수록한 것에 다시 자신의 〈구사(九思)〉를 함께 실었다. 송옥은 B.C. 3세기 경 초나라 사람으로,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굴원의 제자였다고 한다. 경차도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다. 가의는 전한 때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다. 회남소산은 전한 때 회남왕 유안의 일부 문객들을 공칭한다. 동방삭은 전한 무제(武帝) 때의 정치가로 자(字)는 만청(曼倩)이다. 골계(滑稽)에 뛰어났다. 엄기는 전한 중기의 인물로, 본명은 장기(莊忌)인데, 《한서(漢書)》에서 전한 명제(明帝) 유장(劉莊)의 휘(諱)를 피하여 ‘엄기(嚴忌)’로 고쳤다. 이후 엄씨(嚴氏)의 시조가 되었다. 왕포는 전한의 문학자로, 자(字)는 자연(子淵)이다. 선제(宣帝) 때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유향은 전한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처음 이름은 갱생(更生)이었고 자(字)는 자정(子政)이다. 《전국책(戰國策)》을 비롯한 많은 책의 저작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초사장구》를 엮은 왕일은 후한의 학자로 자(字)는 숙사(叔師)이며, 영건(永建) 원년(126) 무렵에 활동하였으나 20여 세에 물에 빠져 죽었다.
(5)주요저작:왕일의 주요 저작은 《왕숙사집(王叔師集)》, 《초사장구(楚辭章句)》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전한의 유향은 굴원의 작품에 송옥의 〈구변〉·〈초혼〉‚ 경차의 〈대초〉‚ 가의의 〈석서〉‚ 회남소산의 〈초은사〉‚ 동박삭의 〈칠간〉‚ 엄기의 〈애시명〉‚ 왕포의 〈구회〉를 더하고 자신의 작품 〈구탄〉 등을 모아 ≪초사≫ 16권을 편찬하였다. 이후 후한의 왕일은 유향의 ≪초사≫ 16권에 자신의 〈구사〉를 합하여 17권으로 만들고 이에 대한 주석을 첨부하여 《초사장구》라 하였다. 진(晉)나라 때 곽박(郭璞)의 《초사주(楚辭注)》 3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북·남송 때 홍흥조는 《초사장구》의 결함을 보충하여 《초사보주》를 엮었다. 주희는 《초사장구》와 《초사보주》를 참고로 하여 《초사집주》를 엮었다. 이 책은 〈초사집주(楚辭集注)〉‚ 〈초사후어(楚辭後語)〉‚ 〈초사변증(楚辭辨證)〉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초사집주〉는 《초사》의 자구 해석이 불분명한 것에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것이고‚ 〈초사후어〉는 조보지(晁補之)가 집록한 ≪속초사(續楚辭)≫와 ≪변이소(變離騷)≫의 작품 52편을 수록한 것이며‚ 〈초사변증〉은 《초사장구》와 《초사보주》의 오류를 정정하였다. 청나라 때는 왕부지(王夫之)·대진(戴震)·장기(蔣驥) 등의 주석서가 나왔다.
《초사장구》는 〈이소〉, 〈구가〉, 〈천문〉, 〈구장〉, 〈원유〉, 〈복거〉, 〈어부〉, 〈구변〉, 〈초혼〉, 〈대초〉, 〈석서〉, 〈초은사〉, 〈칠간〉, 〈애시명〉, 〈구회〉, 〈구탄〉, 〈구사〉 등 1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이소〉 1편, 〈구가〉 11편, 〈천문〉 1편, 〈구장〉 9편, 〈원유〉 1편, 〈복거〉 1편, 〈어부〉 1편 등 25편은 굴원의 작으로 되어 있다. 〈구변〉·〈초혼〉은 송옥‚ 〈대초〉는 경차‚ 〈석서〉는 가의‚ 〈초은사〉는 회남소산‚ 〈칠간〉은 동방삭‚ 〈애시명〉은 엄기‚ 〈구회〉는 왕포의 작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구탄〉은 유향, 〈구사〉는 왕일의 작이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도 이 설을 따랐다. 〈초혼〉은 《예문유취(藝文類聚)》 권79에 수록한 양나라 심형(沈炯)의 〈귀혼부(歸魂賦)〉에서는 굴원의 작이라 하였지만, 왕일의 《초사장구》와 주희의 《초사집주》는 송옥의 작품으로 보았다.
