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춘추곡량전주소(春秋穀梁傳注疏)》는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대한 주석서로서, 진(晉)나라 범영(范甯)의 주(注)와 당(唐)나라 양사훈(楊士勳)의 소(疏)로 구성되어 있다. 《춘추》 삼전(三傳) 중에서 《공양전》과 《좌씨전》이 한대(漢代) 이후 성행했던 것과는 달리, 《곡량전》은 그 학문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였고 그 세력도 또한 매우 미약하였다.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 잠시 학관에 세워졌지만,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14박사 중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위(曹魏) 시대에 10박사를 증설할 때 《곡량전》이 잠시 포함되기도 했지만, 진(晉) 원제(元帝) 때 박사를 줄이면서 《곡량전》은 그 깊이가 얕다는 이유로 마침내 퇴출되었다. 이후로 《곡량전》은 더욱 쇠미해졌으며, 청대 이후로부터 현재까지 《곡량전》 관련 저술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진(晉)나라 범영(范甯)의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와 당唐나라 양사훈(楊士勛)의 《곡량전소(穀梁傳疏)》가 있을 뿐이다.
2. 저자
(1) 성명:범영(范甯)(339∼401), 양사훈(楊士勳)(생몰년 미상)
(2) 자(字)・별호(別號):범영은 자는 무자(武子)이고, 양사훈은 미상이다.
(3) 출생지역: 범영은 남양(南陽) 순양(順陽)(현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출생이고, 양사훈은 미상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범영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독실하게 하였고, 많은 전적을 폭넓게 읽었다. 관직은 여항령(餘杭令)・임회태수(臨淮太守)・중서시랑(中書侍郞)・예장태수(豫章太守)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의 죄에 대해 논하면서 그들이 걸주(桀紂)보다 더 심하다는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는 《곡량전》에 대한 좋은 해석이 없다고 여겨서, 오랜 기간 깊이 사고하여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를 지었다. 그 의리가 정밀하고 자세하여 당시 세상의 중시를 받았다. 범영은 《춘추곡량전집해》 이외에 또 조례(條例)를 깊이 연구하였다. 양사훈(楊士勳)의 소(疏)에서 인용한 내용을 살펴보면, 조례와 관련된 범영의 글을 《범례(范例)》・《범씨약례(范氏略例)》・《범씨별례(范氏別例)》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렀다. 이것은 모두 합쳐서 20여 조목인데, 대부분 《춘추곡량전집해》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다.
양사훈은 당나라 정관(貞觀) 때의 사람인데, 그에 대한 사적은 고찰할 수가 없다. 당나라 정관(貞觀) 7년에 태종(太宗)이 조칙을 내려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도록 했는데, 당시 사문박사(四門博士)였던 양사훈은 공영달(孔穎達)의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 편찬에 참여하였다. 《곡량전》의 편찬은 양사훈 혼자서 그 일을 전담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사훈의 《곡량전》 장공(莊公) 27년 소(疏)에서, “선사(先師) 유현(劉炫)이 그것을 비난했다.”고 해설한 것을 통해 그가 수(隋)나라 유현의 제자임을 알 수 있다.
(5) 주요저작:범영은 《춘추곡량전집해》 이외에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춘추곡량전례(春秋穀梁傳例)》 1권과 《박숙원문곡량의(薄叔元問穀梁義)》 2권 등이 수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박숙원문곡량의》는 《춘추곡량전집해》 이후에 나온 책으로, 당시에 숙원叔元이 《곡량전》을 연구하여 범영에게 반박하여 질문한 것이 있었고, 범영이 그 질문에 따라 조목조목 대답한 것이다. 이 책은 하휴의 《곡량폐질(穀梁廢疾)》을 반박한 정현의 《석폐질(釋廢疾)》의 체례를 모방한 것이다. 양사훈은 《곡량전소》 20권이 있다.
