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역정의(周易正義)》는 당대(唐代)에 편찬된 《오경정의(五經正義)》 중의 하나로, 왕필(王弼)・한강백(韓康伯)의 주(注)와 공영달(孔穎達)의 소(疏)로 구성되어 있다.
2. 저자
(1) 성명:왕필(王弼)(226~249)・한백(韓伯)(332~380), 공영달(孔穎達)(574~648)
(2) 자(字)・별호(別號):왕필의 자는 보사(輔嗣)이고, 한백의 자는 강백(康伯)인데 이름보다 자字로 알려졌으며, 공영달의 자는 중원(沖遠) 혹은 중달(仲達)이다.
(3) 출생지역:왕필은 산양(山陽) 고평(高平) 사람이고, 한강백은 영천(潁川) 장사(長社) 사람이며, 공영달은 기주(冀州) 형수(衡水) 사람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왕필은 삼국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부친 왕업(王業)은 상서랑(尙書郞)을 역임하였고, 조부 왕개(王凱)는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과 친형제였다. 어려서부터 지혜로웠고 십여 세에 《노자(老子)》를 좋아하였으며 언변에 능통하였다. 배휘(裴徽)와 하안(何晏) 등에게 깊은 인정을 받아 상서랑(尙書郞)에 등용되기도 하였으나 조상(曹爽)이 사마의(司馬懿)에게 패함으로써 함께 면직되었다. 24세에 병으로 조사(早死)하였으며 후사가 없었다.
한강백은 생애나 활동에 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고 생몰년 또한 미상인데, 여가석(余嘉錫)이 《건강실록(建康實錄)》을 가지고 그의 생몰년을 332~380으로 고증한 바 있다. 왕필의 역학(易學)을 충실히 계승하였으며 공영달은 한강백이 왕필에게 직접 수학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공영달은 당나라 때의 저명한 경학가(經學家)로, 공자(孔子)의 32대 손이다.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고 유작(劉灼)에게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오경(五經)에 밝았다. 국자 사업(國子司業)・국자 좨주(國子祭酒)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에 태상경(太常卿)에 추증되었다.
(5) 주요저작
왕필의 저작에는 《노자주(老子注)》・《주역주(周易注)》・《주역약례(周易略例)》・《논어석의(論語釋義)》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중 《논어석의》는 전하지 않고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 및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에 단편적으로 보일 뿐이다.
한강백은 《주역》의 십익(十翼) 중 〈계사전(繫辭傳)〉・〈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잡괘전(雜卦傳)〉에 주석을 남겼고, 이것이 《주역정의》에 주(注)로 채택되었다.
공영달은 《오경정의》의 편찬을 주도하였는바, 《주역정의》・《상서정의(尙書正義)》・《모시정의(毛詩正義)》・《예기정의(禮記正義)》・《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 소(疏)의 대표 저자이다. 《주역정의》의 소(疏)를 비롯하여 《오경정의》의 소(疏)는 공영달의 단독 저작이 아니고 당시 여러 학자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 것이지만, 공영달이 제1의 찬정자(撰定者)이고 일을 주관한 사람이었기에 《오경정의》 소(疏)의 작자로 공영달을 꼽는 것이다. 《수사(隋史)》의 수찬(修撰)에도 참여하였다.
3. 서지사항
《주역정의》는 왕필의 《주역주》를 따라 금역(今易) 체제를 따랐다. 《주역》의 편집체제는 크게 고역(古易)과 금역(今易)으로 구분된다. 《주역》은 본래 64괘와 괘사(卦辭) 및 효사(爻辭)로 구성된 것이고, 〈계사전〉 등의 십익은 후대에 지어진 전(傳)인바, 애초에 《주역》과 십익은 각각의 책으로 통용되었다. 이렇게 경(經)과 전(傳)이 분리되어 있는 체제를 고역(古易)이라 한다. 그러나 서한(西漢)의 비직(費直)이 〈단전(彖傳)〉과 〈상전(象傳)〉으로 경문(經文)을 해석하고서 처음으로 두 전(傳)을 경문 뒤에 붙였으며, 이후 정현(鄭玄)과 왕필이 이를 따라 아예 괘사와 효사 아래에 〈단전〉과 〈상전〉을 잘라 붙이고 건괘(乾卦)・곤괘(坤卦)의 〈문언전(文言傳)〉도 각각의 괘(卦) 밑에 붙이고서 ‘단왈(彖曰)’, ‘상왈(象曰)’, ‘문언왈(文言曰)’을 덧붙여 경문(經文)과 전문(傳文)을 구별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편집본을 금역이라 하는데, 《주역정의》가 왕필의 주석를 채용하여 이러한 편집 방식을 따름으로써 이후로는 금역의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주역정의》는 왕필・한강백의 주와 공영달의 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강백의 주석이 채용된 이유는 왕필이 〈계사전〉・〈설괘전〉・〈서괘전〉・〈잡괘전〉에 주석을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네 전(傳)에 있어서는 한강백의 주석이 채용되었다.
