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대한 주석서로서, 진(晉)나라 두예(杜預)의 주(注)와 당(唐)나라 공영달(孔潁達)의 (疏)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공영달과 안사고(顔師古)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오경정의(五經正義)》 중의 하나이다. 공영달은 이 책을 제작하면서 두예의 주(注)를 종주로 삼고, 유현(劉炫) 등 육조(六朝) 시대 학자들의 의소(義疏)를 취하여 소(疏)를 달았다. 《춘추좌전정의》가 나온 이후에, 《좌씨전》은 《공양전》·《곡량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학문적 위상이 올라갔으며, 《춘추》의 대표적인 전(傳)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춘추》 경학 역사에서 《춘추좌전정의》가 가진 사상사적 의미와 가치는 그 무엇보다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저자
(1) 성명:두예(杜預)(222∼284), 공영달(孔穎達)(574∼648)
(2) 자(字)・별호(別號):두예의 자는 원개(元凱), 공영달의 자는 충원(沖遠) 또는 중달(仲達)
(3) 출생지역:두예는 경조(京兆) 두릉(杜陵)(현 중국의 섬서성(陝西陜)) 출생이고, 공영달은 기주(冀州) 형수(衡水)(현 중국의 하북성(河北省)) 출생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두예는 조위(曹魏) 시대 문제(文帝) 황초(黃初) 3년(222)에 태어나서 서진(西晉) 시대 무제(武帝) 태강(太康) 5년(284)에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경조(京兆) 두씨(杜氏) 가문 출신으로서 전한(前漢) 시대의 어사대부였던 두연년(杜延年)(?∼B.C.52)의 후손이며, 조부는 두기(杜畿)(163~224)이고, 부친은 두서(杜恕)이다. 두기는 후한(後漢) 시대 말기에 하동군태수(河東君太守)를 역임하였고, 두서는 조위 시대에 황문시랑(黃門侍郎)과 유주자사(幽州刺史) 등을 역임하였다. 두예는 사마의(司馬懿)의 딸이자 사마소(司馬昭)의 누이동생인 고육공주(高陸公主)와 결혼하여 상서랑(尙書郞)에 제수되었다. 하남윤(河南尹)·진주자사(秦州刺史)와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를 역임하였고, 오(吳)를 평정한 공로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책봉되었다. 그 뒤 사예교위(司隸校尉)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나자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성(成)이다.
두예의 조부 두기와 부친 두서는 모두 학문을 좋아하였고, 두예는 그러한 가풍을 이어받았다. 그는 특히 《춘추좌씨전》에 뛰어났으며, 자기 스스로를 ‘좌전벽(左傳癖)’, 즉 ‘《춘추좌씨전》에 미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그의 춘추학은 악상(樂詳) 및 숙부인 두관(杜寬)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악상은 좌씨학에 능통하여 《좌씨악씨문(左氏樂氏問)》을 지었다.
공영달은 8세 때 이미 학문에 뜻을 두었고, 하루에 1천여 마디의 글을 외울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명경(明經) 고제(高第)로 천거되어 하내군박사(河內郡博士)에 제수되었고, 태학조교(太學助敎)에 임명되었다. 태종(太宗) 평락(平洛) 연간에는 문학관학사(文學館學士)에 제수되었고,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승진하였다. 정관(貞觀) 초에 곡부현남(曲阜縣男)에 책봉되었고, 급사중(給事中)으로 직책을 옮겼으며,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제수되었다.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지은 공로를 인정받아서 산기상시(散騎常侍)의 직책이 더해졌고, 자子의 작위를 받았다. 죽은 이후 당태종의 묘인 소릉(昭陵)에 모셔서 장례를 지냈고, 태상경(太常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헌(憲)이다.
(5) 주요저작:두예의 저작에는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 《춘추석례(春秋釋例)》, 《춘추좌씨전평(春秋左氏傳評)》, 《춘추좌씨전음(春秋左氏傳音)》, 《춘추두씨주춘추좌전(春秋杜氏注春秋左傳)》, 《춘추경전장력(春秋經傳長曆)》, 《상복요집(喪服要集)》 등이 있는데, 지금 세상에 전하는 것은 《춘추좌씨경전집해》와 《춘추석례》 두 책뿐이다. 공영달은 《오경정의(五經正義)》가 있다.
