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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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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대한 주석서로서, 한(漢)나라 하휴(何休)의 주(注)와 당(唐)나라 서언(徐彦)의 소(疏)로 구성되어 있다. 하휴는 당시 공양학(公羊學)의 쇠퇴와 좌씨학(左氏學)의 부흥이라는 상황이 모두 공양학 계열 학파의 학문 태도에 기인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그는 공양학의 내실화와 종합화를 통해 전한(前漢) 시대 공양학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춘추공양경전해고(春秋公羊經傳解詁)》이다. 서언의 《춘추공양소(春秋公羊疏)》는 하휴의 주(注)를 소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하휴가 말한 이론과 의례(義例)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그것을 증명하고 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춘추공양전주소》는 《춘추공양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종합하고 공양학의 주요한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공양학이 하나의 전문적인 학문으로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저술이다.

2. 저자

1) 하휴(何休)
(1) 성명:하휴(何休)(129∼182)
(2) 자(字):자는 소공(邵公)
(3) 출생지역:임성국(任城國) 번현(樊縣)(현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4) 주요활동과 생애
《후한서(後漢書)》 〈유림열전(儒林列傳)〉에 의하면, 하휴는 사람됨이 질박하고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평소에 생각이 깊고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하여 당시 학자들 중에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었다. 당시에 태부(太傅) 진번(陳蕃)의 당인(黨人)으로서 정치에 참여했다가, 진번의 패망으로 인해 당고(黨錮) 사건에 연루되어 17년 동안 금고(禁錮)를 당했다. 그 시기 동안 문밖을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여 공양학의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는 당시 학관에 세워졌던 엄팽조(嚴彭祖)와 안안락(顏安樂)의 학문이 기존의 이론만을 묵수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춘추공양묵수(春秋公羊墨守)》·《춘추좌씨고황(春秋左氏膏肓)》·《춘추곡량폐질(春秋穀梁廢疾)》을 지었다. 그리고 스승인 박사 양필(羊弼)과 이육(李育)의 뜻을 미루어 서술하고, 호무생(胡毋生)의 《조례(條例)》에 의거하여 《춘추공양경전해고(春秋公羊經傳解詁)》를 저술하였다. 그는 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 풍각(風角)과 칠분(七分) 등의 점술에 주석을 달아 해석하기도 했으며, 역법(曆法)과 산술(算術)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5) 주요저작
《춘추공양경전해고(春秋公羊經傳解詁)》, 《춘추좌씨고황(春秋左氏膏肓)》, 《춘추곡량폐질(春秋穀梁廢疾)》, 《춘추공양묵수(春秋公羊墨守)》, 《춘추한의(春秋漢議)》, 《춘추공양시례(春秋公羊諡例)》, 《춘추의(春秋議)》.
이 중에서 현재는 《춘추공양경전해고》가 전하고, 나머지는 모두 청대 학자들의 집일본(輯逸本) 속에 일부만 전하고 있다.

2) 서언(徐彦)
(1) 성명:서언(徐彦)(생몰년 미상)
(2) 자字·별호(別號):미상
(3) 출생지역:미상
(4) 주요활동과 생애
서언에 대한 사적은 고찰할 수가 없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 인용한 동유(董逌)의 《광천장서지(廣川藏書志)》에서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서언이라는 사람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당대 정원(貞元)·장경(長慶) 이후인 것 같다”고 했다. 또한 그의 활동 시대에 대해, 《춘추공양전》 선공(宣公) 12년 소(疏)의 ‘필지전(邲之戰)’이라는 조목에서 삼국시대 위(魏)나라 손염(孫炎)의 《이아주(爾雅注)》 완본(完本)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송대 이전의 인물이라고 추정하고, 《춘추공양전》 환공(桓公) 18년 소(疏)의 ‘장환공(葬桓公)’이라는 조목에서 당대 양사훈(楊士勛)의 《춘추곡량전》 소(疏)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근거로 당대 정관(貞觀) 이후의 인물이라고 추정하였다. 거기에 더해 《춘추공양전》 소(疏)의 문체가 구광정(丘光庭)의 《겸명서(兼明書)》와 비슷한 당나라 말기의 문체라는 점 등을 종합하여, 서언을 당대 인물이라고 확정하였다.
(5) 주요저작:《춘추공양소(春秋公羊疏)》