책의 서두에는 공영달이 쓴 〈주역정의서(周易正義序)〉와, 8가지 주제로 쓴 《주역》에 관한 서술(〈주역정의권수(周易正義卷首)〉)이 나열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주역정의》의 편찬경위와 《주역》의 여러 주석에 대한 공영달의 평을 확인할 수 있고, 〈주역정의권수〉에서는 공영달의 역학관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통용되는 《주역정의》는 모두 10권으로,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와 청대(淸代)의 완원(阮元)의 〈중각송판주소총목록(重刻宋板注疏總目錄)〉에 모두 10권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공영달의 〈주역정의서(周易正義序)〉에서는 14권이라고 하였고, 《구당서(舊唐書)》 〈경적지(經籍志)〉에서는 18권이라고 하였으며, 《직재서록해재(直齋書錄解題)》에서는 13권이라고 하였는바, 이에 대해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왕필과 한강백의 주본(注本)이 10권이므로 아마도 후대 사람이 이 주본을 따라서 편집한 듯하다.”라고 추측하였다.
4. 내용
《주역정의》가 금역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철저하게 의리(義理)에 의거하여 《주역》의 경문을 해석하고 있다. 《주역》은 본래 점을 치는 책, 즉 점서(占書)이고, 괘사와 효사는 모두 점사(占辭)이며, 〈단전〉과 〈상전〉 등의 십익은 이 점사 안의 도덕적 원리와 교훈적 의의를 특별히 표출한 주석이다. 만일 이 주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괘효사를 해석하면, 괘효사를 보편적 교훈이나 일반적 경계(警戒)의 말로 이해할 수 있는바, 이는 《주역》의 의리서(義理書)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것이 금역 체제를 채택하는 목적이다.
왕필은 현묘한 이치를 중심으로 하는 사변적이고 분석적 학풍을 일으켰는데 이를 현학(玄學)이라 한다. 그는 《주역》의 해석에 있어서도 이러한 관점을 적용하여, 당시에 횡행하던 상수역(象數易)을 배척하고 의리역(義理易)의 전통을 창시하였으며, 특히 현학(玄學)의 의리를 사용하였는바, 한강백 역시 이를 철저히 따랐다. 왕필의 이러한 역학관은 《주역약례》 〈명상(明象)〉의 “뜻을 얻으면 상을 버린다.[得意而忘象]”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공영달 역시 왕필의 의리역을 계승하였는바, 이는 공영달이 ‘소는 주를 깨뜨리지 않는다[疏不破注]’는 원칙을 철저히 따른 데에 연유한 것이다. 공영달의 소에 한대(漢代)의 위서(緯書)나 《자하역전(子夏易傳)》의 말, 정현(鄭玄) 등 선유(先儒)의 말이 채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 역시 왕필의 주를 기준으로 그 시비를 판단하고 있다. 이렇듯 공영달의 소가 왕필과 한강백의 주를 충실히 따르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에 매몰되지도 않았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주에서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뜻이 있으면 소에서 그것을 보충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예컨대 환괘(渙卦)의 〈단전〉을 해석하면서 왕필은 ‘나무배’라는 상(象)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공영달은 이 상(象)을 소에서 언급함으로써 그 부족함을 채웠다.