3. 서지사항
당나라 정관(貞觀) 7년에 태종(太宗)은 유학(儒學)에 학파가 많아서 장구(章句)가 번잡하다고 여겨서, 국자감(國子監) 좨주(祭酒) 공영달(孔穎達)과 여러 학자들에게 조칙을 내려 오경(五經)의 의소(義疏)를 골라서 바로잡도록 명했다. 이것이 《오경정의(五經正義)》 170권이다. 그중에 《춘추좌전정의》는 모두 36권이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공영달(孔穎達)·양사훈(楊士勳)·주장재(朱長才)가 조칙을 받들어 기록했고, 마가운(馬嘉運)·왕덕소(王德韶)·소덕융(蘇德融)·수덕소(隋德素)가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런데 《춘추좌전정의》가 완성된 이후에 많은 비평을 받았기 때문에 태종은 다시 명령을 내려 상세하게 바로잡도록 했다. 공영달은 그 다음 해에 관직을 사퇴했고, 정관 22년에 죽었기 때문에 수정하여 바로잡는 일이 진행되지 못했다. 그 후 고종(高宗) 영휘(永徽) 2년, 다시 조서를 내려 《오경정의》를 수정하도록 했다. 《신당서》에 의하면, 영휘(永徽) 2년, 조칙을 내려 중서문하(中書門下)와 국자삼관박사(國子三館博士)·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에게 살펴서 바로잡도록 했다. 이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우지녕(于志寧)·우복야(右僕射) 장행성(張行成)·시중(侍中) 고수보(高季輔)가 수정 작업을 하여 책이 비로소 반포되었다. 또 장손무기(長孫無忌)의 《진오경정의표(進五經正義表)》에 의하면, 이 수정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장손무기·저수량(禇遂良)·유상(柳爽)·곡나율(穀那律)·정백응(劉伯應)·왕덕소(王德韶)·가공언(賈公彥)·범의군(范義頵)·유선(柳宣)·제위(齊威)·사사굉(史士宏)·이원식(李元植)·왕진유(王眞儒) 등이 있었다. 영휘 4년(653)에 《오경정의》는 비로소 정식으로 반포되어 통행되었고, “3월 임자(壬子) 초하루에 공영달의 《오경정의》를 천하에 반포하고, 매년 명경(明經)에 이 책에 의거하여 시험을 치도록 명하였다.”라고 하였다.(《구당서(舊唐書)》 〈고종본기(高宗本紀)〉)
《한서》 〈예문지〉에 ‘《춘추고경(春秋古經)》 12편, 《경(經)》 11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경(經)》은 《공양전》·《곡량전》이 근거로 삼은 《춘추경(春秋經)》으로서,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에서 애공(哀公) 14년까지 242년간의 사건을 기록한 책이다. 《춘추고경》은 《좌씨전》이 근거로 삼은 고문경전으로서, 거기에 기록된 사건은 애공 16년 “공자가 죽었다”에서 끝나니, 모두 244년간의 일이다. 공영달의 《춘추좌전정의》 〈서(序)〉에 의하면, 《춘추》 경문(經文)과 《좌씨전》 전문(傳文)은 본래 분리되어 통행되었다. 그런데 현재는 경문과 전문이 단독으로 통행되지 않고, 경문을 나누어서 《좌씨전》 전문의 앞에 붙어 있다. 《좌씨전》의 경문과 전문이 결합된 것은 한대 유흠(劉歆)으로부터 시작된다. 《한서(漢書)》 〈초원왕전(楚元王傳)〉에 의하면, 유흠이 “《좌씨전》을 연구하면서 《좌씨전》의 문장을 끌어와서 《춘추》 경문을 해석하여, 경문과 전문을 서로 드러내 밝힘으로써 장구(章句)의 의리가 갖추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가 완전한 형태로 완성된 것은 두예의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이다. 두예는 경문을 나누어서 전문에 붙였는데, 《춘추좌씨경전집해》 〈서(序)〉에서 “경(經)의 연도가 나누어진 것이 《좌씨전》의 연도와 서로 부합하니, 그 의미가 통하는 종류끼리 모아서 각각 그 종류에 따라서 해석하였다.”고 하였다.
현재 통행되고 있는 《춘추좌전정의》의 정리본은 다음과 같다.
• 속수사고전서편찬위원회(續修四庫全書編纂委員會) 편(編),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 1995)
• 공자문화대전편집부(孔子文化大全編輯部) 편집(編輯),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제남(濟南):산동우의서사(山東友誼書社), 1993).
• 이학근(李學勤) 주편(主編),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북경대학출판사(北京大學出版社), 2000).