3. 서지사항

《춘추공양소(春秋公羊疏)》는 《신구당서(新舊唐書)》 〈경적지(經籍志)〉에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고, 북송(北宋)의 왕요신(王堯臣) 등이 편찬한 《숭문총목(崇文總目)》에 ‘《춘추공양소(春秋公羊疏)》 30권’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저술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인용한 증거가 수준이 낮으며, 근세에 나온 것이다. 혹자는 서언(徐彦)이 지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서도 ‘《춘추공양소(春秋公羊疏)》 30권’이라고 수록되어 있는데, “저술한 사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북송시대 이헌신(李獻臣)은 서언이 지었다고 했는데, 그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고 했다. 또한 이헌신과 동시대 사람인 동유(董逌)의 《광천장서지(廣川藏書志)》에서 서언이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과 목종(穆宗) 장경(長慶) 연간 이후의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남송시대 왕응린(王應麟)의 《소학감주(小學紺珠)》에서도 《춘추공양소》가 서언의 작품이라고 했으며, 원대 사람이 편찬한 《송지(宋志)》에서는 ‘서언의 《공양소(公羊疏)》 30권’이라고 했다. 현재 학계에서 《공양전》 소의 작자와 이 책이 완성된 시기에 대해 정확한 정론이 없다. 다만 앞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당대의 학자인 서언의 작품으로 확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현재 통행되고 있는 《춘추공양전주소》의 정리본은 다음과 같다.
• 《(문연각(文淵閣))사고전서(四庫全書)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대북(臺北):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1983).
•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이학근(李學勤) 주편(主編), 북경대학출판사(北京大學出版社), 2000).

