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한대(漢代)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저술된 정치(政治)·도덕(道德) 등에 관한 논문집으로 원래는 총 17권 82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79편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서명(書名)이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처음 기록된 것을 근거로 위작(僞作)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2. 저자 또는 편자
(1)성명:동중서(董仲舒)(B.C. 176?~B.C. 104?)
(2)자(字)·별호(別號):동자(董子) 또는 동부자(董夫子)
(3)출생지역
현재의 하북성(河北省)에 속하는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 출신이다. 그런데 이것이 광천국(廣川國)을 말하는지, 광천현(廣川縣)을 말하는지가 불분명해서 하북성에는 동중서의 고향이라고 내세우는 현이 셋이나 된다. 그 생몰연대 또한 불분명하여, 출생연도에 관한 여러 설 중에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198년, 사망연도로 가장 나중인 것은 104년이다. 다만 B.C. 87년에 죽은 한 무제(漢武帝)보다는 일찍 죽었고, 한 고조(漢高祖)의 치세에 태어나 무제까지 다섯 황제의 치세에 걸쳐 살았다는 점이 이런저런 문헌에서 나타날 뿐이다.
(4)주요활동과 생애
한(漢)나라 초기, 진(秦)나라의 급속한 멸망은 봉건 통치자에게 심각한 교훈을 주었다. 진나라의 봉건 통치 사상은 법가(法家)사상이 주도적이었는데, 그들은 진나라의 폐단을 극복하고 백성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구호아래 황제(黃帝)·노자(老子)의 사상을 정책의 지도 사상으로 삼음으로써 이 사상이 통치적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유교 사상 또한 의연히 존재하고 발전하였다. 한나라 초기 유학을 대표하는 숙손통(叔孫通), 육가(陸賈), 가의(賈誼)와 같은 학자들은 유교의 인의덕치(仁義德治)를 선양하고, 한편으로는 법치를 숭상하는 법가의 사상과 청정무위(淸淨無爲)를 강조하는 황제, 노자의 사상을 비판한 동시에 그 둘의 사상을 흡수하고 융합시키면서 한나라 초기 유학의 기틀을 마련해갔다.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한 무제의 시대에는 이런 조짐이 본격화되었다. 그는 당시 어사대부(御史大夫) 조관(趙綰)과 낭중령(郎中令) 왕장(王臧) 등 유학을 공부한 중신들을 가까이하며, 명당을 세워 본격적으로 유학을 가르치려는 계획을 세웠다. 비록 황로학을 독실히 따르던 두태후(竇太后)의 반대에 부딪쳐 명당 설립은 중지되고 조관과 왕장은 처벌을 받고 자살했으나, 유학을 배운 사람이면 황제의 눈에 들어 관직에 나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렇듯 유가와 법가, 유가와 도가 사상이 서로 배척하고 투쟁하면서도 서로 흡수·융합하였던 한나라 초기의 사상 풍토는 후일 한나라 동중서(董仲舒)가 새로운 유가 사상 체계를 창립하는 토양을 마련하였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우고 한 경제(漢景帝) 때 박사의 직위를 받아 처음으로 관직을 시작했던 동중서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린 것도 한 무제(漢武帝) 때였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賢良)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서 시무를 논하였는데 동중서도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았다. 무제가 정치의 올바른 지침에 대해 널리 대책을 써 올리도록 하였는데 동중서가 〈천인삼책(天人三策)〉을 올린 것이 채택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성인(聖人)은 천명(天命)을 받아서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敎化)에 의하여 백성의 본성(本性)을 갖게 하고, 제도에 의하여 백성의 정욕을 절제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에 있어서는 유학만을 정통적 학문으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의 정부는 법가나 종횡가의 말을 물리쳐 채택하지 않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의 정신을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나라는 유교를 본격적으로 장려하여 오경박사를 두고 명당과 태학을 설립하는 등 유교 국교화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무제에게 상주한 이후에 강도왕(江都王)의 대신으로 전출되었는데 《춘추(春秋)》의 재이(災異)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그는 뒤에 자신의 학설로 말미암아 투옥되는 등 파란 많은 생애를 보내기도 하였다. 요동에 위치한 고조묘(高祖廟)의 화재를 두고 한 말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기도 하였고, 그보다 학식이 미치지 못하는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의 시기로 포악하기로 이름난 교서왕(膠西王) 유단(劉端)의 국상(國相)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 후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후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면 당시 정위(廷尉)였던 장탕(張湯)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그는 3년 동안 장막에 들어앉아 공부에 몰두하느라 자기 집의 채소밭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행동을 예법에 맞게 하여,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고 여러 제자를 거느렸다. 그는 제자 중에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도록 했으므로 신입생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스승의 얼굴을 한 번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동중서는 천수를 누리고 집에서 명을 마쳤으며, 이후 자손은 모두 학문을 통해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5)주요저작 : 《공양동중서치옥(公羊董仲舒治獄)》, 〈천인삼책(天人三策)〉, 〈재이지기(災異之記)〉, 〈우박대(雨雹對)〉, 〈사불우부(士不遇賦)〉.
