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시외전》은 서한(西漢)의 한영(韓嬰)이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제자백가(諸子百家)의 내용을 인용해서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이야기를 서술한 다음, 말미에 《시경(詩經)》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관점과 필요에 따라 증명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 저작이다. 정확한 저술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한(漢)나라 경제(景帝) 또는 무제(武帝) 때로 추정된다. 이 책은 최초의 시경해설서로 추정되는 《한시내전》이 사라진 이후, 금문(今文)으로 쓴 ‘삼가시(三家詩)’ 가운데 유일하게 현전하는 저작이다. 10권 360단락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된 내용은 유가의 경세치학(經世治學)과 애민화육(愛民化育)·인의도덕(仁義道德) 같은 교훈적인 일화가 대부분이고, 실제적인 충고까지 언급하고 있어 다소 복잡하다. 《시경》과의 관련 정도로 말하면 주석(注釋)도 아니고 상세하게 해설한 것도 아니다. 다만 유가(儒家)사상을 근본으로 삼고 예악교화(禮樂敎化)와 도덕윤리적인 측면에서 그 사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밝혔다. 이후 모공(毛公)의 《모시고훈전(毛詩故訓傳)》과 동한(東漢) 정현(鄭玄)의 《모시정전(毛詩鄭箋)》 및 남송(南宋)시기 주자(朱子)의 《시집전(詩集傳)》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저자
(1)성명 : 한영(韓嬰)(생몰년 미상)
(2)자(字)·별호(別號) : 한생(韓生)
(3)출생지역 : 《한서(漢書)》 권88 〈유림전(儒林傳)〉에 의하면 서한(西漢) 연(燕)나라 사람이다.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일대인데, 그의 고향은 고안현(固安縣)이다.
(4)주요활동과 생애
효문제(孝文帝) 때 박사(博士)를 역임했고, 경제(景帝) 때는 관직이 상산왕(常山王) 유순(劉舜)의 태부(太傅)에까지 올랐다. 무제 때 한영은 동중서(董仲舒)와 황제 앞에서 변론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의 사람됨이 명석하고 다부지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조리있고 분명해서 동중서도 그를 난처하게 할 수 없었다. 《시경》을 연구하면서 겸하여 《역경》도 연구하였으며, 한시학(韓詩學)의 개창자로, 그의 이론과 어투(語套)는 《제시(齊詩)》나 《노시(魯詩)》와는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주된 내용은 같았다. 이름난 제자에는 분생(賁生)과 조자(趙子)가 있다.
(5)주요저작
《한시(韓詩)》 36권과 《한시내전(韓詩內傳)》 4권·《한시외전(韓詩外傳)》 6권이 있었지만, 남송(南宋) 이후부터는 《한시외전》만 전한다. 그 밖의 저서로 청대(淸代) 조회옥(趙懷玉)이 《한시내전》 일문(佚文)을 집록하였고, 청대 마국한(馬國翰)의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佚書)》에 《한시고(韓詩故)》 2권과 《한시내전》 1권·《한시설(韓詩說)》 1권·《주역한씨전(周易韓氏傳)》 등이 집록되어 있다.
3. 서지사항
한나라는 국가 정책으로 유학(儒學) 특히 경학(經學)을 발흥시키기 위해 경전에 대한 해석 능력을 가진 이를 우대하여 박사(博士)로 삼았고, 지역마다 뛰어난 해석학자가 나타났다. 한대 초기에 시경을 전수한 사람들로는 노(魯)나라 신배공(申培公)과 제(齊)나라 원고생(轅固生)·연나라 한영이 있었다. 앞의 두 저자들은 나라 이름을 따서 《노시》와 《제시》라고 하였지만, 한영이 지은 것은 전수자의 성씨를 따서 특이하게도 《한시》라는 책명을 삼은 경우이다. 《외전》은 《내전》에 상대되는 말로, 《시경》 해설서라기보다는 비근(比近)한 이야기를 언급해서 흥미와 동기를 유발한 성격에 가깝다.