4. 내용

한나라 초기에 《공양전》의 스승은 오직 호무생(胡毋生)과 동중서(董仲舒)뿐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공부하여, 모두 경제(景帝) 시기에 박사가 되었다. 하휴는 박사 양필(羊弼)을 스승으로 삼았고, 또한 이육(李育)의 뜻을 미루어 서술함으로써 엄팽조(嚴彭祖)와 안안락(顏安樂)이 전수한 학문을 비판하였다. 하휴가 17년 동안 당고(黨錮)에 의해 구금을 당했을 때, 한 번도 집밖을 나오지 않으면서 고심한 문제는 공양학(公羊學)의 내실화와 종합화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탄생한 책이 바로 《춘추공양경전해고(春秋公羊經傳解詁)》이다.
하휴는 공양학의 쇠퇴와 좌씨학의 부흥이라는 당시의 상황이 모두 공양학 계열 학파의 학문 태도에 기인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파악하였다. 《춘추》 및 《공양전》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공양학 이론의 한계를 노정했을 뿐만 아니라, 좌씨학이 도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하휴는 전대 공양학자들의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경전에 근거한 공양학 이론의 확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하였다. 그는 《공양전》의 문장이나 공양학 이론만을 고수해서는 결코 좌씨학과 대결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것은 이전 공양학자들의 자세와는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현(鄭玄)과의 논쟁에서 공양학의 묵수를 외치던 과거 하휴의 모습과도 다르다.
이러한 태도는 후한 말기에 사법(師法)이나 가법(家法)에 구애받지 않고 각 이론의 장점을 취하려고 연구했던 경학계의 학문 풍토와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학관에 세워진 공양학은 엄씨(嚴氏)와 안씨(顔氏) 계열이었기 때문에 후한 말까지 대다수의 공양학자들은 둘 중 하나의 학파를 따르고 있었다. 하휴는 엄씨와 안씨 두 학파에 의해 진행된 연구 방법의 폐단을 지적했는데, 첫째는 경전(經傳)의 뜻을 위배하여 제멋대로 해석하거나 틀리게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경전을 인용하여 《공양전》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는 공양학자들이 오로지 《공양전》의 문장과 공양학 이론만을 고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초래되었다고 진단하였다. 전한시대의 공양학은 경전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경세(經世)의 학문으로서의 실천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러나 엄씨와 안씨의 공양학에서는 공양학 본래의 창조적인 작업을 등한시한 채, 오로지 문장이나 글자의 훈고(訓詁)에만 치중하고, 실천성이 결여된 공허한 글자만을 수없이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이러한 질곡의 반복이 거듭하면서 점점 경전의 본의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하휴는 후한 말까지 이러한 폐단이 장기간 축적됨으로써 공양학의 몰락과 함께 좌씨학의 흥기라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공양학 자체에 내재해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직시하였기 때문에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그가 찾은 최선의 정답은 바로 전한 시대 공양학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전한의 공양학은 철저하게 경전에 토대를 둔 해석 방법론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에 따라 경전을 연구해야만, 《공양전》의 본의를 충실하게 해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수많은 공양학 이론의 잘잘못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한시대 공양학의 연구 방법에 기초한 저술의 방법은 “호무생(胡毋生)의 《조례(條例)》를 공양학의 이론을 바로잡는 잣대로 삼아서, 《춘추》 경전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점검하고, 《공양전》을 표준 내지 법칙으로 삼는 것이다.”(《춘추공양경전해고》 〈서(序)〉) 그리고 이제까지 오로지 공양학 이론만을 묵수했기 때문에 좌씨학의 도전에 패배한 사실을 인정하고, 다른 학문 영역의 성과와 장점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단지 관료 진출을 위한 도구로만 연구되던 엄씨와 안씨의 학문만으로는 결코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통유(通儒)를 지향하던 당시 경학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며,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학문의 바다[學海]’라는 칭송을 듣던 하휴의 학자적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휴의 《춘추》 해석에서 주요한 이론은 첫째, ‘삼통의 소통[通三統]’이다. 이것은 왕조의 순환과 관련된 이론으로, 새로운 왕조가 앞의 왕조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며, 제도와 역법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휴는 “주나라를 새로운 나라로 여기고, 송나라를 옛 나라로 여기고, 《춘추》를 신왕에 해당시킨다.[新周 故宋 以春秋當新王](《공양전》 장공 27년)”고 하여, 《춘추》를 새로운 왕조에 해당시켜 제도 개혁의 주체로 삼았다. 둘째, ‘삼세의 확장[張三世]’이다. 《공양전》에서 “직접 본 시대에 대해 말을 달리하고, 직접 들은 시대에 대해 말을 달리하며, 전해들은 시대에 대해 말을 달리한다.”(《공양전》 은공 원년)는 ‘삼세이사(三世異辭)’를 말했다. 이것은 삼세(三世)의 원근(遠近)이 같지 않으므로 은혜는 두터움과 얇음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칭찬과 비난, 은미한 문장과 드러난 문장이 모두 이로부터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해 하휴는 “직접 본 것은 소공·정공·애공의 시대로, 자기와 부모 때의 일이다. 직접 들은 것은 문공·선공·성공·양공의 시대로, 조부 때의 일이다. 전해들은 것은 은공·환공·장공·민공·희공의 시대로, 고조와 증조 때의 일이다. 말을 달리한다는 것은 은혜에 두텁고 얇음이 있고, 의리에 깊고 얕음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마지막으로 ‘내외의 구별[異內外]’이다. 《공양전》에서 “《춘추》는 노나라를 안으로 여기고 제하(諸夏)를 밖으로 여기며, 제하를 안으로 여기고 이적(夷狄)을 밖으로 여긴다.”(《공양전》 성공 15년)고 했다. 이에 대해 하휴는 “마땅히 먼저 경사(京師)를 바로잡고서 제하(諸夏)를 바로잡아야 하며, 제하가 바로잡혀야 이적(夷狄)을 바로잡음으로써 점진적으로 다스릴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고 하였다.
한편 서언의 《공양전》 소(疏)는 하휴의 주(注)를 소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하휴가 말한 이론과 의례(義例)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그것을 증명하고 해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 하휴가 제시한 ‘삼과구지(三科九旨)’ 등의 의례(義例)를 자세히 풀이하고, 그와 관련된 증거를 제시하면서 귀납적으로 설명하였다. 하휴가 비록 《공양전》의 의례를 어느 정도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학문적 엄밀성이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따라서 서언은 하휴의 이론을 보완하거나 확대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새로운 ‘예(例)’를 제시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이것은 “소(疏)는 주(注)를 논파하지 않는다.[疏不破注]”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하휴의 주를 완전히 묵수한 것이 아니라 더욱 확대 발전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휴가 《공양전》의 가법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좌씨전》·《곡량전》의 학문을 강하게 배척한 것에 비해, 서언은 《공양전》을 위주로 하여 《좌씨전》·《곡량전》을 비판했지만, 《좌씨전》·《곡량전》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인용하여 《춘추》의 경문(經文)과 전문(傳文), 하휴의 주를 해석하였고, 심지어 《좌씨전》·《곡량전》에 근거하여 하휴의 주를 비평하기도 하였다. 또한 하휴의 주에서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사실(史實)과 문헌(文獻)의 오류를 비평하기도 했으며, 하휴의 주에서 불충분한 내용을 보완하기도 하였다.

