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역외전(周易外傳)》은 왕부지(王夫之)가 젊은 시절인 1655년(37세)에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가 67세에 저술한 《주역내전(周易内傳)》 및 《주역내전발례(周易内傳發例)》와 함께 왕부지 주역철학의 핵심 역할을 한다. 그는 또한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 《주역패소(周易稗疏)》, 《주역고이(周易考異)》 등을 저술하여 《주역》에 관해 폭넓으면서도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왕부지는 이 책에서 전통유학의 성리학적 세계관이나 양명학적 세계관과 구별되는 기철학적 세계관의 이론 체계를 구성했다. 그는 또한 십익(十翼) 가운데 〈서괘전(序卦傳)〉을 논리가 조잡한 것으로 여기며 공자의 글이 아니라고 평가하고, 《주역》 각 부분의 저자와 이론 사이의 논리적인 정합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2. 저자
(1) 성명:왕부지(王夫之)(1619~1692)
(2) 자(字)·호(號):자는 이농(而農), 호는 선산(船山), 강재(薑齋), 일호도인(一瓠道人), 선산선생(船山先生), 석당선생(石堂先生).
(3) 출생지역:형주부(衡州府) 성의 남쪽인 회안봉(回雁峰) 왕아평(王衙坪)(현, 호남성(湖南省) 형양시(衡陽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왕부지는 1619년 9월 1일(음력)에 유학자 집안의 아버지 조빙(朝聘)(50세)과 어머니 담(譚)부인(47세)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맏형(介之)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십삼경(十三經)》을 비롯하여 많은 고전을 읽었다. 1637년(19세) 봄에 고향의 처사인 도만오(陶萬梧)의 딸(16세)과 결혼하였다. 1638년(20세)에 장사(長沙)의 악록서원(岳麓書院)에서 공부하였고, 1642년(24세) 4월에 맏아들인 물약(勿葯)을 낳았다.(1643년 11월에 죽음)
1644년(26세) 3월에 이자성에 의해 명왕조가 멸망하였고, 그 해 5월에 오삼계(吳三桂)가 청(淸)나라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거쳐 북경을 함락하였다. 왕부지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비분시(悲憤詩)〉를 지었다. 그해 8월에 둘째 아들인 반(攽)을 낳았다. 12월 중순에 남악(南嶽)의 흑사담(黑沙潭) 부근에 초옥을 짓고 ‘속몽암(續夢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645년(27세) 5월에 청나라 군대가 남경(南京)을 공격하여 홍광제(弘光帝)인 주유숭(朱由崧)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속비분시〉를 지었다. 1646년(28세) 여름에 상음(湘陰)에 가서 첨도어사(僉都御史)인 호북순무(湖北巡撫) 장광(章曠)에게 상서(上書)하여 남북독사(南北督師)와 농민 봉기군을 연합하여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는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해 11월에 부인이 죽었다. 그는 그 해에 《주역패소(周易稗疏)》 4권과 《주역고이(周易考異)》 1권을 지었으며, 《연봉지(蓮峰志)》 5권과 《악여집(岳余集)》 1권을 편찬하였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춘추가설(春秋家說)》을 찬하였다. 1647년(29세)에 청나라 군대가 형주(衡州)를 점령하자 하여필(夏汝弼)과 함께 상향현(湘鄕縣) 남쪽 백석봉(白石峰)으로 도피했다. 도피하는 기간인 8월에 둘째 형이 죽고, 오래지 않아 아버지와 숙부가 잇달아 죽었다.
1648년(30세) 봄 《역(易)》의 이치를 강술하고, 10월에 관사구(管嗣裘)‧하여필‧승성한(僧性翰) 등과 함께 남악의 방광사(方廣寺)에서 청나라에 항거하는 군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이리저리 피신하였다. 1650년(32세) 봄에 계림에서 정의가(鄭儀珂)의 딸(18세)과 재혼했다. 8월에 어머니인 담(譚)씨가 죽었다. 1651년(33세) 1월에 아내‧조카와 함께 형양으로 돌아왔다. 1653년(35세) 1월에 〈장영부(章靈賦)〉를 짓고, 2월에 셋째 아들인 물막(勿幕)을 낳았다.
1654년(36세) 8월에 청나라 정부의 수색을 피해 다시 유랑 생활을 시작했고, 겨울에 상령(常寧)에서 《주역》과 《춘추》를 강의했다. 1655년(37세) 봄에 침주(郴州) 흥령산(興寧山)의 절에 기거하면서 《주역외전(周易外傳)》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 해 8월에 《노자연(老子衍)》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1656년(38세)에 서장원(西庄源)으로 돌아왔고, 그 해 3월에 《황서(黃書)》를 집필했으며, 같은 해 5월에 넷째 아들인 어(敔)를 낳았다. 1657년(39세) 4월에 유랑 생활을 마치고 ‘속몽암’으로 돌아왔다. 그 해 12월에 유근노(劉近魯)를 방문하였고, 이후에 유근노의 장서 6000여 권을 자주 빌려 보았다.
