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좌씨춘추(左氏春秋)》, 《좌전(左傳)》, 《좌씨전(左氏傳)》이라고도 한다. 노(魯)나라의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것이다. 그러나 《춘추좌씨전》은 《춘추》보다 13년이나 더 많은 259년(B.C. 722∼B.C. 481)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 공자(孔子)와 거의 같은 시대 인물인 좌구명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 그와 후대의 저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반적으로 《춘추》에 대한 해설서로 인식되고 있는, 《좌씨전(左氏傳)》·《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추씨전(鄒氏傳)》·《협씨전(夾氏傳)》 중에서 《추씨전》과 《협씨전》은 현재 전하지 않고, 《좌씨전》·《공양전》·《곡량전》을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한다. 이 중 《공양전》과 《곡량전》이 의리(義理)를 중심으로 기술한 데 반하여, 《좌씨전》은 의리보다는 사실(事實)에 대한 기록이 우세하며 《춘추》와 달리 노나라 하나만을 중심으로 삼지 않고 당시 주요 국가들을 평균적으로 다루고 있고 서술내용도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여러 분야를 다 망라하고 있다.
2. 저자
(1)성명:좌구명(左丘明)
(2)자(字)·별호(別號):후대인들이 그를 맹좌(盲左)라고 칭하기도 함.
(3)출생지역: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현 중국 산동(山東))
(4)주요활동과 생애
중국 춘추시대(B.C. 770~B.C. 476) 노(魯)나라의 태사(太史)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국어(國語)》의 저자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에는 공자가 좌구명의 덕행(德行)을 칭찬하여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보기 좋은 얼굴빛만 꾸미고 지나치게 공손함을 옛날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속으로 원망하면서도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귐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라고 한 말이 전한다. 그는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춘추(春秋)》에 표현하였으나 그 뜻을 전한 제자들이 각기 자신의 견해에 빠짐으로써 공자의 진의(眞意)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춘추좌씨전》을 지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 《국어》를 지었는데, 사마천이 “좌구가 실명(失明)하고서 《국어》를 지었다.”라고 한 말에 의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맹좌(盲左)라고 부르고 그의 책을 《맹사(盲史)》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초(唐初)의 《오경정의(五經正義)》 때까지는 사실로 믿어졌으나, 당(唐)나라 담조(啖助)가 《논어》에 보이는 좌구명은 《춘추좌씨전》의 작자인 좌씨(左氏)와는 다른 인물이라고 말한 이래로 여러 가지 의론이 있어 왔으며. 좌구명의 《춘추좌씨전》 저작설은 점차 부정되었지만, 현재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5)주요저작:《국어(國語)》
3. 서지사항
좌구명의 《좌씨전》이 당초 《춘추》의 해석을 위한 것이었는가 등의 문제는 한대(漢代) 이래 계속된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좌씨전》 자체를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좌씨전》은 《춘추》를 강으로 삼아 구체적인 사례를 가지고 《춘추》를 해석하고 보충 설명한 것이다. 《춘추》는 《좌씨전》이 있음으로 해서 보다 명료해지고, 양자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으니, 《춘추》와 《좌씨전》은 독립된 관계로 보기 어렵다. 《좌씨전》은 《춘추》처럼 존주(尊周)를 표방하나, 포폄이나 은휘가 없고 천재(天災)에 관한 기록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서진(西晉) 시대의 두예(杜預)가 《춘추》의 문장을 《좌씨전》의 매년 기록 앞에 적절히 배열하여 한 책으로 합쳐놓음으로써 《춘추》는 더 이상 단행본이 아니게 되었다.
《좌씨전》은 《춘추》와는 성질이 다른 별개의 저서로서,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과 함께 3전(三傳)의 하나이다. 원본은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전한(前漢) 말기 유흠(劉歆) 일파가 편찬한 것이다. 다른 2전(二傳)이 경문(經文)의 사구(辭句)에 대한 필법(筆法)을 설명한 것에 비하여 이 책은 경문에서 독립된 역사적인 이야기를 제시하였고, 문장이 교묘하며 인물묘사 또한 정확하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고문(古文)의 모범이 되었다.
4. 내용
《편찬방법에 있어서도 《춘추》에 비해 크게 발전되어 《춘추》보다 사건의 기록이 상세하고 내용도 풍부하다. 《춘추》가 1만 8천 자인데 비해, 《좌씨전》은 18만 9천여 자에 달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앞서 만들어진 사서로는 최대 분량이다.
《좌씨전》은 《춘추》와는 달리 사상과 내용, 편찬방법이 매우 파격적이다. 《춘추》는 붕괴상태에 있는 봉건제를 유지 옹호하면서 노나라를 기준으로 주(周), 은(殷)과의 연고를 중시하며 포폄에 의거해서 역사적 사실을 유감없이 왜곡했으나, 《좌씨전》은 다르다.