4. 내용
《사고전서총목제요》의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 조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좌씨전》 관련 책 중에서 오직 두예(杜預)의 주(注)와 공영달(孔穎達)의 소(疏)가 가장 오래되었다. 두예의 주는 경문(經文)을 억지로 끌어다가 전문(傳文)에 맞춘 것이 많고, 공영달의 소도 또한 두예를 두둔하고 유현(劉炫)을 낮춘 것이 많다. 이것은 모두 한 학파의 학설만을 독실하게 믿은 잘못이며, 하나의 실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두예의 주와 공영달의 소가 있어야만 《좌씨전》의 뜻이 밝혀지고, 《좌씨전》의 뜻이 밝혀진 후에 《춘추》의 242년간의 선악(善惡)의 자취가 하나하나 증명될 수 있다. 후세의 학자 중에서 제멋대로 총명함을 부리고, 사사로운 억견으로 포폄(褒貶)을 말하는 자들이 그래도 《좌씨전》의 문장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진(漢晉) 시대 이래로는 《좌씨전》에 의존하여 《춘추》 경문의 뜻을 알았고, 송원(宋元) 시대 이후에는 《좌씨전》에 의존하여 억지 주장을 막았다. 《좌씨전》과 두예의 주, 공영달의 소는 모두 《춘추》에 큰 공적이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춘추좌전정의》의 두예 주와 공영달 소가 비록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주소(注疏)에 의해 《좌씨전》이 《춘추》의 대표적인 전(傳)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이 가진 사상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춘추좌전정의》는 두예의 주를 종주로 삼았는데, 공영달의 《춘추좌전정의》 〈서〉에서 말했다. “전한시대에 《좌씨전》을 전한 사람은 장창(張蒼)·가의(賈誼)·윤함(尹咸)·유흠(劉歆)이 있고, 후한시대에는 정중(鄭衆)·가규(賈逵)·복건(服虔)·허혜경(許惠卿) 등이 있는데, 각각 고훈(詁訓)을 지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공양전》·《곡량전》을 잡다하게 취하여 《좌씨전》을 해석했는데, 이것은 신발을 머리에 쓰고, 명주실을 삼베 실패에 감아놓은 것이니, 네모난 구멍에 둥근 자루가 들어갈 수 있겠는가! 진(晉)나라 때의 두예는 또한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를 지었는데, 오로지 좌구명(左丘明)의 전(傳)을 취하여 공자(孔子)의 경(經)을 해석하였다. 그것은 자식이 어머니에 호응하고, 아교를 옻에 던지는 것과 같으니, 비록 합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떨어질 수 있겠는가? 지금 앞선 학자들의 우열을 비교해 보면 두예가 최고이다. 따라서 진(晉)·송(宋) 시대에 전수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공영달의 소는 육조(六朝) 시대 학자들의 의소(義疏)를 많이 취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유현(劉炫)의 의소가 많다. 공영달의 《춘추좌전정의》 〈서(序)〉에서 말했다. “의소(義疏)를 지은 자는 심문아(沈文阿)·소관(蘇寬)·유현(劉炫)이 있다. 그런데 심문아는 의례(義例) 방면은 그나마 괜찮지만 경전(經傳)에는 지극히 소략하다. 소관은 본문을 전혀 체계화하지 못했고, 오직 가규와 복건을 공격하여 후세의 학자들이 연구하더라도 성과가 없도록 만들었다. 유현은 여러 사람들 중에서 사실상 가장 뛰어나다.……유현의 해석은 다른 의소와 비교해 보면, 그나마 볼만한 것이 있다. 지금 칙령을 받들어 손질하고 바로잡아서, 그 책에 근거하여 저본으로 삼았다. 그 중의 빠진 내용은 심문아의 책을 가지고 보완하였다. 만약 두 사람의 뜻이 모두 틀리면, 특별히 나의 짧은 견해를 진술하였다.”
그런데 공영달은 유현의 해석에 대해서 또한 큰 불만을 가졌다. “유현은 여러 학자들 중에서 실로 탁월하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언변이 좋고 박식했지만, 본래 또한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대우를 받은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깊은 이치를 탐구하고 연구했지만, 멀리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또한 상대를 공격하는 데 뜻을 두었고, 성격이 비난하고 헐뜯는 것을 좋아하여, 두예의 실수 150여 조목을 바로잡았다. 그런데 두예의 뜻을 익혀서 두예를 공격하니, 마치 좀벌레가 나무에서 생겨났는데 도리어 그 나무를 갉아 먹는 것과 같으니, 의리가 아니다. 비록 두예의 잘못을 바로잡았지만, 뜻이 또한 얕고 평범하다. 이른바 사마귀가 앞에서 우는 매미를 잡으려고 했지만, 참새가 그 뒤에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공영달은 《춘추좌전정의》 〈서〉에서 또한 《춘추》의 여러 기사를 인용하여, 유현이 바로잡은 두예의 잘못을 드러내 밝혔다.