3. 서지사항
범영(范甯)의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와 《신구당서(新舊唐書)》 〈경적지(經籍志)〉에 모두 12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범영은 《곡량전》에 주석을 단 자신의 책을 ‘집해(集解)’라고 명명했지만, 이 책은 두예(杜預)의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와는 그 성격이 같지 않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 의하면, 이 책은 문생(門生)과 고리(故吏), 자제(子弟) 등의 이론을 모아서 《곡량전》의 주석을 단 책인데, 각각 그 이름을 나열해놓고 있기 때문에 ‘집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서(晉書)》 〈범영전(范甯傳)〉에서 “범영의 이 책은 세상에서 중시되었다. 얼마 있다가 서막(徐邈)이 다시 거기에 주(注)를 달았는데, 세상에서 그 책도 또한 칭찬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오히려 서막의 주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곡량전》은 처음에 경(經)과 전(傳)이 별도로 통행되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범영이 경과 전을 합쳐서 함께 주석을 달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범영이 전(傳)을 경(經)에 붙일 때, 경문의 모든 조목마다 모두 ‘전왈(傳曰)’이라는 두 글자를 가장 앞에 기록해 넣은 듯하다. 그것은 정현(鄭玄)과 왕필(王弼)의 《역(易)》에 ‘단왈(彖曰)’・‘상왈(象曰)’이 있는 사례와 같다. 이후에 옮겨 적는 자들이 그것을 모두 삭제했는데, 이 다섯 조목은 미처 다 삭제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즉 범영이 경과 전을 합칠 때, ‘전왈’ 두 글자를 모든 경문(經文) 조목의 전문(傳文) 앞에 더해서 기록했는데, 뒤에 옮겨 적은 자들이 그것을 모두 삭제하고, 현재는 단지 5조목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대 학자들 중에서 《곡량전》을 해석한 것은 윤경시(尹更始)가 지은 장구(章句)가 유일하며, 위진(魏晉) 시대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주(注)를 지었다. 《수서》 〈경적지〉를 살펴보면, 미신(麋信)・당고(唐固)・장정(張靖)・서건(徐乾)・정천(程闡)・손육(孫毓)・공연(孔衍)・범영(范甯)・유조(劉兆)・강희(江熙)・호눌(胡訥)・유요(劉瑤) 등이 있다. 이들의 《곡량전》 주석 중에서도 미신・범영의 주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앞뒤로 학관에 세워졌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범영의 주가 유일하다. 양사훈의 《곡량전소(穀梁傳疏)》는 《신당서》 〈경적지〉에는 12권으로 수록되어 있고, 《구당서》 〈경적지〉에서는 13권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지금 전하는 것은 20권이다. 《숭문총목(崇文總目)》에서 송대에 이 책을 “형병(邢昺) 등이 조칙을 받들어 바로잡고 태학에서 전수하도록 했다.”고 하니, 이 책이 송대에 학관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통행되고 있는 《춘추곡량전주소》의 정리본은 다음과 같다.
• 《(문연각(文淵閣))사고전서(四庫全書) 춘추곡량전주소(春秋穀梁傳注疏)》(대북(臺北):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1983)
•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춘추곡량전주소(春秋穀梁傳注疏)》(이학근(李學勤) 주편(主編), 북경대학출판사(北京大學出版社), 2000).