《초사집주》에서는 굴원의 작품이라고 간주된 〈이소〉부터 〈어부〉까지는 ‘이소(離騷)’라 하고‚ 송옥 이하 문인들의 작품은 ‘속이소(續離騷)’라 하여 별도로 구분하였다. 또한 후대 문인들의 경우‚ 동방삭의 〈칠간〉‚ 왕포의 〈구회〉‚ 유향의 〈구탄〉‚ 왕일의 〈구사〉는 체제는 〈이소〉를 따랐으나 그 뜻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로 깊고 절실하지 못하다며 삭제하고‚ 그 대신에 가의의 〈조구월(弔屈原)〉과 〈복부(服賦)〉(〈복조부(鵩鳥賦)〉) 두 편을 첨가하였다. 《초사집주》의 편차를 보면‚ 권1 〈이소〉‚ 권2 〈구가〉‚ 권3 〈천문〉‚ 권4 〈구장〉‚ 권5 〈원유〉·〈복거〉·〈어부〉‚ 권6 〈구변〉‚ 권7 〈초혼〉·〈대초〉‚ 권8 〈석서〉·〈조굴원〉·〈복부〉·〈애시명〉·〈초은사〉과 같은 식이다.
한편 〈초사후어〉에는 다음 작품들을 실었다. 권1은 〈성상(成相)〉·〈궤시(佹詩)〉·〈역수가(易水歌)〉·〈월인가(越人歌)〉·〈해하장중가(垓下帳中歌)〉·〈대풍가(大風歌)〉·〈홍곡가(鴻鵠歌)〉이며‚ 권2는 〈조굴원부(弔屈原賦)〉·〈복부(服賦)〉·〈호자가(瓠子歌)〉·〈추풍사(秋風辭)〉·〈오손공주가(烏孫公主歌)〉·〈장문부(長門賦)〉·〈조이세부(弔二世賦)〉·〈자도부(自悼賦)〉·〈반이소(反離騷)〉이며, 권3은 〈절명사(絶命詞)〉·〈사현부(思玄賦)〉·〈비분시(悲憤詩)〉·〈호가(胡笳)〉이며, 권4는 〈등루부(登樓賦)〉·〈귀거래사(歸去來辭)〉·〈명고가(鳴皐歌)〉·〈인극(引極)〉·〈산중인(山中人)〉·〈망종남(望終南)〉·〈어사영송신(魚山迎送神)〉·〈일만(日晩)〉·〈복지부(復志賦)〉·〈민기부(閔己賦)〉·〈별지부(別知賦)〉·〈송풍백(訟風伯)〉·〈조전횡(弔田橫)〉·〈향나지(享羅池)〉·〈금조(琴操)〉이며, 권5는 〈초해가(招海賈)〉·〈징구부(懲咎賦)〉·〈민생부(閔生賦)〉·〈몽귀부(夢歸賦)〉·〈조굴원(弔屈原)〉·〈조악의(弔樂毅)〉·〈걸교문(乞巧文)〉·〈증왕손(憎王孫)〉이며‚ 권6은 〈유회(幽懷)〉·〈서산석(書山石)〉·〈기채씨녀(寄蔡氏女)〉·〈복호마부(服胡麻賦)〉·〈훼벽(毁璧)〉·〈추풍삼첩(秋風三疊)〉·〈국가(鞠歌)〉·〈의초(擬招)〉이다.
4. 내용
유협(劉勰)은 《문심조룡(文心雕龍)》 〈변소(辨騷)〉에서 “〈이소〉는 문장이 화려하고 우아하여, 사부의 종(宗)이다.”라고 하였다. 《문심조룡》 〈전부(詮賦)〉는 ‘사’와 ‘부’의 차이를 설명하여, 《초사》가 서정을 위주로 한 데 비하여 ‘부’는 사물의 포진에 주력한다는 점이 그 차이라고 하였다.