‘삼가시’ 가운데 《제시》는 위(魏)나라 때 이미 없어졌고, 《노시》도 서진(西晉)시기에 없어졌다. ‘삼가시’ 가운데 상대적으로 꽤 수명이 길었던 《한시》도 삼가시를 이어 나온 모공의 《모시고훈전》과 동한의 정현이 지은 《모시정전》이 출현하면서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로 ‘삼가시’ 중 《한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모시고훈전》과 《모시정전》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남송의 성리학자 주자가 《모시고훈전》과 《모시정전》을 기본 원전으로 삼아 《시집전》을 찬술하면서 그 이후의 절대 다수 유학자들이 《모시》만을 전송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한시외전》은 10권 310장인데, 각기 개별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서》 〈예문지〉의 기록에 의하면 《한시》 36권과, 《한시내전》 4권, 《한시외전》 6권이 적어도 동한의 반고(班固)시대까지는 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후로 점점 소실되어 수(隋)나라 때에는 설씨장구(薛氏章句)가 붙은 《한시》 22권이 전해지고, 당(唐)나라 때에는 《한시》 22권과 《외전》 10권이 존재했다. 우리나라 《고려사(高麗史)》 8년 조목에 보면 이자의(李資義)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1091년 고려 선종(宣宗)에게 아뢴 내용 가운데, 중국 황제가 고려에게 좋은 판본을 보내달라는 100여종의 서적에는 《한시》 22권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송나라 초기까지 《한시》 22권이 존재했었음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서지학적 사료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한시》 22권이 바로 《설씨장구한시(薛氏章句韓詩)》이다. 이후 《한시》 22권이 언제 어떻게 소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남송(南宋)의 유안세(劉安世)는 《한시》의 〈우무정편(雨無正篇)〉을 읽었다고 했지만, 북송(北宋)의 구양수(歐陽脩)는 북송 시기에도 단지 《외전》만 남아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청대 호옥진(胡玉縉)은 이전의 모든 견해들을 종합해서 《한시》 22권은 북송과 남송사이에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4. 내용
《한시외전》은 고사(古事)와 고어(古語)를 잡다하게 인용하고, 28조항은 《시경》을 인용하지 않았지만 거의 절대 다수는 마지막에 《시경》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경의(經義)와는 나란히 할 수 없기에 외전(外傳)이라고 하였다. 채록한 고사는 주진(周秦)시기의 제자백가(諸子百家) 원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반고도 일찍이 ‘삼가시’를 언급하면서 일부 고사는 《춘추(春秋)》에서 취하고 또 일부는 잡설을 채록하였지만, 모두 본의(本義)는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한영이 《시경》 시인의 작문 뜻을 미루어 지은 것이라면서 조회옥은 《시경》을 인용하여 고사를 증명한 것과 반대로 고사를 인용해서 《시경》의 뜻을 밝힌 양면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또 청대 호갱선(胡賡善)은 전적으로 인사(人事)에 근거를 둔 고사나 이야기를 열거하고 그것에 적합한 《시경》을 인용하여 읽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게 함으로 경의를 밝혔고, “〈내용은〉 질박하면서도 〈현실과〉 멀지 않고, 〈인용한 것은〉 비근하면서도 지킬 만하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한영이 《한시외전》을 편찬한 사상적인 입장을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체로 유가적인 입장에서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고사나 이야기를 많이 서술하였다. 그러므로 청대 장림(臧琳)은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계승한 것이라고 하였고, 조선(朝鮮)의 이덕무(李德懋)도 이와 거의 동일한 주장을 하였다. 즉 한영이 지극히 순수한 유학자(儒學者)는 아니지만 효성스럽고 우애(友愛)있는 자로 유자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하였다. 사실 한영은 순자(荀子)의 계통을 이은 유학자이기 때문에 《한시외전》에 담긴 내용의 대부분은 유가의 경세치학(經世治學)과 애민화육(愛民化育)·인의도덕(仁義道德)·처세비유(處世比喩) 같은 교훈적이고 귀감이 될 만한 일화들이다.
하지만 《한시외전》은 시대마다 내용이 다르게 전해졌기에 명대(明代)의 동사장(董斯張)은 세상에 전하는 《한시외전》은 전서(全書)가 아니고 상당 부분이 누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선주문선(李善注文選)》에 실려 있던 《한시외전》의 2조항이 없어졌고,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실려 있던 3조항이 없어졌으며, 《태평어람》에 실려 있던 1조항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청대의 호옥진(胡玉縉)도 《사부전서총목제요(四部全書總目提要)》에서 “《한시외전》 각 장에서 《시경》의 말을 인용하지 않은 곳이 모두 28조항이나 되고 일부는 빠진 문장이 있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시대를 내려오면서 《한시외전》의 내용에 첨삭이 계속되었음은 분명하다.
