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단기》는 탕현조의 희곡작품으로 여동빈(呂洞賓)이 주인공 노생(盧生)을 제도(濟度)하기 위해 꿈을 꾸게 하고 그 속에서 인생의 영욕을 모두 맛보게 한다. 유명한 ‘황량몽(黃粱夢)’의 이야기다. 본 작품은 명대 정치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시 정치를 비평하고 있으며 ‘인생은 꿈이다.[人生如夢]’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2. 저자
(1) 성명:탕현조(湯顯祖)(1550~1616)
(2) 자(字)·별호(別號):자는 의잉(義仍), 호는 약사(若士) 혹은 해약사(海若士)며, 자호는 청원도인(淸遠道人)이고, 말년의 호는 견옹(繭翁)
(3) 출생지역:강서성(江西省) 무주시(撫州市) 임천현(臨川縣)
(4) 주요활동과 생애
탕현조는 문인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에는 희곡집만 해도 1천 종이 넘게 있었고 소장한 장서는 4만 권이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탕현조는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원곡(元曲)을 접할 수 있었고 이는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탕현조의 생애는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3세 때 나여방(羅汝芳)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14세 때 수재가 되었다. 20세 때인 융경(隆慶) 4년(1570)에는 향시에 급제하였다. 그 이듬해(1571) 회시(會試)에서 낙방을 하고 1574, 1577, 1580년 네 번의 낙방으로 이어진다. 1583년 춘시(春試)에서 만 33세에 등과하게 된다. 이때가 임천(臨川) 시기이다.
탕현조는 진사로 관직에 나간 후 잠시 북경에서 근무하다가 이듬해인 1584년에 남경 태상시(太常寺) 박사가 되어 부임한다. 그 뒤 1591년 광동 서문(徐聞) 전리(典吏)로 좌천되기까지 약 7년간을 남경에서 봉직한다. 이때가 남경(南京) 시기이다.
광동의 서문으로 좌천된 이유는 바로 〈논보신과신소(論補臣科臣疏)〉라는 상소 때문이었다. 탕현조는 장거정(張居正)과 당시의 재상이었던 신시행(申時行)의 비리를 논하면서 장문거(楊文擧)와 호여녕(胡汝寧) 두 사람도 탄핵하였다. 상소를 본 황제는 자신의 잘못도 지적하자 화가 치밀어 탕현조를 오지(奧地)인 광동으로 좌천시켰다. 그는 약 1년 반 좌천지에 있다가 1593년에 절강성의 벽지인 수창(遂昌)의 지현(知縣)이 된다. 이곳에서 5년간 재임한 후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다. 이때를 서문(徐聞)·수창(遂昌)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만력 26년(1598) 3월에 임천으로 낙향한 후 옥명당(玉茗堂)이라 명명한 서재에서 칩거하며 오로지 시작(詩作)과 극작(劇作)에 몰두하였다. 낙향 후 1616년 서거 때까지가 후반부의 임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5) 주요저작:희곡 작품으로는 《자소기(紫簫記)》, 《자차기(紫釵記)》, 《모란정(牡丹亭)》, 《남가기(南柯記)》, 《한단기(邯鄲記)》가 있고, 시문집으로는 《홍천일초(紅泉逸草)》, 《옹조(雍藻)》(제목만 전해짐), 《문극우초(問棘郵草)》, 《옥명당문집(玉茗堂文集)》이 있다.
3. 서지사항
현존하는 판본으로는 《60종곡(六十種曲)》본과 《고본희곡총간(古本戲曲叢刊)》본이 있는데 명나라 천계(天啟) 각본 주묵본(朱墨本)을 영인한 것이 있다.
《한단기》는 탕현조의 나이 58세(1607)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이 책의 원본으로는 일반적으로 당대(唐代) 심기제(沈旣濟)의 소설 《침중기(枕中記)》를 꼽는다. 전체 30척으로 구성되어 있다.