5. 가치와 영향
공영달이 《오경정의》를 편찬하면서 《춘추좌씨전》의 공인 주석으로서 두예의 주를 선택하였고, 이후 두예의 책은 《춘추좌씨전》의 공식 해설서가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두예를 통하여 《춘추》를 이해하는 것이 일종의 표준이 되었다. 《춘추좌전정의》는 삼국시대 이후 《춘추》 삼전(三傳) 중에서 《좌씨전》을 《춘추》의 대표적인 해석서의 지위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또한 기존 《좌씨전》 연구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즉 진(晉)나라 때에는 복건과 두예의 주가 모두 학관에 세워졌으며,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혹은 두예의 주를 존중하고, 혹은 복건의 주를 따르면서 서로 배격하였다. 그런데 당나라 때 공영달이 오로지 두예의 주만을 종주로 삼아서, 가규·복건의 주가 두예와 서로 어긋날 경우에는 모두 일괄적으로 배척하고 두예의 뜻을 진술하였다. 따라서 복건의 주는 마침내 사라져 버렸으며, 송나라 때에는 복건의 책조차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당나라 이후 《좌씨전》을 연구한 자들은 모두 두예의 주를 종주로 삼았으며, 두예를 《좌씨전》의 충신(忠臣)으로 여겼다. 따라서 청대 전기의 《좌씨전》을 연구한 자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단지 두예의 《춘추좌씨경전집해》를 보완하고 바로잡는 수준에 그칠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두예의 잘못을 고증하여 바로잡은 경우도 많지만, 여전히 두예의 주를 《좌씨전》으로 가는 사다리와 배로 여겼다. 그런데 청대 건륭(乾隆)·가정(嘉定) 이후에 학자들은 점점 두예를 《좌씨전》의 죄인으로 여겼고, 심지어 두예의 품격이 말할 가치도 없다고 비천하게 여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초순(焦循)은 두예의 해석이 항상 《좌씨전》의 전문(傳文) 및 한사(漢師)의 옛 이론을 벗어나 있으며, 그 의도는 사마의(司馬懿)·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 부자를 위해 그들이 임금을 무시하고 임금을 시해한 죄를 숨겨 주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심흠한(沈欽韓)의 《춘추좌전보주(春秋左傳補注)》 〈서(序)〉에서는 《공양전》과 《곡량전》이 《좌씨전》의 첫 번째 재앙, 두예의 주가 《좌씨전》의 두 번째 재앙, 공영달의 소가 《좌씨전》의 세 번째 재앙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청대 학자들의 《좌씨전》 연구는 두예의 주를 강하게 배척하고, 가규와 복건의 옛 주를 중시하였다. 홍양길洪亮吉의 《춘추좌전고(春秋左傳詁)》, 이이덕(李貽德)의 《좌전가복주집술(左傳賈服注輯述)》, 유문기(劉文淇)의 《춘추좌씨전구주소증(春秋左氏傳舊注疏證)》 등이 대표적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주나라의 덕이 쇠퇴하자 사관(史官)이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위에 있는 임금도 《춘추》의 대의(大義)를 밝히지 못하여, 부고(訃告)와 책서(策書)와 모든 기주(記注)가 대부분 옛 법도와 어긋났다. 그러므로 공자가 노나라 사관이 책에 기록한 성문(成文)에 의거하여 그 진위(眞僞)를 교감하고 그 전례(典禮)를 기록하여, 위로는 주공(周公)이 남긴 법제를 따르고 아래로는 장래의 법을 밝혔다. 옛 역사에 기재된 사건 중에 교훈이 될 만한 점이 있으나, 문장이 교훈을 해친 곳은 그 문단을 삭제하고 시정하여 권면과 경계의 뜻을 보였다.[周德旣衰 官失其守 上之人不能使春秋昭明 赴告策書 諸所記注 多違舊章 仲尼因魯史策書成文 考其眞僞 而志其典禮 上以遵周公之遺制 下以明將來之法 其敎之所存 文之所害 則刊而正之 以示勸戒]”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 두예(杜預)의 〈서(序)〉