5. 가치와 영향

《춘추공양전주소》는 한대(漢代) 이후 공양학의 이론을 종합하여 하나의 이론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후세의 공양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먼저 하휴는 호무생과 동중서를 포함한 전한시대 공양학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은 《춘추》 경전의 해석을 통한 미언대의(微言大義)의 발현과 춘추의리(春秋義理)의 천명이라는 정통 공양학으로의 회귀이며, 《춘추》 경전의 본의를 위배하지 않고 가장 정확한 《춘추》 해석의 표준을 정립하는 것이다. 전한 공양학이 발란반정(撥亂反正)의 정신을 바탕으로 경세(經世)의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휴도 정확한 《춘추》 해석을 근거로 자신의 시대에 맞는 실천적인 담론을 생산하고자 하는 공양학자로서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좌씨전》은 혼란한 시대에 잘못된 정치를 구제할 수 있는 적절한 이론이 아니다.”(《좌씨고황(左氏膏肓))》)라고 비판한 것도 경세 학문으로서의 공양학의 성격과 역할을 최대한 부각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로 이해된다. 역사 이론에 집중된 그의 이론은 결과적으로는 현실 정치에서 실천적 담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지만, 전한 공양학의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 체계를 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하휴의 학문은 당시의 정현(鄭玄)·복건(服虔)에게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대 학자들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책에서 많이 인용한 참위(讖緯)가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서언은 하휴의 이론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서 공양학 이론을 정밀하게 만들었다. 한대 이후로 공양학은 점점 쇠미해졌으며, 당나라 중엽에 이르러서 이미 “《공양전》과 《곡량전》은 거의 끊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공양학이 절학(絶學)되지 않고 후대로 전승되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하휴의 이론을 드러내 밝힌 서언의 공로가 매우 크다. 하휴의 《춘추공양경전해고》는 그 문장 자체로는 독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서언의 소가 있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소통될 수 있었다. 특히 하휴의 《공양전》 해석은 예(例)를 주요한 이론으로 삼았는데, 서언이 그 예에 대해 해설하고 증명하거나 부연 설명함으로써 그 본래의 의미가 크게 밝혀질 수 있었다. 공양학의 예(例) 이론은 하휴를 시작으로 해서, 청대 유봉록(劉逢祿)의 《춘추공양경하씨석례(春秋公羊經何氏釋例)》에 의해 완성되는데, 서언이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언은 또 하휴가 소홀히 다루었던 많은 신례(新例)를 파생시킴으로써 《공양전》의 조례(條例)를 더욱 방대하고 정밀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청대 왕명성王鳴盛이 “《공양전》에 서언의 소가 없으면, 자취도 없이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다.”(《아술편(蛾術編)》 〈공양전소(公羊傳疏)〉)고 평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서언의 소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고, 평가도 또한 높지 않았다. 《숭문총목(崇文總目)》에서는 서언의 증거인용의 깊이가 얕고 범위가 국한되었다고 평가하였고, 청대 능서(凌曙)의 《공양예소(公羊禮疏)》에서는 서언의 소가 예(例)에는 상세하지만 예(禮)에는 소략하여, 공영달(孔穎達)과 가규(賈逵)처럼 두루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근대의 양계초(梁啟超)는 서언이 하휴의 의리를 드러내 밝힌 것이 하나도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재 서언의 이론을 주목하는 학자는 매우 드물고, 그와 관련된 연구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이미 제출된 몇몇 연구도 서언이라는 인물 및 그의 활동 연대를 고증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의 학술 자체를 깊이 논의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춘추》에 전(傳)을 단 것은 한 명만이 아니다. 