4. 내용
범영의 《곡량전》 주(注)는 복건(服虔)과 두예(杜預)의 《좌씨전》 주(注), 하휴(何休)와 엄팽조(嚴彭祖)의 《공양전》 주(注)를 본받으려고 한 것이다. 그는 한위(漢魏) 시대 학자들이 《좌씨전》과 《공양전》을 끌어와서 《곡량전》을 해석한 것을 비판했는데, 《곡량전》을 전문적인 학문으로 세우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춘추곡량전주소》 〈자서〉에서 “명례(名例)를 헤아리고 검토하여, 의심스럽고 막힌 내용을 상세하게 진술했으며, 여러 학자들의 같거나 다른 이론을 널리 제시하였다.”고 했다. 또한 양사훈의 소에서 범영이 별도로 지은 《약례(略例)》 100여 조목이 있다고 했고, 범영의 주에서도 “《곡량전》의 예(例)에서 말하기를[(傳例曰)]”이라는 말이 있으니, 범영이 《곡량전》을 공부하면서 예(例)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범영은 《춘추》 삼전(三傳)의 장단점에 대해 《춘추곡량전주소》 〈자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좌씨전》은 문장이 화려하면서 풍부하지만, 그 단점은 내용이 터무니없다는 데 있다. 《곡량전》은 문장이 깨끗하고 완곡하지만, 그 단점은 내용이 단편적이라는 데 있다. 《공양전》은 문장이 분별과 결단이 뛰어나지만, 그 단점은 내용이 비속하다는 데 있다.” 그는 《춘추》 삼전의 장점을 함께 채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만약 문장이 풍부하면서도 터무니없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짧지 않으며, 결단하면서도 비속하지 않다면, 《춘추》의 도를 깊이 터득한 자이다. 따라서 군자는 《춘추》에 대해 죽고 나서야 그만둔다.”라고 했다.
이처럼 범영은 학파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강력한 문호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하휴나 두예와는 결코 같지 않았다. 따라서 “대체로 전(傳)이란 경(經)을 통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삼아야 하며, 경(經)은 반드시 합당한 것을 이치로 삼아야 한다. 지극히 합당한 것은 두 가지가 없다. 삼전이 이론을 달리하지만, 어찌 그 막힌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처럼 범영의 《춘추》 해석은 《공양전》・《좌씨전》 두 전의 이론을 많이 사용했으며, 《좌씨전》의 기사를 채용하여 《곡량전》의 문장을 해석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범영은 《곡량전》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도 공격한 것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춘추》 은공(隱公) 원년, “정나라 임금이 언에서 단을 이겼다.[鄭伯克段於鄢]”의 《곡량전》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정나라 임금과 같은 경우에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천히 쫓아서 도적을 놓아주는 것이 친한 이를 친애하는 친친(親親)의 도리이다.” 이에 대해 범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과 부모에 대해서는 장차 죽이려고 해서도 안 되니, 장차 죽이려고만 해도 반드시 필주한다. 이것이 신자(臣子)의 도리인데, 그것을 어긴 것이 자기에게 있었기 때문에 형제간의 은혜로 확장해서 해석한 것이다.” 여기에서 《곡량전》의 “천천히 쫓아서 도적을 놓아주는 것이 친한 이를 친애하는 친친(親親)의 도리이다.”라는 말은 《공양전》 민공(閔公) 원년의 문장이며, “임금과 부모에 대해서는 장차 죽이려고 해서는 안 되니, 장차 죽이려고만 해도 반드시 필주한다.”는 말은 《공양전》 장공(莊公) 32년의 문장이다. 이와 같이 범영은 만약 《곡량전》에서 “가르침을 손상시키거나 의리를 해치는” 경우가 있으면, 《좌씨전》・《공양전》을 가지고 절충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傳)을 버리고 경(經)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양사훈(楊士勳)의 소(疏)는 범영 주의 의리를 드러내 밝히는 것을 위주로 했는데, 문자의 훈고(訓詁)와 전장(典章)・문물(文物)을 교정하여 바로잡은 것은 비교적 적다. 