첫째, 하나의 나라를 중심으로 삼지 않고, 진(晉)·노(魯)·초(楚)·제(齊)·진(秦) 등의 각 나라에 대해 고르게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주왕실의 ‘대일통(大一統)’이 와해되고 전국(戰國) 상황이 벌어졌던 사회의 변화를 승인하고 있다.
둘째, 하나의 존자(尊者)를 감싸거나 회피하지 않고, 주(周) 천자(天子)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의 부패몰락상을 들추어내고, 신흥 지주계급이 인민의 옹호를 받아 집권하는 것을 긍정하고 있다.
셋째, 재이(災異)를 중시하였는데, 기본적으로 천명에 입각한 유심사관(唯心史觀)으로 사회변화를 관찰 해석하고자 했고, 천명존중(天命尊重)과 천명회의(天命懷疑) 두 사상의 투쟁을 서술하며 인사를 중시하고, 귀신은 가벼이 여긴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좌씨전》의 저자는 인심의 향배가 정권의 존망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파악하고 있다.
넷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함에 반드시 사실에 근거하여 직필해야 한다고 제창했다. 제(齊)나라의 사관(史官)인 남사씨(南史氏)들을 ‘직사(直史)’, ‘양사(良史)‘로 찬양했다. 《좌씨전》이 칭송한 이러한 직필, 사실 기록 정신은 이후 사관의 미덕과 사서를 평가하는 하나의 표준으로 존중되었다.
5. 가치와 영향
《춘추》는 242년의 역사만 기록하였으나 《좌씨전》에서는 고대 사사(史事)를 인용하여 풍부한 고대 사료를 보존하고 있다. 때문에 《좌씨전》의 등장은 상주(商周) 이래 사학계의 혁명이라고 하거나, 진한(秦漢) 이래 사학계의 대종(大宗)이라 부른다. 《좌씨전》의 편찬 방법 또한 《춘추》에 비하여 크게 진보를 해서 독립된 서적이 될 수 있었다. 《좌씨전》은 사실만 기록하고 말은 기록하지 않았던 《춘추》의 정형을 깨고, 사실을 말과 아울러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사실 기록을 위주로 논단하는 문구를 구사하여 사(史)와 논(論)을 결합시켰다.
또한 사사(史事)의 기록을 반드시 직서하도록 하여 후대 사관의 미덕이 되었고 사서 평가에서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좌씨전》은 사건을 기록하고 ‘군자왈(君子曰)’로 시작되는 작자의 관점과 평론을 달았는데 이는 사마천의 《사기》도 《좌씨전》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각 기전(紀傳) 끝에 ‘태사공왈(太史公曰)’로 시작하는 평을 달았다.
현존하는 《좌씨전》의 주(注)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진(晉)나라 두예(杜預)의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이다. 그 외에도 당대(唐代) 공영달(孔穎達)의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 송대(宋代) 여조겸(呂祖謙)의 《동래좌씨박의 東萊左氏博議》, 원대(元代) 주신(朱申)의 《춘추좌전구해(春秋左傳句解)》, 조방(趙汸)의 《춘추좌전보주(春秋左傳補注)》, 명대(明代) 육찬(陸粲)의 《좌전부주(左傳附注)》, 청대(淸代) 고염무(顧炎武)의 《좌전두해보정(左傳杜解補正)》 등이 있다.
고구려(高句麗) 때 태학(太學)에서 오경(五經)을 가르쳤고, 백제(百濟)에서도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이미 《춘추좌씨전》이 들어왔다고 여겨진다. 유교의 주요경전으로 애독되었으며 최석정(崔錫鼎)의 《좌씨집선(左氏輯選)》과 편찬자를 알 수 없는 《좌전휘류(左傳彙類)》, 정약용(丁若鏞)의 《춘추고징(春秋考徵)》 등이 참고서로 쓰였다. 《좌씨전》은 9경·12경·13경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전쟁은 불과 같아서 억제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夫兵猶火也 不戢 將自焚也]” 〈노 은공(魯隱公) 4년〉
• “속담에 ‘광대뼈[輔]와 잇몸[車]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라는 말은 우(虞)나라와 괵(虢)나라를 두고 한 말입니다.[諺所謂 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虢之謂也]”〈노 희공(魯僖公) 5년〉
• “나는 탐욕하지 않는 것을 보물로 여기고 그대는 옥을 보물로 여긴다.[我以不貪爲寶 爾以玉爲寶]” 〈노 양공(魯襄公) 15년〉
(2)색인어:좌구명(左丘明),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춘추삼전(春秋三傳)
(3)참고문헌
• 春秋左傳注(楊伯峻, 中華書局)
• 春秋左氏傳注疏(吉林出版社)
• 春秋左傳硏究(董書北, 上海人民出版社)
• 春秋左傳詞典(楊伯峻·徐提, 中華書局)
• 春秋左氏傳(정태현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서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