• “중니(仲尼)가 ‘문왕(文王)이 이미 죽었으니, 그 문화가 나에게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춘추》를 지은 본래 뜻이다. 중니가 또 ‘봉황(鳳鳥)가 이르지 않고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그만인가보다!’라고 탄식했으니, 이것은 당시 왕자의 정치에 대해 상심한 것이다. 기린(麒麟)과 봉황 등의 다섯 가지 신령스러운 것은 왕자의 아름다운 상서(祥瑞)이다. 그런데 지금 기린이 그러한 때가 아닌 혼란한 시대에 세상에 출현하여, 그 호응을 헛되이 하고 그 죽을 곳을 잃고 사람에게 잡혔으니, 이것이 성인에게 감흥을 주어 《춘추》를 짓게 된 까닭이다 ‘획린(獲麟)’이라는 한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은 기린이 잡힌 것에 감흥이 있어서 《춘추》 저작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획린’으로 책의 끝을 맺은 것이다.[仲尼曰 文王旣沒 文不在茲乎 此制作之本意也 歎曰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蓋傷時王之政也 麟鳳五靈 王者之嘉瑞也 今麟出非其時 虛其應而失其歸 此聖人所以爲感也 絶筆於獲麟之一句者 所感而起 固所以爲終也]” 《춘추좌전정의》 두예의 〈서〉
• “두예는 이익을 챙기는 무리로서 어리석게도 예문(禮文)을 모르는 자이다. 그런데 갑자기 《좌씨전》을 해석하여 그 책이 당당하게 세상에 유행하니, 인심(人心)을 해치고 천리(天理)를 없애버려서 《좌씨전》의 거대한 좀벌레가 되었다.[杜預以罔利 以徒惜不知禮文者 蹶照薦之 常儼然行於世 害人心滅天理 爲左氏之巨蠹]” 《춘추좌씨전보주(春秋左氏傳補注)》 심흠한(沈欽韓)의 〈자서(自序)〉
• “유흠(劉歆)과 왕망(王莽)의 관계는 두예(杜預)와 사마소(司馬昭)의 관계와 같다. 유흠은 좌씨(左氏)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성인과 같았다고 말함으로써 좌씨를 드러내었고, 두예는 마침내 좌씨를 소신(素臣)으로 여겨서 존중하였다. 두예가 두서(杜恕)를 배반하고 사마소(司馬昭)에게 아첨한 것은 유흠이 유향(劉向)을 배반하고 왕망에게 아첨한 것과 같으니, 그 실정이 사실상 같다. 그들이 좌씨를 끌어와서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처지로 만들었으니, 그 실정이 사실상 같다. 유학자들은 모두 유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두예에게 복종하는 것은 달갑게 여겼다. 어찌 왕망이 한나라에 의해 주살되고, 왕망을 따르는 자들이 마침내 나라의 역적이 되었는데, 사마씨(司馬氏)는 마침내 위나라에 의해 선양(禪讓)되고, 사마씨를 따르는 자들은 마침내 임금을 도와 정권을 세운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夫劉歆之於莽 猶杜預之於昭也 歆稱左氏好惡與聖人同而表之 預遂以左氏爲素臣而尊之 預之背恕而諂昭 與歆之背向而諂莽 情事實同 其援左氏以爲亂臣賊子地 其情事亦同 儒者共耻言歆矣 而甘于服預 豈莽爲漢誅 從莽者遂爲國賊 司馬終爲魏禪 從司馬者遂爲佐命乎]” 《춘추좌전보소(春秋左傳補疏)》(초순(焦循)) 선공(宣公) 4년
(2) 색인어:두예(杜預), 공영달(孔潁達),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 오경정의(五經正義),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춘추학(春秋學), 좌씨학(左氏學), 삼전(三傳)
(3) 참고문헌
• 《春秋左傳正義》(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公羊傳注疏》(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穀梁傳注疏》(李學勤 主編, 北京大學出版社, 1999)
• 《春秋公羊學史》(曾亦·郭曉東, 上海:華東師範大學, 2017)
• 《春秋學史》(趙伯雄, 濟南:山東敎育出版社, 2004)
• 《春秋學史》(戴維, 長沙:湖南敎育出版社, 2004)
• 《춘추좌씨전》(정태현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2009)
• 《춘추좌씨전》(허호구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2021)
• 《춘추논쟁》(김동민, 글항아리, 2014)
• 《국가와 백성 사이의 漢》(히하라 도시쿠니 지음, 김동민 옮김, 글항아리, 2013)
【김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