따라서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양사훈의 소가 《좌씨전》의 공영달(孔穎達) 소가 “두루 갖추고 있는 것”만 못하다고 평가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청대(淸代) 학자 피석서(皮錫瑞)의 《춘추통론(春秋通論)》에서 말했다. “범영은 삼전(三傳)을 함께 채용하고, 한 학파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대(唐代)의 담조(啖助)・조광(趙匡)・육순(陸淳)의 선하를 열었고, 한 분야의 전문적인 학파를 형성했던 한대(漢代) 학자들과는 달랐다.” 이것은 범영의 주가 후세의 춘추학에 끼친 영향을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범영이 《공양전》・《좌씨전》 두 전을 함께 채용한 것에 대해 후세 학자들은 높이 평가했는데, 특히 송대 학자들이 크게 칭찬하였다. 조열지(晁說之)가 말했다. “《곡량전》은 한나라 때에 늦게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좌씨전》・《공양전》의 잘못을 살펴서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의 정밀함과 깊음, 원대함은 자하(子夏)가 전수한 것을 곧바로 받은 것인가? 범영은 또한 여러 학자들을 근거로 삼아서 그것을 널리 변별하고, 《곡량전》의 뜻을 진술하였다. 그는 시비에 대해서는 또한 공정함이 적었지만, 오로지 《좌씨전》만을 진술하고 허둥지둥하면서 감히 같고 다름을 구별하지 못한 두예(杜預)와는 같지 않았다.” 왕석(王晳)이 말했다. “한대에 학교를 숭상한 이후로 삼전이 번갈아가면서 흥성했는데, 가의(賈誼)의 재능과 동중서(董仲舒)의 문장, 유향(劉向)・유흠(劉歆)의 학문을 가지고도 오히려 사설(師說)에 빠져서 두루 능통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 학자들은 어떠했겠는가? 스승의 학문만을 오로지 연구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룬 것은 하휴・두예・범영뿐이다. 그런데 하휴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기만했고, 두예는 《좌씨전》의 문장만을 굳게 고집했는데, 그나마 스스로 깨우친 사람은 오직 범영뿐이었다.” 황진(黃震)이 말했다. “두예는 《좌씨전》에 주석을 달고, 오로지 《좌씨전》만을 위주로 하였다. 하휴는 《공양전》에 주석을 달고, 오로지 《공양전》만을 위주로 하였다. 오직 범영만이 사사로이 《곡량전》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고, 삼가(三家)의 잘못을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그런데 청나라 중엽 이후에 《공양전》이 발흥하고, 한 분야를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풍이 형성되자, 범영의 주를 비판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청대의 장침(章梫)이 말했다. “범영은 진대(晉代)에 떨치고 일어나 《춘추곡량전집해》를 지었다. 그의 뜻은 《곡량전》의 가학(家學)을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범영의 학문은 정현을 사숙함으로써 하휴처럼 한 가지 학문을 묵수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10명의 전문가를 비판했지만, 《춘추곡량전집해》 속에서 그들의 폐단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여전히 적지 않다.” 정남(征南)도 “《곡량전》을 해석한 사람이 비록 10명에 가깝지만, 범영이 또한 《좌씨전》・《공양전》을 인용하여 《곡량전》을 해석하니, 문장의 의미가 어긋나서 해가 될 뿐이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범영의 《춘추곡량전집해》가 단지 후한시대 경전 연구의 말단적인 관습을 답습한 것일 뿐이며, 범영의 주 때문에 《곡량학》이 끝내 다시 흥기하지 못했다는 평가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범영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양사훈의 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청대 종문증(鍾文烝)이 말했다. “범영의 주는 