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초사집주(楚辭集注)》는 송(宋)나라 주희(朱熹(1130~1200))가 초사(楚辭) 25편에 대해 상세한 주석을 덧붙인 책이다. 이 책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와 홍흥조(洪興祖(1090~1155))의 《초사보주(楚辭補注)》를 바탕으로 주희가 유학사상을 토대로 초사에 새롭게 주석을 가한 것이다.
2. 저자
(1) 성명:주희 (朱熹(1130~1200)).
(2) 자(字)・호(號):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창랑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 등이며 시호(諡號)는 문공(文公)・휘국공(徽國公)이다. 조선에서는 그를 공경하여 주자(朱子)・주부자(朱夫子)・주문공(朱文公)・송태사휘국문공(宋太師徽國文公) 등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3) 출생지역:남창주(南劍州) 우계(尤溪(지금의 복건성(福建省) 삼명시(三明市))). 송나라 건염(建炎) 4년(1130)에 아버지 주송朱松의 부임지였던 우계현(尤溪縣) 성수(城水) 남정(南鄭)의 의재(義齋) 관사(館舍(지금의 남계서원(南溪書院)))에서 태어났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주희는 이정(二程(정호(程顥)・정이(程頤)))의 삼전제자인 이통(李侗(1093~1163))의 제자로, ‘정주학파(程朱學派)’라 불린다. 19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당시의 평균 급제 연령은 35세였다. 그가 1151~1158년에 맡은 첫 번째 관직은 복건성 동안(同安)의 주부(主簿)였다. 이후 주희는 1178년까지 다른 관직을 맡지 않았다. 49세인 순희(淳熙) 5년(1178) 송나라 효종(孝宗) 때 남강군겸관내권농사(南康軍兼管內勸農事)로 부임하였다. 50세인 순희 6년(1179) 10월에는 나무꾼의 도움으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옛터를 찾았고 그의 창도(唱導)로 이듬해 3월에 수복되었다. 그는 일찍이 동주(洞主)를 겸임하고 명사를 초빙하며, 도서를 충실히 갖추고 황제에게 사액(賜額)을 요청하였다. 또한 학전(學田)을 마련하여 가난한 학생들을 부양하고, 직접 학칙을 제정하여 유명한 〈백록동서원교규(白鹿洞書院敎規)〉를 제정하였다. 52세인 순희 8년(1181) 2월에는 육구연(陸九淵(1139~1192))이 남강(南康)으로 와서 주희를 방문하고 백록동서원에서 서로 강학하였다. 54세인 순희 10년(1183)에는 무이산(武夷山) 구곡(九曲)에 있는 대은병봉(大隱屛峯) 아래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창건하였다. 책을 저술하여 이론을 정립하고 제자를 널리 받아들여 학문에 힘썼다. 그는 이때에 《시경(詩經)》을 분석하며 《시전(詩傳)》을 편집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경 정신을 바탕으로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과 서문을 지었고 그 이듬해에는 〈무이도가(武夷棹歌) 10수〉를 지었다. 62세인 소희(紹熙) 2년(1191)에는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창건하고 이후 이름을 고쳐 창주정사(滄洲精舍)라고 했다가 순우(淳祐) 4년(1244)에 고정서원(考亭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65세인 소희 5년(1194)에 주희는 호남에 부임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교화(教化)를 넓히며 관리들을 감독하고 민풍(民風)을 돈독히 하였다. 주희가 호남 장사(長沙)의 악록산(嶽麓山) 아래에 악록서원(嶽麓書院)을 창건하고, 한가할 때에 직접 여기에서 강학하였다. 66세인 경원(慶元) 2년(1196) 12월에는 당금(黨禁)이 발발하였다. 감찰어사(監察禦史) 심계조(沈繼祖)가 ‘10대 죄상’을 날조하여 주희를 탄핵하였고, 성리학을 세상을 속이는 위학(僞學)으로 몰아 사상 초유의 잔혹한 박해를 가하였다. 59명의 위역당적(僞逆黨籍)을 열거하여 여기에 오른 자는 모두 처벌을 받았다. 