《춘추》는 본래 혼란스러운 세상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지어진 것인데, 그 내용 중에는 상당히 이상한 의리와 괴상하게 여길 만한 논의가 매우 많기 때문에 《춘추》를 이야기하는 자들이 의혹을 품었다. 심지어 경(經)의 뜻을 위배하여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전(傳)의 뜻을 위배하여 틀리게 해석하는 자도 있었다.……다른 경전을 인용하여 《공양전》을 잘못 해석하여 《공양전》에는 없는 이론을 있다고 하니, 정말 민망하고 비웃음 받을 만한 일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고문경학을 전공하여 문장을 귀중하게 여기는 자를 속유(俗儒)라고 하는데, 심지어 가규(賈逵)에게 공양학의 허점을 이용하여 글을 짓도록 하여, 공양학의 지위를 빼앗고 좌씨학을 흥기시킬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공양학의 선사(先師)들은 좌씨학 이론을 살펴 듣고서 공양학 이론을 정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두 가지의 새로운 방법만을 따랐다. 이는 천하의 한심스러운 일이니, 이것이 어찌 《공양전》의 문장만을 지키고 공양학의 이론만을 고수한 채, 좌씨학에게 패배하고 근거할 만한 이론조차 가지지 못한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점을 비통하게 여긴 지가 오래되었다.[傳春秋者非一 本據亂而作 其中多非常異義可怪之論 說者疑惑 至有倍經任意反傳違戾者……援引他經失其句讀 以無爲有 甚可閔笑者 不可勝記也 是以治古學貴文章者謂之俗儒 至使賈逵緣隙奮筆 以爲公羊可奪 左氏可興 恨先師觀聽不決 多隨二創 此世之餘事 斯豈非守文持論敗績失據之過哉 余竊悲之久矣]” 〈《춘추공양전주소》 하휴(何休) 서(序)〉
• “전해들은 세대에서는 다스림이 쇠란(衰亂)의 가운데에서 일어나서, 마음을 쓰는 것이 여전히 거칠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자기 나라를 안으로 여기고 제하(諸夏)를 밖으로 여기며, 먼저 노나라를 상세하게 다스린 이후에 외국을 다스린다. 큰일을 기록하고 작은 일을 생략하며, 노나라의 작은 악은 기록하고 외국의 작은 악은 생략해서 기록하지 않는다. 대국(大國)에 대해서는 대부(大夫)를 기록하고 소국(小國)에 대해서는 인(人)이라고 간략하게 기록한다.……직접 들은 세대에서는 다스림이 승평(升平)임을 보여 주니, 제하(諸夏)를 안으로 여기고 이적(夷狄)을 밖으로 여긴다. 외국의 두 나라가 제삼국에서 회합한 것을 기록하고, 소국에 대해서 대부를 기록한다.……직접 본 세대에서는 다스림이 태평(太平)임을 보여주니, 이적(夷狄)이 나아가서 작위를 받는 데 이르고, 천하에서 멀거나 가까운 지역과 작거나 큰 나라가 모두 하나같다. 마음을 쓰는 것이 더욱 깊고 상세하기 때문에 인의(仁義)를 숭상하고, 두 글자로 된 이름을 비난한다.[於所傳聞之世 見治起於衰亂之中 用心尙麤觕 故內其國而外諸夏 先詳內而後治外 錄大略小 內小惡書 外小惡不書 大國有大夫 小國略稱人……於所聞之世 見治升平 內諸夏而外夷狄 書外離會 小國有大夫……至所見之世 著治大平 夷狄進至於爵 天下遠近小大若一 用心尤深而詳 故崇仁義 譏二名]” 〈《춘추공양전주소》 은공(隱公) 원년 하휴 주〉
• “《춘추》 경(經)과 전(傳)의 수만 글자는 그 각각이 가리키는 뜻을 따져보면 사실상 무궁하다. 그런데 그 상하 경문(經文)의 예(例)는 서로 기다려서 거론되고, 그 상하의 뜻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진다.[春秋經與傳數萬之字 論其科指意義實無窮 然其上下經例相須而擧 其上下意義相待而成]” 〈《춘추공양전주소》 성공(成公) 15년 서언 소〉
(2) 색인어:하휴(何休), 서언(徐彦),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 춘추공양경전해고(春秋公羊經傳解詁), 춘추공양소(春秋公羊疏),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춘추학(春秋學), 공양학(公羊學), 삼전(三傳)
(3) 참고문헌
• 《春秋公羊傳注疏》(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穀梁傳注疏》(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左傳正義》(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公羊學史》(曾亦·郭曉東, 上海:華東師範大學, 2017)
• 《春秋學史》(趙伯雄, 濟南:山東敎育出版社, 2004)
• 《春秋學史》(戴維, 長沙:湖南敎育出版社, 2004)
• 《춘추공양전》(공양자公羊子 지음, 박성진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8)
• 《춘추논쟁》(김동민,글항아리, 2014)
• 《국가와 백성 사이의 漢》(히하라 도시쿠니 지음, 김동민 옮김,글항아리, 2013)
• 〈公羊學과 穀梁學의 대립을 통해 본 漢代 春秋學의 성격〉(김동민,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논집》18, 2006)
• 〈何休와 鄭玄 今古文論爭의 경학사적 의의〉(김동민, 동양철학연구회, 《동양철학연구》49, 2007)

【김동민】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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