3. 서지사항 특징
《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 동중서가 서명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어떤 뜻이라고 스스로 밝힌 것은 없다. 다만 그가 춘추공양학의 대가였던 점을 고려할 때, “춘추”는 공자의 《춘추》 및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내용을 옮겨왔다는 뜻인 듯하며, “번(繁)”은 번(蕃)과 통하여 ‘많다’ 혹은 ‘무성하다’의 뜻이고, “로(露)”는 ‘드러내다’, ‘윤택하게 하다’의 뜻인 것으로 보아 공자(孔子)의 《춘추》를 무성하고 윤택하게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황로 도가와 법가 사상이 횡행하던 시대에 유교로서 국가의 이념적 통일을 기하고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며 사회와 대중을 이끌어갈 수 있는 학술 사상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역사의 교훈을 더듬으며 6만여 자에 달하는 글을 찬수한 것이 바로 《춘추번로》이다. 남송(南宋) 때에는 《춘추번로》가 네 가지의 저본이 있었으나, 분량이 같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혼합되거나 분실되고 중복되기도 하였고 편이 망실된 것들도 있었다. 이 모든 판본을 모아서 청(淸)나라의 건륭(乾隆) 50년 10월에 노문초(盧文弨) 등 13인의 학자가 참여하여 다시 교정하고 혼합된 것을 추려내어서 편을 정리하여 완성시켰다. 이때 빠진 것은 빠진 것대로 두었고, 의미와 상관없는 것들도 그대로 보존시켜 17권 82편으로 완성시켰으나, 현재는 79편이 남아 있다.
《춘추번로(春秋繁露)》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공양고(公羊高)가 지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바탕을 두고 논한 것이다. 즉 《춘추공양전》의 해설이 미진한 부분을 동중서가 자문(自問)하고 자답(自答)하는 형식을 빌어서 드러내고, 또 의심이 나는 많은 부분들을 동중서 나름대로 일목요연하게 논리를 전개한 책이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춘추》에 대한 전(傳)이 모두 23가(家) 948편(篇)이나 된다고 기록하였는데, 이 가운데 전국시대에 공양고가 지은 《춘추공양전》, 곡량적(穀梁赤)의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동중서의 《춘추번로》만이 전해지고 있다. 《공양전》과 《곡량전》은 경문(經文) 해석 중심이고, 《좌씨전》은 기록된 사실(史實)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춘추번로》는 《춘추》의 의미 중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을 확연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내용
이 책은 한(漢)나라의 등장과 함께 새 시대를 이끌어 가려는 의지 속에 지나간 역사의 흐름을 교훈 삼아 새로운 역사의 발전의식에 음양오행사상을 결합하고자 시도한 저술이다. 분열되었던 넓은 국토와 백가의 사상을 대일통(大一統)으로 하여 한나라 426년간을 이끌어 온 정치논리이며, 음양오행설에 의거한 재이설(災異說)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그리고 사관(史觀)을 정립(定立)한 역사철학서(歷史哲學書)이다. 그리고 나아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한왕조의 출현예정설(出現豫定說)을 주장함으로서 참설(讖說)을 예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인간도덕률의 기본이 되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오행에 배속시킴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음양오행에 입각하여 규정하고, 도덕과 윤리를 앞으로 이끌어내어 백성을 다스리려는 정치 이념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 가치와 