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장학성(章學誠)은 주로 건륭연간(乾隆年間)(1735-1796)에 활동한 청대(淸代) 사상가․사학자(史學者)․목록학자(目錄學者)다. 장학성이 지은 《교수통의(校讎通義)》는 한대(漢代) 유향(劉向)․유흠(劉歆) 부자(父子)의 《칠략(七略)》으로부터 송대(宋代) 정초(鄭樵)의 《통지(通志)》〈교수략(校讎略)〉으로 이어지는 목록학 사상을 근간으로, 이를 계승․발전시킨 목록학(目錄學) 저술이다.
2. 저자
(1) 성명 : 장학성(章學誠)(1738~1801)
(2) 자(字)·별호(別號) : 원래 이름은 문효(文斅), 자(字)는 실재(實齋), 호(號)는 소암(少巖).(혹자는 자로 알려진 ‘실재’가 그의 호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일리가 있다. 일반적으로 ‘○재’는 주로 호를 짓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와 호가 서로 바뀌었거나 실재와 소암 둘 다 호일 가능성이 높다.)
(3) 출생지역:절강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 회계현(會稽縣)(현 소흥시(紹興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장학성이 주로 활동한 18세기는 바야흐로 고증학이 주류 학술담론으로 자리 잡고 흥성하는 시기였다. 고증학은 성현(聖賢)의 뜻은 오로지 경서(經書)에서 배울 수 있으며, 경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경서에 담긴 글자의 뜻과 소리를 파악해야만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장학성은 어려서부터 경서(經書)의 뜻풀이를 중심으로 한 교육에 도통 적응하지 못했다. 문리(文理)조차 트이지 못해, 책을 잘 읽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문장도 제대로 짓지 못했다. 20세가 되어서야, 경서의 뜻풀이가 아닌, 이른바 ‘서사(敍事)’라는 개념으로 사서(史書)들을 읽게 되면서 비로소 심득(心得)이 생겼고, 나름의 나갈 바를 찾을 수 있었다. 장학성 스스로 “나의 20세 후와 20세 전은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 같지 않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장학성은 애당초 학문의 취향이 당시 주류 학문인 고증학과 전혀 달라 곧잘 괴짜 취급을 받았다. 게다가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지방관을 지내다가 죄를 얻어 죽은 뒤로, 그는 줄곧 빈한(貧寒)한 가정환경 속에서 여러 지역의 서원(書院)에서 강학(講學)을 하거나, 고관(高官) 막부(幕府)의 막료(幕僚)로 들어가 지방지(地方志)를 제작하거나 도서목록을 편찬하는 작업에 종사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고관(高官)이면서 저명한 학자였던 주균(朱筠)이나 필원(畢沅)의 막료(幕僚)로 들어가 소진함(邵晉涵)․홍량길(洪亮吉) 등 당시의 뛰어난 학자들과 교류․논쟁하면서 자신만의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참여했던 《화주지(和州志)》, 《영청현지(永淸縣志)》, 《박주지(亳州志)》, 《호북총지(湖北通志)》 등 여러 지방지 편찬 작업은, 실질적인 자신만의 학술 이론을 수립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로 자신의 학술 이론을 집대성해, 역대 사서(史書)의 연혁을 정리할 《사적고(史籍考)》를 야심차게 기획하고 저술에 들어갔지만, 가난은 계속되었고 병마까지 그를 덮쳤다. 결국 《사적고》를 완성치 못한 채, 7년 뒤인 1801년,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5) 주요저작