주희는 위학괴수(僞學魁首)로 지목되었고 제자들은 유배되거나 수금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경원 6년(1200) 3월 9일에 71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1230년에는 그에게 문(文)으로 시호가 내려졌고 이후부터는 ‘주문공’으로 불렸다. 1241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공자가 직접 학문을 전수하지 않은 인물로서 대성전(大成殿) 12철(哲)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5) 주요저작:《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주역본의(周易本義)》, 《서명해(西銘解)》,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시집전(詩集傳)》, 《초사집주(楚辭集注)》, 사후 편찬된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주희가 《초사》를 주석한 것에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남송대에는 송나라와 금(金)나라 사이의 민족 갈등이 첨예하였다. 송나라의 통치 집단 내부에서는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렸는데 주희는 주전파에 속하였다. 주희는 《초사》를 빌려 이 상황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굴원의 충성심과 애국심 및 고상한 품성을 적극적으로 칭송하고 그것을 자기의 애국심에 가탁하였고, 동시에 한나라 양웅(揚雄)의 절조를 잃어버린 것을 질책하여 ‘왕망(王莽)을 모시는 신하들을 ‘굴원의 죄인’이며 양웅의 〈반이소(反離騷)〉는 곧 〈이소(離騷)〉를 참소한 도적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실 투항파 및 주전파 진영에 섞여있는 기회주의자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초사집주》는 총 8권이며, 부록으로 《초사변증(楚辭辯證)》 2권, 《초사후어(楚辭後語)》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사집주》는 주희가 담주(潭州(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 형호남로안무사(荊湖南路安撫使)로 있을 때인 1193년에 편찬한 것이다. 혹자는 조여우(趙汝愚)가 재상에서 파직된 시점인 1195년에 지었다고도 한다. 《초사집주》의 서문에는 경원 5년(1199)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이 완성된 것은 1199년임을 알 수 있다.
《초사집주》 1~5권은 왕일의 《초사장구》를 근거로 굴원의 작품 25편을 ‘이소(離騷)’로 정하고, 〈이소〉를 제외한 각 편에 ‘이소’라는 글자를 붙였다. 그 편차를 보면 권1 〈이소경〉, 권2 〈구가(九歌)〉, 권3 〈천문(天問)〉, 권4 〈구장(九章)〉, 권5 〈원유(遠遊)〉・〈복거(卜居)〉・〈어부(漁父)〉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일은 〈어부〉까지를 ‘이소’라고 하고 송옥(宋玉) 이후의 작품은 ‘초사’라고 하였다.
권6~8은 ‘속이소(續離騷)’류이며, 각 편에 ‘속이소’라는 글자를 붙였다. 그 편차를 보면 권6 〈구변(九辯)〉, 권7 〈초혼(招魂)〉은 송옥의 작품이고 〈대초(大招)〉는 경차(景差)의 작품이며, 권8 〈석서(惜誓)〉・〈조굴원(吊屈原)〉・〈복조부(鵩鳥賦)〉는 가의(賈誼)의 작품이고 〈애명부(哀時命)〉는 장기(莊忌)의 작품, 〈초은사(招隱士)〉는 회남소산(淮南小山)이 지은 작품으로 되어 있다. 주희는 굴원의 작품을 ‘이소’라고 하였고, 송옥 이하 16편의 작품을 ‘속이소’라고 하였다.
‘속이소’로 분류된 작품은 왕일의 《초사장구》와 달리 주희는 〈칠간(七諫)〉・〈구회(九懷)〉・〈구탄(九歎)〉・〈구사(九思)〉가 비록 이소체의 작품이지만 내용이 밋밋하고 뜻이 절실하지 않아 고통이 없으면서 억지로 신음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 네 편을 삭제해버리고 가의의 〈조굴원부〉와 〈복조부〉를 추가하고, 양웅의 〈반이소〉를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초사변증》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뉜다. 상권은 〈이소〉・〈구가〉이고, 하권은 〈천문〉・〈구장〉・〈원유〉・〈복거〉・〈어부〉・〈구변〉・〈초혼〉・〈대초〉이다. 조목을 나열하여 구설(舊說)의 득실(得失)을 고증하였다. 《초사후어》는 조보(晁補)의 《속이소(續離騷)》와 《변이소(變離騷)》를 보완하여 만들어졌다. 순황(荀況)부터 여대림(呂大臨)까지 52편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미완고로서 앞의 17편에만 해제와 주석이 있고, 뒤의 35편에는 주석 없이 해제만 있다. 이소를 모방한 의소(擬騷) 작품을 수록한 것은 초사(楚辭)가 후대 문학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려는 의도이다. 왕일과 홍흥조의 주는 구주(舊註)라고하고 주희의 주를 신주(新註)라고 하였다.