4. 내용
여동빈(呂洞賓)이 악양루(岳陽樓)에서 술을 마시노라니 한단현(邯鄲縣)에 사는 노생(盧生)의 용모가 선인의 몫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제도(濟度)하리라 마음먹는다. 주막에 당도한 노생에게 여동빈은 옥침을 빌려주고 노생은 잠이 든다. 잠속에서 노생은 최씨녀(崔氏女)와 결혼한다. 여러 가지 사연이 있은 뒤 결국 그 집의 사위가 된다. 과거시험장에서 고력사(高力士)가 등장하여 노생을 장원급제로 올려준다. 후에 고명(誥命)의 위조가 우문융(宇文融)에 의해 발각되어 합주(陜州)의 지주(知州)로 좌천된다. 임지에서 길을 뚫고, 토번군을 방어하고, 경승지를 만들어 천자의 행행(行幸)을 맞이하여 천자를 기쁘게 한다. 또한 토번군을 물리치고 적군 백만 명을 베고 개선하여 정서후(定西侯)에 봉작된다. 노생의 공과 승진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우문융이 다시 간계를 써서 적군과 내통했다고 상주한다. 노생은 번장(番將)과 통했다는 죄목으로 형장에 끌려가게 되자 자살을 꾀하나 아내가 만류한다. 최씨의 하소연으로 노생은 죽음을 면하고 귀문관(鬼門關)으로 유배된다. 우문륭은 또 최씨가 반역자의 처라 상주하여 기방(機坊)으로 보낸다. 노생은 유배지에 도착하고, 기방(機坊)으로 보내진 최씨는 3년이 지나도 남편의 원통함을 상주하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고 스스로 비단 한 자락에 회문궁사(廻文宮詞) 두 수를 써서 천자에게 헌상한다. 그 회문궁사에 감탄한 천자는 노생을 사면하려 하나 우문융이 반대한다. 이때 소숭이 모든 것이 우문륭이 계책한 것이라 고하니 우문룡은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포박된다. 이에 앞서 우문륭은 노생을 죽이라는 밀서를 보낸다. 위험에 처한 찰나에 노생은 정서후로 복귀하고 조정에 돌아와 재상이 되라는 조서가 내려온다. 서울로 귀환한 노생에게 식읍 오천호를 내리고 다섯 자식들에게도 높은 벼슬이 주어지니 온가족이 영화를 누린다. 노생의 나이 80여 세가 되어 병이 들자 고력사가 성지를 가지고 와 공을 위로한다. 노생이 붓을 들어 성은에 감사하며 유표(遺表)를 쓰고 혼절한다.
꿈에서 깨어난 노생이 보니 주막에서 짓고 있던 메조밥은 아직도 익지 않았다. 이에 대오 각성(大悟覺醒)하고 여동빈을 스승으로 받들고 여동빈에게 이끌려 선경(仙境)으로 떠난다.
5. 가치와 영향
‘사몽(四夢)’에 대한 평가는 왕사임(王思任)이 간결하게 표현한바 있는데 그는 사몽의 내용과 창작의 특색을 “《한단》은 선(仙)이요, 《남가》는 불(佛)이요, 《자차》는 협(俠)이요, 《모란》은 정(情)이다.[邯鄲仙也 南柯佛也 紫𨥁俠也 牡丹情也]”라고 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노생, 노생, 자네가 일생을 출세하려고 하니, 내가 주머니를 끌러 베게 하나를 주겠네[盧生,盧生,你待要一生得意,我解囊中贈君一枕]” 〈4척〉
• “지금에서야 깨달았네, 인생과 가족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로다. 어찌 진실된 것이 있겠는가.[如今醒悟了 人生眷屬 亦猶是耳 豈有眞實相乎]” 〈29척〉
• “제자는 일생동안 정(情) 한 글자에 끌려왔습니다.[弟子一生耽擱了個情字]” 〈30척〉
(2) 색인어:여동빈(呂洞賓), 노생(盧生), 최씨(崔氏), 한단현(邯鄲縣), 우문융(宇文融), 고력사(高力士)
(3) 참고문헌
• 湯顯祖戲曲集(上·下)(錢南楊 校點, 古籍出版社)
• 繡刻邯鄲記定本(湯顯祖, 開明書店)
• 〈湯顯祖《邯鄲夢記》硏究〉(姜姈妹, 臺灣師範大學碩士論文)
• 〈《邯鄲記》中的丑角〉(孫小英, 中外文學 第十卷, 第九期)
• 〈《邯鄲記》的戲劇情調〉(陳芳英, 中外文學 第十三卷, 第一期)
【강영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