영향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음양과 오행에 관계되는 보편적인 어휘들이 《춘추번로》에 많이 등장한다. B.C. 100년 이래로 여러 학자들이 음양과 오행에 관계되는 고경(古經)을 해설할 때에는 이 책에 수록된 어휘에 근거하여 전(傳)·의(義)·소(疏)·해(解)를 썼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덕치(德治)를 강조하였는데, “하늘이 왕을 세우는 것은 백성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 덕이 족히 백성을 즐겁고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자에게 하늘이 지위를 부여한다.[天立王以爲民也 故其德足以安樂民者 天予之]”라는 말에서도 그 일면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이 후세에 많은 존숭을 받게 하였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康有爲)는 그의 진화론적 역사관인 ‘대동삼세설(大同三世說)’과 ‘만물평등의 인(仁)’ 사상을 부연하기 위하여 이 책을 앞세워 《춘추동자학(春秋童子學)》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책은 공자에 대한 신성화(神聖化)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고, 유교를 국교화하였으며 지배자의 통치논리를 체계화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춘추공양전》의 설을 한대에 적합하게 해석한 여러 편들은 공양학(公羊學)의 전통상 주목할 만한 것이며, 또 재이설(災異說)이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논술한 편들은 한대의 사상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문헌이다. 그리고 법가사상(法家思想)의 혼입(混入)도 있어 귀중한 사료(史料)가 된다.
이 책은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널리 읽혀졌는데, 특히 정약용(丁若鏞)·기대승(奇大升) 등은 이 책이 유교를 국교화하고, 백가사상을 배척하며, 널리 인재를 등용하고, 경학의 지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주석서로는 능서(凌曙)의 《춘추번로주(春秋繁露注)》와 소여(蘇輿)의 《춘추번로의증(春秋繁露義證)》이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춘추》의 도리는 하늘의 명을 받들고 옛것을 본받는 것이다.[春秋之道 奉天而法古]” 〈초 장왕(楚莊王)〉
• “《춘추》는 인의(仁義)의 법이 되니, 인(仁)의 법은 사람을 사랑하는데 있지 나를 사랑하는데 있지 않으며, 의(義)의 법은 나를 바룸에 있지 남을 바르게 함에 있지 않다.[春秋爲仁義法 仁之法在愛人 不在愛我 義之法在正我 不在正人]” 〈인의법(仁義法)〉
• “무릇 재이의 근본은 모두 국가의 잘못에서 생겨난다. 국가의 잘못이 생기기 시작하면, 하늘이 재해를 일으켜 경고하고, 경고하여도 고칠 줄 모르면 이에 변괴를 일으켜 놀라게 한다. 놀라게 했는데도 두려워 할 줄 모르면 그 재앙이 마침내 이른다. 이를 통해 하늘의 뜻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백성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凡災異之本 盡生於國家之失 國家之失乃始萌芽 而天出災害以譴告之 譴告之而不知變 乃見怪異以驚駭之 驚駭之尙不知畏恐 其殃咎乃至 以此見天意之仁而不欲陷人也]” 〈필인차지(必仁且智)〉
(2)색인어:동중서(董仲舒), 춘추번로(春秋繁露), 춘추(春秋),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음양(陰陽), 오행(五行), 천인감응(天人感應), 재이(災異), 대일통(大一統).
(3)참고문헌
• 史記(司馬遷, 中華書局)
• 漢書(班固, 中華書局)
• 春秋繁露(董仲舒, 浙江書局)
• 董子春秋繁露譯注(閻麗 譯注, 哈爾濱, 黑龍江人民出版社)
• 춘추번로(남기현 역, 자유문고)
• 동중서의 춘추번로 춘추-역사해석학(신정근 옮김, 태학사)
【함현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