《초사》 가운데 가장 굴원의 작품이라고 간주되는 〈이소〉는 373구 2,490자로 구성되어 있는 장편 서정시이다. ‘이소’의 ‘이(離)’는 ‘만나다, 걸리다’는 뜻, ‘소(騷)’는 ‘수심, 울분’이라는 뜻이다. 굴원이 조국애, 이상 추구, 현실 비판, 원한을 강렬하게 표현하였다고 평가된다. 형식면에서는 《시경》 이래 4언체의 정형을 타파하고 장단구(長短句) 형식을 채용하여 풍부한 상상력과 강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한편, 대비와 과장 등 표현 기법을 구사하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소〉에 대해 평하길 “《시경》의 국풍(國風)은 색(色)을 좋아하면서도 음탕하지 않고 소아(小雅)는 원망하고 비방하면서도 어지럽지 않은데‚ 〈이소〉는 이 두 장점을 겸비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소〉 이외에 〈구가〉(11편)‚ 〈천문〉(1편)‚ 〈구장〉(9편)‚ 〈원유〉(1편)‚ 〈복거〉(1편)‚ 〈어부〉(1편) 등도 군왕이 왕도(正道)를 깨닫고 다시 자신을 불러들일 것을 기원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부〉는 〈어부사(漁父辭)〉라고도 하며, 《초사》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사마천도 굴원의 고고(孤高)함을 상징하는 시로 보아 《사기》의 〈굴원전〉에 인용하였다.
〈구가〉는 1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일의 《초사장구》에 의하면, 굴원이 추방당해 완수(沅水)·상수(湘水) 사이의 지역에서 울분에 찬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지방의 예악(禮樂)이 비루함을 본 굴원은 구가의 곡을 지어, 위로는 귀신 섬기는 공경을 펴고, 아래로는 자신의 맺힌 원한을 표현해서 임금에게 풍간(風諫)하였다. 가사는 총 11편인데, 왜 9가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구가〉는 초나라 사람들의 사상과 종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본래 초나라 사람들은 천신, 지신, 인신(조상신)을 믿었다. 〈구가〉는 그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동황태일(東皇太一)〉·〈운중군(雲中君)〉·〈상군(湘君)〉·〈상부인(湘夫人)〉·〈대사명(大司命)〉·〈소사명(少司命)〉·〈동군(東君)〉·〈하백(河伯)〉·〈산귀(山鬼)〉·〈국상(國殤)〉·〈예혼(禮魂)〉 등 11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편은 천신 가운데 가장 존귀한 신격인 동황태일을 무당들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맞이하는 내용이다. 제2편은 달의 신인 운중군(雲中君)을 노래하였다. 제7편은 해신인 동군(東君)을 노래하였다. 〈상군〉과 〈상부인〉은 서로 짝을 이루며, 완상(沅湘) 지역의 신을 노래한 것이다. 왕일은 상군을 상수의 신으로, 상부인을 요임금의 두 딸이자 순임금의 두 비로 보았다. 주희는 요임금의 장녀 아황을 상군, 차녀를 상부인이라 하였다. 상군과 상부인은 애정 관계에 있었던 신격인 듯하다. 〈대사명〉과 〈소사명〉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을 제사지내고 찬미하는 내용이다. 대사명은 인간의 생사를 총괄하고 소사명은 아동의 운명을 전담하는 신격이다. 〈하백〉과 〈산귀〉는 하신과 산신을 제사한 내용이다. 〈국상〉은 나라를 지키다가 죽은 장수와 병사들의 영웅적인 기개와 장렬한 정신을 칭송하는 제가(祭歌)이다. 굴원은 이렇게 9인의 신격을 제사지내는 내용의 시를 지은 후 회왕과 경양왕 때 진(秦)나라 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장병을 찬미하고 애도하였다.
유협은 《초사》에 대해 논평하여 “〈이소〉와 〈구장〉은 명랑 화려한 가운데 비애를 표현하였고, 〈구가〉와 〈구변〉은 화려한 조어에 상심(傷心)을 의탁하였으며, 〈원유〉와 〈천문〉은 기괴한 내용에 교묘한 기지가 엿보이고, 〈초혼〉과 〈대초〉는 농염하고 아름다운 수사와 화려함을 특성으로 하였으며, 〈복거〉는 거리낌 없는 언론의 취향을 대표하고, 〈어부〉는 독보적인 재능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그 정기는 고대를 압도하고 그 문사는 현대에 절실하다. 사람을 놀라게 한 수사와 절묘한 염려(艶麗)함은 이것과 병칭될 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사’는 굴원이 앞 시대의 시가 전통을 계승하고 초나라 지역 민가를 학습하면서 산문의 요소를 포함시킨 새로운 시형식이다. 후대의 사람은 굴원과 그를 이은 송옥 등의 작품을 총칭하여 ‘초사’라 하였다. 그리고 《초사》에서 〈이소〉가 가장 이름이 높았으므로 ‘초사’를 초소(楚騷) 혹은 소체(騷體)라고도 불렀다. 초사는 편장(篇章) 구조를 확대하여, 혹은 서정에 서사를 겸하거나, 혹은 서정과 영물에 의론을 겸하는 등, 포서(鋪敍)와 서사(敍事) 등의 산문 성분을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초사는 서한 연간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다. 그 사이에 가의(賈誼)·회남소산(淮南小山) 등이 초사를 모방하였을 뿐 아니라, 항우와 유방도 초사를 본떠서 각각 〈해하가(垓下歌)〉와 〈대풍가(大風歌)〉 등 명편을 지었다. 후대의 문인들은 초사체를 모방하더라도 형식을 개혁함으로써 더욱 산문화시켰다.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사’가 산문화된 일례라고 한다.