장학성의 저작 중 핵심은 《교수통의(校讎通義)》와 《문사통의(文史通義)》라 할 수 있다. 이 두 저작은 크게, 차남 장화불(章華紱)이 장학성 죽은 뒤인 1833년에 펴낸 대량본(大梁本)과 유승간(劉承幹)이 1922년에 펴낸 가업당(嘉業堂) 《장씨유서》본《章氏遺書》本으로 나뉜다. 후자는 장학성은 죽으면서, 자신의 모든 유고(遺稿)를 모두 맡겼던 벗 왕종염(王宗炎)이 편집한 《교수통의》와 《문사통의》를 저본(底本)으로 해서 펴낸 것이다. 전자는 장학성의 차남이 왕종염의 편집을 보고는 아버지의 저술 의도와 어긋난다며, 자신의 편집을 근거로 펴낸 것이다. 《문사통의》는 장학성이 쓰다 죽었기에 두 판본의 차이는 꽤 크지만, 《교수통의》는 장학성이 생전에 완성했던 관계로 별 차이가 없다. 《문사통의》는 당대(唐代)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과 함께 중국 사학(史學) 이론의 쌍벽(雙璧)으로 손꼽힌다. 이 외에도 《호북통지검존고(湖北通志檢存稿)》, 《호북통지미성고(湖北通志未成稿)》, 《문집(文集)》 등이 전한다. 아쉽게도 평생의 공력을 쏟아 저술하던 《사적고(史籍考)》는 완성되지 못했고, 결국 일실(佚失)되었다. 그나마 관련되 글이 몇 편 남아 있어, 그 대체(大體)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3. 서지사항
《교수통의》는 당초 전4권으로 장학성이 1779년에 진작 완성했지만, 강도를 만나 모든 원고를 빼앗겼기 때문에, 이후 따로 베껴둔 부본(副本)들을 모아 10년이 지난 1788년에 전3권(총18편)짜리로 복구했다. 이후 장학성이 죽기 전 원고를 맡겼던 벗 왕종염이 《교수통의》와 관계된 장학성의 다른 글들을 모아 제4권을 만들어 전4권짜리 《교수통의》를 만들었지만, 이는 장학성이 당초 만들었던 원본이 아니다.(왕종염이 덧붙인 제4권이 실제 《교수통의》와는 별 상관없는 군더더기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衆論)이다.) 덧붙이자면, 당초 《교수통의》는 별도의 저술이 아니라 《교수략(校讎略)》이란 이름으로 《문사통의》의 외편(外篇)에 편입되어 있었다가 이후 별도의 저술로 독립되었다.
4. 내용
《교수통의》는 기본적으로 목록학(目錄學) 저술이고, ‘교수(校讎)’란 용어는 원래 서책(書冊)의 글자를 꼼꼼하게 교정본다는 서지학(書誌學) 용어다. 하지만 장학성에게 ‘교수’란 고증학과 전혀 다른 연구방법론을 뜻했다. 장학성은 중국의 전통학술이 원래 완정한 시대였다고 상정되는 삼대(三代), 즉 하(夏)․상(商)․주(周) 시기의 관직(官職)들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제자개출어왕관설(諸子皆出於王官說)’을 자기 학문의 기틀로 삼았고, 이러한 주장이 명시되었던 유향(劉向)․유흠(劉歆) 부자(父子)의 《칠략(七略)》을 자기 학문의 출발로 삼았다.(물론 《칠략》은 진작 일실되었으므로, 실제로는 그 내용이 온전히 담겨있는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를 근거하고 있었다.) 경서의 한 글자 한 글자의 뜻을 명확히 파악하다 보면, 경서 자체의 뜻을 온전히 파악하게 된다는 고증학적인 방법론에 대해, ‘교수’적 방법론은 그 한계를 비판하면서, 모든 저술․학설의 내용이 당초 어떤 관직에서 기원했으며 어떤 경로로 발전되어 왔는지, 그 흐름을 통시적으로 살피며 역으로 그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진정 해당 저술․학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방법만이 저술․학설이 완전한 도(道)에 가까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저술과 학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완정한 시대였던 삼대 시기까지 연계할 수 있다면, 완정한 삼대 시기의 온전한 도를 부분적으로나마 현재에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수’적 방법론은 《교수통의》뿐만 아니라 《문사통의》와 다른 그의 저술 모두를 꿰뚫고 있는 핵심적인 사상이다. 한 마디로 장학성은 그 당시 주로 서지학의 단순한 연구 방식을, 고증학에 필적할만한 학술사상의 방법론으로 변용․확장한 것이다.