역대 문학비평가들 가운데 노문초(盧文弨)는 “문장의 중간 중간에 세속적이고 상투적인 말로 전범과 준칙에 맞지 않은 말이 더러 있으므로 독자들이 감별해내야 한다.”라고 하였고, 주군복(朱君復)은 “시를 인용하여 일을 증명한 것이지 일을 끌어와 시를 설명한 것이 아니고, 세속과 부침(浮沈)하여 적합하지 않고 견강부회하며 가소로운 말이 많으므로 드러내 보인 것은 뛰어나지만 시의 의미를 설명한 것은 미미하다.”라고 하였으며, 호옥진은 “시류(詩類)에 속하겠지만, 단순히 시 구절을 인용하여 일을 증명한 《한시외전》은 시의(詩意)와는 무관한 책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이덕무도 “《한시외전》 10권은 경전과 자사(子史)의 이것저것을 인용하여 부연 설명한 것이 약간 뜻을 달리한 것도 있고, 간간이 자기 말을 넣기도 하였다. 우언(寓言)이 많아서 때때로 도가(道家)의 부류로 흘렀고 혹은 참위(讖緯)를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한대 유학자들의 고유한 습성이었다.”고 했다.
또 《한시외전》의 체례는 한대 유향(劉向)의 《신서(新序)》나 《설원(說苑)》·《열녀전(列女傳)》과 자못 일치하는 면이 있다. 즉 자신의 관점과 필요에 따라 이전의 경서나 사서·자서의 내용을 인용해서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이야기를 서술한 다음, 《시경》의 상응하는 구절을 인용해서 자기 관점을 증명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시경》을 인용해서 자기 관점을 논증하는 방식은 선진시기의 자서에서 일찍부터 널리 취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논어(論語)》나 《묵자(墨子)》·《맹자(孟子)》 같은 책들인데, 특별히 《순자(荀子)》가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이 저작들에서는 흔히 자신의 견해를 먼저 직접 서술한 다음, 《시경》의 구절을 인용해서 자기 관점의 정확성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한시외전》에서는 먼저 객관적인 이야기를 하나 서술한 연후에 다시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는 방식을 가장 먼저 시도하였으므로 이전 사람들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 “왕세정은 《한시외전》에서는 《시경》을 인용해서 사실을 증명하고, 사실을 인용해서 《시경》을 증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 설은 지극히 정확하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이 말은 《한시외전》의 문장구조 가운데 일부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문장구조의 대략적인 특징을 정확하게 개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史料)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존하는 《한시외전》은 이미 원래 책의 면모가 아니다. 《한서》 〈예문지〉에서 “한영이 《외전》 6권을 지었다.”라고 했지만, 현존하는 《한시외전》이나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신당서(新唐書)》 〈예문지〉 등을 보면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한시외전》의 배열구조나 내용에 있어서 본래의 모습을 상당부분 상실했거나, 분권되어 늘어나면서 다른 사람의 글들도 상당수 끼어들어 큰 변화가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청대 장림은 순서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 가운데는 《여씨춘추(呂氏春秋)》나 《회남자(淮南子)》·《관자(管子)》·《순자(荀子)》·《대대례기(大戴禮記)》·《설원(說苑)》 등에서 인용한 것이 많고, 하나의 사상에 입각해서 일관되게 서술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한영 사후(死後)의 저술인 《열녀전(列女傳)》과 《설원(說苑)》·《신서(新序)》·《공자가어(孔子家語)》·《공총자(孔叢子)》·《사기(史記)》·《태평어람(太平御覽)》·《신서(新書)》·《한서(漢書)》·《백호통(白虎通)》·《초학기(初學記)》·《논형(論衡)》 등에서도 인용했다면서 현전하는 《한시외전》은 한영의 원작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현전하는 《한시외전》은 한영이 지은 원작이 아니고 후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내용들이 첨삭된 것으로, 최초의 원형을 찾아볼 수 없다. 아울러 전아(典雅)하지 못한 문체나 사상적 혼류·신빙성 부족·전문 시 해설서로서의 미흡한 점 등이 존재한다.