《초사》의 여러 시편들은 《문선》, 《사기열전》, 《초사집주(楚辭集註)》, 《고문진보》 등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수용되었다. 이미 신라와 고려에서도 《이소》가 인용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초사》의 어구를 빌거나 그 주제사상을 모범으로 삼아 개인의 심회를 토로하는 일이 많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주자학자들과 인연이 깊다. 주희는 경원(慶元) 연간에 조여우(趙汝愚)가 배소에서 죽는 등 당쟁이 격화되자 《이소경(離騷經)》을 전주(傳註)하여 자신의 뜻을 보이고 극론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다가, 채원정(蔡元定)이 점을 쳐서 둔괘(遯卦)를 얻자 상소의 초고를 불태우고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특히 굴원의 《이소경》에 주목하였다. 실제로 조선 선비들은 주희의 《초사집주》를 통하여 《초사》를 감상하였다. 주희는 《초사집주》 권1의 〈이소경서(離騷經序)〉에서 굴원의 출신과 관력, 참언을 받고 쫓겨나서 〈이소〉를 비롯한 〈구가〉, 〈천문〉, 〈구장〉 등의 작품을 짓게 된 내력 등을 서술하였다. 아울러 회남왕 유안과 경문공(景文公)의 말을 인용하여, 〈이소〉가 굴원의 깨끗하고 고고한 정신을 담아 《시경》에 버금가며 사부(詞賦)의 비조가 된다고 천명하였다. 규장각에 소장된 《초사》 관련 서적들이 모두 《초사집주》라는 사실은 조선에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음을 잘 말해준다.
한편 《초사》 가운데서도 〈구가〉는 화제(畫題)로 활용되어, 중국에서 ‘구가도(九歌圖)’가 여럿 만들어졌고, 한국의 지식인들도 그 그림을 감상하였다. 원나라 장악의 〈구가도권〉은 북송 때의 화가 이공린(李公麟)(1049~1106)의 〈구가도〉를 이어서, 백묘 인물화를 수록하였다. 굴원의 상을 맨 앞에 그려놓고, 〈구가〉 가운데 11단 21인을 묘사하였다. 이공린은 〈구가도〉와 관련하여 두 건의 권축(卷軸) 회화를 남겼다. 하나는 양나라 소통(蕭統)의 《문선(文選)》에 집록되어 있는 굴원의 〈구가〉 가운데 여섯 수의 시를 두고 6개 장면으로 나누어 회화를 제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사》 〈구가〉 가운데 11수를 근거로 9명의 신선과 2개의 송시(訟詩) 의식 장면을 11개 장면에 나누어 회화를 제작한 것이다. 이 가운데 장본(長本), 11장면본은 명나라 중기에 없어지고, 14세기 제작의 임모본이 전한다. 이공린의 두 〈구가도〉는 원나라, 명나라 때 〈구가〉의 제재를 표현하는 때에 표준 범본(範本)이 되었다. 원나라 초 전선(錢選), 조맹부(趙孟頫), 14세기 원나라의 장악(張渥)도 이공린의 〈구가도〉를 임모하였다. 장악의 〈구가도〉는 다섯 종류가 남아 있는데, 중국 상해박물관에는 장악의 〈구가도〉와 오예(吳叡)(1298~1355)의 서사(書辭)를 한 두루마리에 이어둔 〈구가도권(九歌圖圈)〉이 있다.
조선 명종 때 윤춘년(尹春年)(1514~1567)은 〈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에서 김시습이 달밤에 《이소경》을 외다가 문득 울기도 하였다고 적었고, 이이(李珥)도 〈매월당전〉에서 김시습이 달밤을 만나면 반드시 《이소》를 읊었고, 다 읊고 나면 반드시 통곡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임상덕(林象德)이 작성한 〈소아독서차제(小兒讀書次第)〉에는 《초사》의 〈구가〉,〈구장〉,〈구변〉,〈이소〉를 언급하고 있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어렸을 때부터 《초사》 읽기를 좋아해서 자신의 시집에서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였다.