《교수통의》는 이 같은 ‘교수’적 방법론에 근거해, 《한서》〈예문지〉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면서, 《칠략》의 학술적 성취를 어떻게 계승하고 변용해야 현재에 적용할 수 있을 지를 궁구했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방식을 근거로, 목록학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방법론들을 제시했다.
① 책을 분류하는 데에 있어서, 내용에 근거해 한 책을 두 군데에 중복되게 저록(著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초 《한서》〈예문지〉를 보면, 《손경자(孫卿子)》(즉 《순자(荀子)》)를 원래 〈제자략(諸子略)〉〈유가(儒家)〉 에 저록되어 있지만, 동시에 〈병서략(兵書略)〉〈권모가(權謀家)〉에도 중복해서 저록되어 있다.
② 한 책에 다양한 갈래의 학설이 들어 있을 경우, 해당 편장(篇章)만 뽑아서 따로 해당 분류에 저록한다. 예를 들어 《한서》〈예문지〉를 보면, 《관자(筦子)》(즉 《관자(管子)》)는 원래 〈제자략〉〈도가(道家)〉에 저록되어 있지만, 《관자》의 〈제자직(弟子職)〉편은 따로 〈육예략(六藝略)〉〈효경(孝經)〉에 저록되어 있다.
③ 책 하나에 명칭이 여러 개일 경우, 반드시 서명 아래에 여러 명칭들을 모두 기술한다. 한 사람이 많은 자(字)와 호(號)를 가지고 있을경우, 역시 그 사람의 성명 아래에 자와 호들을 모두 기술한다.
④ 이미 사라진 책은, 다른 책에 인용되어있는 부분들을 찾아서 따로 모아둔다.
⑤ 책은 담당 관리가 관리하게 한다.
⑥ 어떤 책이든 두루 부본(副本)을 모아두어 교정(校正)에 대비한다.
⑦ 책을 교정하다가 고친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원문도 실어 둔다.
⑧ 책 중에 빠지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이를 기록해 둔다.
⑨ 책을 두루 모아 보관한다.
⑩ 책의 색인(索引)을 만들어 둔다.
5. 가치와 영향
중국 서지학의 한 갈래인 목록학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후대로 올수록 장서(藏書) 목록을 편찬하는 단순한 작업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장학성은 이러한 추세에 반발하며 목록학의 개념들을 활용해, 당시를 풍미하던 고증학과 전혀 다른 연구방법론을 제시했는데, 그 학술적 성취의 발단을 확인할 수 있는 저술이 바로 《교수통의》다. 그래서 《교수통의》는 장학성 학술사상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저술로 손꼽히면서, 동시에 중국 목록학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연구 성과로 주목받고 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교수’의 뜻은 유향․유흠 부자가 편찬한 《칠략》의 목록 분류와 배열에서 연원한 것이다. 이로써 학파와 학술의 논지(論旨)를 변별(辨別)하여 드러내고, 연원(淵源)과 지파(支派)의 갈래를 검증하여 거울삼는다. 도술(道術)의 정미(精微)함과 여러 주장의 득실(得失)에 대해 정심(精深)하지 않다면, 교수와 더불기에 부족하다.[校讎之意, 蓋自劉向父子部次條別, 將以辨章學術, 考鏡源流, 非深明於道術精微․群言得失之故者, 不足與此.]”〈校讎通義序〉
(2) 색인어
장학성(章學誠), 교수(校讎), 목록학, 《교수통의(校讎通義)》, 유향(劉向)․유흠(劉歆) 부자, 《칠략(七略)》,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정초(鄭樵), 《통지(通志)》〈교수략(校讎略)〉
(3) 참고문헌
• 《교수통의》(장학성 지음, 임형석 옮김, 《문사통의교주 5》, 소명출판, 2011)
• 《校讎通義通解》(章學誠 著, 王重民 通解, 傅傑 導讀, 田映曦 補注, 上海古籍出版社, 2009)
• 《章學誠遺書》(章學誠, 文物出版社, 1985)
• 《장학성의 《교수통의》 연구》(신지언 지음,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1994)
• 《중국목록학사상사(中國目錄學思想史)》(여경용(余慶蓉)․왕진경(王晉卿) 함께 지음, 남태우․송일기 함께 옮김, 태일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