5. 가치와 영향
《주역정의》는 역학의 주류를 상수역에서 의리역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한대(漢代)의 역학은 상수역이 주류였는데, 왕필 당시에 상수역은 말류적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번쇄한 상(象)에 구애되어 본의(本義)를 잃는다거나, 상수를 자의적으로 적용하여 견강부회하는 문제 등이 있었던 것이다. 왕필은 《주역주》를 통해 이러한 병폐를 일소하고 《주역》 안에 담겨있는 철학적 의미와 보편적 원리를 발휘하고자 하였는데, 공영달이 이를 《주역정의》의 주注로 채택하고 그 관점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그 목표를 계승・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명과 암이 있다. 역학사(易學史)의 측면에서 보면, 《주역정의》에 왕필의 주가 채택되고 공영달이 이외의 학설은 경시하였기에, 《주역정의》가 편찬된 이후로 왕필 외의 제가(諸家)의 주석과 학설이 대부분 폐기되고 말았다. 특히 정현(鄭玄)의 역학은 《주역정의》가 편찬되기 전에는 왕필의 역학과 대등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주역정의》 편찬 후에 그 힘을 잃고 그 책마저 일실(逸失)되었다. 당대(唐代)의 학자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역정의》를 표준으로 하여 공부해야 했기에 그 밖의 학설이 폐해지게 된 것이니, 이를 공영달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당(唐) 이전 역학가들의 글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공영달이 《주역정의》에서 인용한 일문(逸文)들이 당 이전의 역학을 연구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 책이 전래된 정확한 경로나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당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하던 삼국시대에 《주역정의》를 비롯한 《오경정의》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후로는 성리학이 부동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고, 역학 역시 정주(程朱)의 역학이 학계를 주도하였다. 《주역》의 주석서라면 당연히 정주의 《주역전의(周易傳義)》를 칭하는 것이었고, 《주역》을 연구하거나 새로운 주석을 쓸 때에도 《주역전의》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주역》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주역정의》를 참고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 자체가 연구의 대상이 되거나 학습의 교재가 되지는 못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초구는 잠긴 용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初九 潛龍 勿用]”(건괘(乾卦) 초구(初九) 효사(爻辭))
• “초구에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공자가 말씀하셨다. ‘용의 덕(德)을 가지고 은둔한 자이니, 세상에 따라 변하지 아니하며,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아니하여 세상에 은둔하여도 근심함이 없으며 이것(善)을 보지 못하여도 근심함이 없어서 즐거우면 행하고 근심스러우면 떠나가서 확고하여 뽑을 수 없는 것이 잠긴 용이다.’[初九曰 潛龍勿用 何謂也 子曰 龍德而隱者也 不易乎世 不成乎名 遯世无悶 不見是而无悶 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 潛龍也]”(건괘 초구 효사의 〈문언전(文言傳)〉)
• “육이는 곧고 방정方正하고 크다.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六二 直方大 不習无不利]”(곤괘(坤卦) 육이(六二) 효사)
• “‘직(直)’은 바름이요 ‘방(方)’은 의로움이다. 군자가 공경하여 안을 곧게 하고 의롭게 하여 밖을 방정하게 해서, 경(敬)과 의(義)가 서면 덕(德)이 외롭지 않으니, ‘곧고 방정하고 커서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그 행하는 바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直 其正也 方 其義也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直方大不習无不利 則不疑其所行也]”(곤괘 육이 효사의 〈문언전〉)
• “우러러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굽어 지리(地理)를 살핀다. 이 때문에 유형과 무형의 일을 알며 사물의 시초와 종말을 따져서 궁구하고 반복해 연구한다. 그러므로 사생(死生)의 수(數)를 아는 것이다.[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之故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계사전(繫辭傳) 상〉
(2) 색인어:왕필(王弼), 한강백(韓康伯), 공영달(孔穎達), 주역정의(周易正義), 주역주(周易注), 의리역(義理易)
(3) 참고문헌
• 《王弼集校釋》(樓宇烈, 華正書局有限公司)
• 《주역:왕필주》(임채우 역, 길)
• 《周易傳義大全》(성백효 역, 전통문화연구회)
• 《周易折中》(臺灣商務印書館)
• 《周易正義》(北京大學出版社)
• 《周易集解》(中華書局)
• 〈왕필의 得意忘象에 관한 연구〉(구미숙, 《대동철학》 42, 2008)
• 〈왕필 《주역》 해석의 특징에 관한 연구:《주역약례周易略例》를 중심으로〉(신상후, 《철학연구》 125, 2019)
• 《The Classic of Changes:A New Translation of the I Ching as Interpreted by Wang Bi》(Richard J. Lynn, Columbia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