6. 참고사항
(1)명언
• “오나라 창을 잡고 무소 갑옷 입고, 차축을 부딪치고 칼과 칼이 맞부딪쳐,깃발이 해 가리고 적군은 구름 같이 밀려와, 화살이 비 오듯 하는 속을 병사들 앞다툰다.적군이 우리 진지를 치고 우리 대열 짓밟아, 왼쪽 참마 쓰러져 죽고 오른쪽 말도 다쳐,두 바퀴 진흙에 묻히고 네 마리 말은 발이 묶였지만, 옥 북채 손에 잡고 북을 울렸으나,하늘의 도움 잃고 신령이 노하여, 죽어간 시체들이 벌판에 널브러졌도다.나아 돌아오지 못하고 떠나 돌아오지 못해, 평원인 듯하더니 금세 길이 아득히 멀어져,장검 차고 진나라 활을 낀 채, 머리와 몸 나뉘어도 마음에 후회 없다네.진실로 용감하고 잘 싸워, 끝내 굳세고 강하여 범할 수 없었네.몸은 죽었어도 넋은 살아 있어, 그대들 혼백은 뭇 영혼의 영웅이 되리.[操吳戈兮被犀甲 車錯轂兮短兵接 旌蔽日兮敵若雲 矢交墜兮士爭先 凌余陣兮躐余行 左驂殪兮右刃傷 霾兩輪兮縶四馬 援玉枹兮擊鳴鼓 天時墜兮威靈怒 嚴殺盡兮棄原野 出不入兮往不反 平原忽兮路超遠 帶長劍兮挾秦弓 首身離兮心不懲 誠旣勇兮又以武 終剛强兮不可凌 身旣死兮神以靈 子魂魄兮爲鬼雄]” 《구가(九歌)》 〈국상(國殤)〉
마지막 4구를 제외하면 모두 매 구마다 압운을 하였고 두 구마다 운자를 바꾸었다. 상해본 〈구가도〉에서 ‘국상’은 갑주를 걸치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칼을 차고 있는 장수의 영혼이 마치 그의 눈만큼이나 부리부리한 눈을 뜬 듯한 나뭇잎들이 잔뜩 나무에 매달린 숲속에 숨어 있는 모습이다. 나뭇잎은 비늘 조각 같은 모양으로 그려서, 전사들이 입고 있는 투구나 갑옷과 어울리며, 또 전사들의 모습을 숨겨준다. 머리 없는 인물은 최근 전투에서 죽은 새 귀신이고, 나머지 넷이 그를 영접하는 것이어서, 머리 없는 인물상은 비장한 분위기를 더한다는 것이다. 그림 옆에는 오예(吳叡)가 전서체로 ‘국상’을 정갈하고 힘 있는 필치로 써두었다.
(2)색인어:초사(楚辭), 굴원(屈原), 유향(劉向), 초사장구(楚辭章句), 왕일(王逸), 홍흥조(洪興祖), 초사보주(楚辭補注), 주희(朱熹), 초사집주(楚辭集注), 이소(離騒), 구가(九歌), 천문(天問), 구장(九章), 원유(遠遊), 복거(卜居), 어부(漁父), 구변(九辯), 초혼(招魂), 대초(大招), 석서(惜誓), 초은사(招隠士), 칠간(七諫), 애시명(哀時命), 구회(九懐), 구탄(九歎), 구사(九思)
(3)참고문헌
• 楚辭補注(洪興祖, 四部叢刊 初篇 集部)
• 楚辭集注(朱熹 集注, 上海古籍出版社)
• 離騷纂義(游國恩 主編, 楚辭註疏長編 第1編, 中華書局)
• 天問纂義(游國恩 主編, 楚辭註疏長編 第2編, 中華書局)
• 屈原賦今譯(姜亮夫, 楚辭學五書2, 北京出版社)
• 王逸《楚辭章句》考論(鄧聲國, 國家圖書館出版社)
• 王逸《楚辭章句》發微(許子濱, 上海古籍出版社)
• 楚辭(藤野岩友 譯著, 漢詩選3, 集英社)
• 楚辭(星川清孝 著, 新釋漢文大系 34, 明治書院)
• 楚辭新研究(石川三佐男, 汲古書院)
【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