1658년(40세) 9월에 《가세절록(家世節錄)》을 썼다. 1660년(42세)에 셋째 아들인 물막이 죽었다. 후에 형향현 금난향 고절리에 초옥을 짓고 이름을 ‘패엽려(敗葉廬)’라고 하였으며, 겨울에 《정락화시(正落花詩)》 10수를 지었다. 1661년(43세) 6월에 둘째 부인인 정씨가 죽었다. 1662년(44세)에 ‘패엽려’에 거하면서 남명(南明)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삼속비분시〉를 지었다. 1663년(45세) 9월에 《상서인의(尙書引義)》의 초고를 썼다. 1664년(46세)에 둘째 아들인 반이 유근노의 딸과 결혼하였다. 1665년(47세)에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을 수정하였다. 1666년(48세)에 《사서훈의(四書訓義)》를 집필하였고, 1667년(49세)에 오랜 벗인 유상현(劉象賢)과 어울리면서 유상현의 딸을 넷째 아들인 어와 혼인시키자고 하였다. 1668년(50세)에 《춘추가설》 3권과 《춘추세론(春秋世論)》 2권을 집필하였다. 1669년(51세)에 장(張)씨 부인을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해 봄에 《오십자정고(五十自定稿)》를 편찬했으며, 여름에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상‧하권을 찬술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초당을 지어 ‘관생거(觀生居)’라고 이름 지었다.
1671년(53세)에 《시광전(詩廣傳)》을 수정하였다. 1672년(54세)에 ‘관생거’에 살면서, 여름과 가을에는 여전히 ‘패엽려’에서 머물렀다. 그 해 봄에는 《노자연》을 다시 고쳤고, 8월에는 친구인 방이지(方以智)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시 두 수를 지어 애도를 표했다. 1673년(55세)에 《예기장구(禮記章句)》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1674년(56세)에 오삼계의 군대가 호남성의 각 곳을 공격하자, 제자인 당단홀(唐端笏)과 함께 배를 타고 도피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1675년(57세) 가을에 ‘관생거’에 돌아온 후, 석선산(石船山) 기슭에 초당을 지어 ‘상서초당(湘西草堂)’이라고 이름 짓고, ‘상서초당’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676년에 ‘상서초당’에서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를 찬하기 시작했다. 1677년(59세)에 《예기장구》 49권을 완성하였다.
1678년(60세) 윤3월에 오삼계가 형주에서 황제로 칭하면서 국호를 ‘대주(大周)’라고 하며 그의 무리들이 강제로 권진표(勸進表)를 쓰라고 하자, 그것을 거절하고 깊은 산 속으로 피난하여 〈볼계부(祓禊賦)〉를 지었다. 1679년(61세)에 청의 군대가 형주를 수복하자 장유모(章有謀)와 함께 청의 군대를 피해 숲속에 들어가서 《장자통(莊子通)》을 지었다. 1680년(62세)에 시집인 《육십자정고(六十自定稿)》를 편찬했다. 1681년(63세)에 《장자해(莊子解)》를 썼다. 1682년(64세) 9월에 《설문광의(說文廣義)》 2권을 썼고, 10월에 《악몽(噩夢)》 1권을 썼다. 1684년(66세)에 《사해(俟解)》를 썼다. 1685년(67세) 봄에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9권을 썼고, 8월에 《초사통석(楚辭通釋)》 14권을 썼으며, 9월에 《주역내전(周易內傳)》 6권과 《주역내전발례(周易內傳發例)》 1권을 지었다. 1686년(68세) 봄에 맏형이 죽었다. 1687년(69세)에 《독통감론(讀通鑑論)》을 찬하기 시작하였고, 1688년(70세)에 《칠십자정고(七十自定稿)》를 편성했다. 1691년(73세)에 오래된 병에도 불구하고 《독통감론》 30권과 《송론(宋論)》 15권의 집필을 완성하였다. 1692년(74세) 1월 2일(음력)에 ‘상서초당’에서 사망하였다.
(5) 주요저작
《독사서대전설(讀四書大全說)》, 《주역내전(周易内傳)》, 《주역외전(周易外傳)》, 《장자정몽주(張子正蒙注)》, 《상서인의(尚書引義)》, 《사서훈의(四書訓義)》, 《독통감론(讀通鑑論)》, 《사문록내‧외편(思問錄内)‧外篇》, 《설문광의(說文廣義)》, 《송론(宋論)》, 《속춘추좌씨전박의(續春秋左氏傳博議)》, 《장자통(莊子通)》, 《노자연(老子衍)》, 《시광전(詩廣傳)》, 《황서(黄書)》, 《소수문(搔首問)》, 《주역내전발례(周易内傳發例)》, 《주역대상해(周易大象解)》, 《사해(俟解)》, 《악몽(噩夢)》 외 다수.