간략하면서 어긋나고, 양사훈의 소는 깊이가 얕으면서 난잡하기 때문에 만약 잘 갖추어서 보완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장차 곡량씨(穀梁氏)의 훌륭한 진면목을 좌씨(左氏)와 공양씨(公羊氏)에 의해 영원히 가려지도록 할 것이니, 사문(斯文)의 흠결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이와 같이 청대 학자들의 《곡량전》 연구는 범영 주와 양사훈 소의 잘못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좌씨전》은 문장이 화려하면서 풍부하지만, 그 단점은 내용이 터무니없다는 데 있다. 《곡량전》은 문장이 깨끗하고 완곡하지만, 그 단점은 내용이 단편적이라는 데 있다. 《공양전》은 문장이 분별과 결단이 뛰어나지만, 그 단점은 내용이 비속하다는 데 있다. 만약 문장이 풍부하면서도 터무니없는 내용이 없고, 깨끗하면서도 단편적이지 않으며, 결단적이면서도 비속적이지 않다면, 그 도를 깊이 터득한 자이다. 따라서 군자는 《춘추》에 대해 죽고 나서야 그만둔다.[左氏豔而富 其失也巫 穀梁淸而婉 其失也短 公羊辯而裁 其失也俗 若能富而不巫 淸而不短 裁而不俗 則深於其道者也 故君子之於春秋 沒身而已矣]” 《춘추곡량전주소春秋穀梁傳注疏》 범영(范甯)의 〈서(序)〉
• “대체로 전(傳)이란 경(經)을 통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삼아야 하며, 경(經)은 반드시 합당한 것을 이치로 삼아야 한다. 지극히 합당한 것은 두 가지가 없다. 삼전(三傳)이 이론을 달리하지만, 어찌 그 막힌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모두가 합당하지 않다면 본래 모두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지극한 말이 감추어지고 끊어졌다면, 좋은 것을 선택하여 따를 수가 없으니, 어찌 삼전을 함께 버려두고서 으뜸이 되는 것을 찾고, 이치에 근거하여 경전을 통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이치상 완전히 합당하지는 않더라도, 어찌 합당함을 얻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드물게 통하게 된 것을 스스로 끊어버릴 수 있겠는가?”[凡傳以通經爲主 經以必當爲理 夫至當無二 而三傳殊說 庸得不棄其所滯 擇善而從乎 旣不俱當 則固容俱失 若至言幽絶 擇善靡從 庸得不並舍以求宗 據理以通經乎 雖我之所是 理未全當 安可以得當之難 而自絶於希通哉] 《춘추곡량전주소》 범영의 〈서〉
• “《곡량전》은 가장 늦은 한나라 때 나왔기 때문에 《좌씨전》・《공양전》의 오류를 살펴서 바로잡을 수 있었다. 《곡량전》의 정밀하고 깊으며 원대한 내용은 진실로 자하(子夏)가 전수한 것을 얻은 것이다. 범영은 또한 여러 학자들의 이론에 근거하여 그것을 폭넓게 변론하여 《곡양전》의 뜻을 펼쳤으니,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다소간 공평하다. 두예(杜預)가 오로지 《좌씨전》의 뜻만을 펼쳐서, 불안하게 그 해석의 동이同異를 감히 변론하지 못한 것과는 같지 않다.” 《춘추통론(春秋通論)》(피석서(皮錫瑞))
(2) 색인어:범영(范甯), 양사훈(楊士勳), 춘추곡량전주소(春秋穀梁傳注疏), 춘추곡량전집해(春秋穀梁傳集解), 곡량전소(穀梁傳疏),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학(春秋學), 곡량학(穀梁學), 삼전(三傳)
(3) 참고문헌
• 《春秋穀梁傳注疏》(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左傳正義》(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公羊傳注疏》(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公羊學史》(曾亦・郭曉東, 上海:華東師範大學, 2017)
• 《春秋學史》(趙伯雄,濟南:山東敎育出版社, 2004)
• 《春秋學史》(戴維, 長沙:湖南敎育出版社, 2004)
• 《춘추곡량전》(곡량자穀梁子 지음, 박성진 옮김,지식을만드는지식, 2018)
• 《춘추논쟁》(김동민, 글항아리, 2014)
• 《국가와 백성 사이의 漢》(히하라 도시쿠니 지음, 김동민 옮김, 글항아리, 2013)
• 〈공양학公羊學과 곡량학穀梁學의 대립을 통해 본 한대漢代 춘추학春秋學의 성격〉(김동민,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논집》18, 2006)
【김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