5. 가치와 영향
《한시외전》은 현존하는 《시경》 관련 서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오늘날 《시경》을 이해할 때는 《모시고훈전》과 《모시정전》·당대(唐代) 공영달(孔穎達)의 《모시정의(毛詩正義)》·남송 주자의 《시집전》·청대 고증학자인 왕선겸(王先謙)의 《시삼가의집소(詩三家義集疏)》 등의 관련 자료들만 의존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 책은 초기 《시경》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청대 조회옥이 지적한 대로 《한시외전》만이 전하는 오늘날로서는 실제 영향의 여부나 정도를 논단하기는 어렵겠지만, 《한시외전》이 오늘날 《시경》 해석의 토대가 되는 《모시고훈전》과 《모시정전》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본격적인 《시경》 해설서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시내전》이 사라지고, 모장 이전에 나온 현존하는 최초의 시경해설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한 전기(前期) 문예발전사의 궤적을 살펴보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사상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한영의 문예 사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그가 《시경》의 〈관저(關雎)〉편과 〈감당(甘棠)〉·〈서리(黍離)〉편 등에 대한 해석을 가한 부분과 “속마음이 진실하면 바깥에 드러난다.”는 문학관, “지자요수(知者樂水)”와 “인자요산(仁者樂山)”에 대한 서술 등은 모두 공자(孔子)의 문예 미학관점과 흡사하다. 또 한영의 관점 가운데 “음악은 모든 사물을 서로 조화롭게 한다.”와 “같은 종류의 사물은 서로 감응한다.”는 견해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잡다하게 섞인 것이다. 그리고 “음악의 소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과 “마음에 응하면 몸을 움직인다.”는 주장은 분명 도가 문예사상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문학이론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소중한 사료가치가 있다. 또 후대에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유가적인 측면에서 유학자들이 인륜도덕이나 충효사상·정치적인 통찰력 고취에 요긴하게 사용한 고전이 되었고, 수많은 사자성어나 전고의 출전으로 더 큰 영향을 끼쳤다.
《한시외전》에는 ‘백아절현(伯牙絶絃)’과 ‘남상(濫觴)’, ‘당랑거철(螳螂拒轍)’, ‘능지(陵遲)’ 등 옛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많은 고사(故事)와 성어(成語)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칼이 비록 예리하다 해도 갈지 않으면 끊지 못한다. 재주가 비록 훌륭하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높게 되지 못한다.[劍雖利 不厲不斷 材雖美 不學不高]” 〈부지자하이요어수야(夫智者何以樂於水也)〉
• “말을 신중히 하는 사람은 시끌벅적하지 않고, 행위를 신중히 하는 사람은 과시하지 않는다.[愼於言者不譁 愼於行者不伐]” 〈자로성복이현공자(子路盛服以見孔子)〉
•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공자출행(孔子出行)〉
(2)색인어:한영(韓嬰), 삼가시(三家詩). 한시외전(韓詩外傳), 모시고훈전(毛詩故訓傳), 모시정전(毛詩鄭箋), 시집전(詩集傳), 고려사(高麗史), 이자의(李資義).
(3)참고문헌
• 韓詩外傳序文(錢惟善(元), 中華書局)
• 韓詩外傳(趙懷玉(淸), 中華書局)
• 韓詩外傳校注(周廷寀(淸), 中華書局)
• 韓詩外傳疏證(陳士軻(淸), 中華書局)
• 詩三家義集疏(王先謙(淸), 中華書局)
• 韓詩外傳逐字索引(劉殿爵·陳方正 主編, 商務印書館)
• 韓詩外傳今注今譯(賴炎元, 商務印書館)
• 韓詩外傳補正(趙善詒, 商務印書館)
• 韓詩外傳考證(賴炎元, 臺灣師範大學出版社)
• 白話韓詩外傳(曹大中, 岳麓書社)
• 韓詩外傳集釋(許維遹, 中華書局)
• 韓詩外傳箋疏(屈守元, 中華書局)
• 한시외전역주(전3책)(임동석, 동서문화사)
【이장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