3. 서지사항
《주역외전(周易外傳)》은 총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건(乾), 곤(坤), 둔(屯), 몽(蒙), 수(需), 송(訟), 사(師), 비(比), 소축(小畜), 이(履), 태(泰), 비(否) 등의 괘이다. 2권은 동인(同人), 대유(大有), 겸(謙), 예(豫), 수(隨), 고(蠱), 임(臨), 관(觀), 서합(噬嗑), 비(賁), 박(剝), 복(復), 무망(无妄), 대축(大畜), 이(頤), 대과(大過), 감(坎), 이(離) 등의 괘이다. 3권은 함(咸), 항(恒), 돈(遯), 대장(大壯), 진(晉), 명이(明夷), 가인(家人), 규(睽), 건(蹇), 해(解), 손(損), 익(益), 쾌(夬), 구(姤), 췌(萃), 승(升), 곤(困), 정(井) 등의 괘이다. 4권은 혁(革), 정(鼎), 진(震), 간(艮), 점(漸), 귀매(歸妹), 풍(豐), 여(旅), 손(巽), 태(兌), 환(渙), 절(節), 중부(中孚), 소과(小過), 기제(旣濟), 미제(未濟) 등의 괘이다. 5권은 계사상전 제1장(繫辭上傳第一章), 계사상전 제2장, 계사상전 제3장, 계사상전 제4장, 계사상전 제5장, 계사상전 제6장, 계사상전 제7장, 계사상전 제8장, 계사상전 제9장, 계사상전 제10장, 계사상전 제11장, 계사상전 제12장 등이다. 6권은 계사하전 제1장(繫辭下傳第一章), 계사하전 제2장, 계사하전 제3장, 계사하전 제4장, 계사하전 제5장, 계사하전 제6장, 계사하전 제7장, 계사하전 제8장, 계사하전 제9장, 계사하전 제10장, 계사하전 제11장, 계사하전 제12장 등이다. 7권은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 등이다.
이 《주역외전(周易外傳)》은 왕부지가 1655년(37세)에 지은 것으로, 《선산전서(船山全書)》 제1책(船山全書編輯委員會編校, 嶽麓書社, 1988)에 실려 있다.
4. 내용
《주역외전(周易外傳)》은 왕부지의 기철학적 세계관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저서이다. 왕부지는 고요한 리(理)를 우주의 본원으로 여기고 기(氣)를 리의 재료로 여기는 성리학적 관점을 비판한다. 그는 운동하는 기(氣)를 세계의 존재 근거로 여기고, 리(理)를 기의 조리(條理)로 여긴다. 왕부지에 의하면 천지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기(氣)이다. 기는 항상 움직인다. 움직임은 도(道)의 중추요, 덕(德)의 창(窓)이다. 도를 기의 도라고 할 수는 있어도, 기를 도의 기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불변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 의해 구체적인 현실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아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고도의 추상적 사유를 도출하는 방식이다.
5. 가치와 영향
기철학적 관점에 의해 정립된 《주역외전》의 사상은 ‘정중동(靜中動)’의 논리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관점을 비판하고, ‘동중정(動中靜)’의 관점을 지향하므로 공리공담의 폐해를 극복하여 실제적인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미쳤다.
왕부지의 이 철학은 20세기에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통해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미쳤다. 이 철학은 현대 중국의 철학계뿐만 아니라, 21세기인 현재에도 실제적인 일에서 타당함을 찾고자 하는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의 철학계에도 왕부지의 철학이 영향을 많이 미치고 있다. 왕부지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 학자들 역시 세월의 흐름에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천지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은 모두 기(器)이다.[盈天地之間 皆器矣]” 《주역외전》 〈계사 상전 제12장〉
‧ “천하는 오직 기(器)일 뿐이다. 도는 기의 도이고, 기를 도의 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天下惟器而己矣 道者器之道 器者不可謂之道之器也]” 《주역외전》 〈계사 상전 제12장〉
‧ “태허는 본래 움직이는 것이다.[太虛者 本動者也]” 《주역외전》, 〈계사 하전 제5장〉
‧ “움직임은 도의 지도리요, 덕의 창이다.[動者道之樞 德之牖]” 《주역외전》 〈계사 하전 제1장〉
‧ “움직임은 반드시 먼저이고, 고요함은 반드시 따른다.[動者必先 靜者必隨]” 《주역외전》 〈계사 상전 제9장〉
(2) 색인어:왕부지(王夫之), 선산(船山), 주역외전(周易外傳), 음양(陰陽), 기철학(氣哲學)
(3) 참고문헌
‧ 船山全書 第1冊 周易內傳(船山全書編輯委員會編校, 嶽麓書社)
‧ 王船山哲學(曾昭旭, 遠景出版事業公司)
‧ 王夫之辨證法思想引論(蕭箑父 主編, 湖北人民出版社)
‧ 王船山硏究著作述要(朱迪光, 湖南大學出版社)
‧ 〈王船山思想國際學術硏討會 相關論文題錄索引〉(中國人民大學書報資料中心, 2019. 10)
‧ 〈紀念王船山誕辰400周年 王船山思想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上‧下冊, 2019. 10)
【이철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