한편 《초사》는 우리나라 신라시대부터 전래되어 읽혔다. 조선 간본으로는 세종 11년(1429)의 8권 3책의 《초사집주》 등이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10년(1428)과 11년(1429)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정종(文章正宗)》과 《초사》 등의 서적은 공부하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니 주자소(鑄字所)에서 이를 인행(印行)하게 하라.”, “집현전 관원과 군기부정 이상 관원들에게 《초사》를 반사(頒賜)하였다.” 등의 내용이 확인되고, 경자자(庚子字)・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무신자(戊申字)로 3회에 걸쳐 정식 간행되었으며 추가적으로 간행된 목판본도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초사집주》는 조선에서 중요한 문헌으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우리나라 초사 수용은 주희의 《초사집주》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4. 내용
주희는 “동한(東漢) 왕일의 《초사장구》와 근세에 홍흥조의 《초사보주》가 간행되었는데 훈고(訓詁)와 물명(物名)에 있어서는 그 주석이 상세하나 대의를 설명함에 있어서는 깊이 연구하지 못한 까닭에 놓치는 부분이 많다.”고 하였고, 또한 《초사변증》의 서두에도 “왕일과 홍흥조의 주석은 훈고와 물명에만 치중하였으므로 초사의 요체를 잃어버렸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초사집주》에 《초사장구》과 《초사보주》의 결점을 보완하는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사집주》의 주석은 4구를 1장(章)으로 묶는 경우가 가장 많고 종종 6구나 8구를 1장으로 묶기도 한다. 먼저 단어의 음과 뜻을 풀이하고 이어서 장의 대의를 해석한다. 매 편의 제목 아래에는 (小序)가 있고 해제를 붙였는데, 작자・제목의 뜻・창작 배경과 창작 의도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덧붙였다. 대부분 《초사장구》의 설명을 취하면서도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 곳도 적지 않다. 《모시(毛詩)》의 체제를 모방하여 장 아래에는 부(賦)・비(比)・흥(興)의 수법으로 해석을 가하기도 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주희는 《초사》를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재해석하고 굴원을 충성과 애국의 시인으로 그 위상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초사집주》는 왕일과 홍흥조의 기존 주석의 오류를 바로잡고 독창적인 견해와 정확한 해설을 가한 주석서로서 후세에 널리 인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초사집주》는 왕일의 《초사장구》와 홍흥조의 《초사보주》에 이어 가장 영향력있는 초사의 주석서로 후대 학자들의 많은 주목을 받으며 널리 유전되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굴원은 그 뜻과 행동이 비록 더러 중용(中庸)에서 벗어난 점이 있어서 본받을 것은 못되지만, 모두 충군(忠君)・애국(愛國)의 성심(誠心)에서 나온 것이었다. 굴원이 쓴 글은 그 표현이 질탕하고 괴기스러운 데로 흐르고 원한이 격발되고 있어 우리가 가르침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모두가 정에 얽매인 슬픈 마음과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原之爲人 其志行 雖或過於中庸 而不可以爲法 然皆出於忠君愛國之誠 原之爲書 其辭旨 雖或流於跌宕怪神怨懟激發 而不可以爲訓 然皆生於繾綣惻怛 不能自已之至意]” 〈초사집주서(楚辭集註序)〉
• “후세 독자들이 천 년 전의 옛사람 굴원을 만나 죽은 그가 다시 일어나고, 또 천년 후에도 족히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후세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지 않을 것이다. 아! 슬프다, 이것이 어찌 속인들과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庶幾讀者 得見古人於千載之上 而死者可作 又足以知千載之下有知我者 而不恨於來者之不聞也 嗚呼悕矣 是豈易與俗人言哉]”〈초사집주서〉
(2) 색인어:초사(楚辭), 주희(朱熹), 초사집주(楚辭集注), 초사변증(楚辭辯證), 초사후어(楚辭後語)
(3) 참고문헌
• 〈朝鮮士人들의 ‘楚辭’ 受容과 그 美意識〉(신두환, 《漢文學論集》 30)
• 〈조선본 《초사》의 문헌학적 연구〉(가첩, 《열상고전연구》 46)
• 〈홍흥조의 굴소관屈騷觀고〉(박영환, 《중국어문학》 32)
【신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