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본서는 당대의 관료이자 문인인 이연수(李延壽)가 지었으며 전 80권으로 659년(당 고종(高宗) 현경(顯慶) 4년)에 완성되었다. 남북조시대 강남에 위치했던 남조 왕조인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네 왕조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한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통사(通事)이자, 중국의 정사(正史) 가운데 하나이다. 본서는 이보다 앞서 성립된 남조의 정사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를 기본 자료로 하여 그 내용을 절록하고, 편찬 당시까지 존재하던 다른 사서들을 활용하여 증보한 내용도 있다. 본서는 산일되기 이전의 남조 정사 원문을 상당수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망실된 남조시대 사서들의 내용도 일부 채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2. 저자
(1) 성명:이연수(李延壽)(?~?)
(2) 자(字)·별호(別號): 미상
(3) 출생지역:농서(隴西) 상주(相州)(河南 安陽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이연수는 농서(隴西)의 사족(士族) 출신으로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연간(627년~649년) 태자전선승(太子典膳丞), 숭현관학사(崇賢館學士) 등을 지냈고, 저작좌랑(著作佐郎) 경파(敬播) 등과 함께 오대사지(五代史志)를 편찬했으며 《진서(晉書)》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어 어사대주부(御史臺主簿)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직국사(直國史)를 겸임하여 사서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북위(北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의 정사를 요약한 《남사》와 《북사》를 편찬한 것 외에도 《태종정전(太宗政典)》 30권을 지었다. 이 책은 그가 죽고 난 후에 고종(高宗)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이연수의 유족들에게는 비단이 내려졌고, 부본은 비각(祕閣)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그는 《남사》와 《북사》를 완성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부보랑(符寶郞)에 이르렀고 수국사(修國史)를 겸임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680년(조로(調露) 2년) 2월 고종이 그가 지은 《태종정전》을 칭송하며 그 유족에게 비단의 하사를 명한 조서 내에서 그가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언급한 사실로 볼 때, 적어도 그는 680년 이전에는 사망했음이 확실하다.
(5) 주요저작
이연수의 열전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영호덕분전(令狐德棻傳)〉에서 부기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태종정전》, 《남사》, 《북사》 등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본서와 《북사》이다. 이 밖에도 《북사》의 최말미에 첨부된 서전(序傳)은 저자 가문의 가전(家傳)으로 이씨의 시조부터 본인에 이르기까지의 세계 및 각 세대별 인물들에 대한 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체제는 《송서》에 수록된 심약(沈約)의 자서(自序)와 유사하다.
3. 서지사항
본서는 남북조시대 강남에 위치한 남조 왕조, 즉 송, 제, 양, 진 네 왕조의 역사를 다룬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당 전기 이대사(李大師)는 남북조시대의 사서가 송, 제, 양, 진, 북제, 북주, 수의 왕조별로 나뉘어 있고, 남조에서는 북조를 삭로(索虜), 북조에서는 남조를 도이(島夷)라고 하여 당시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국 이외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소략함을 인식하고 이들 왕조의 역사를 단일한 체제하에 엮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대사는 이를 완수하지 못한 채 사망했고, 그 작업은 그의 아들인 이연수로 계승되어 결실을 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659년(고종 현경 4년) 《남사》가 먼저 완성되었는데 본기가 10권, 열전이 70권이다. 표와 지는 없다. 본서의 문장과 내용의 대부분은 이연수의 자찬이 아니며 기존에 성립된 정사로부터 절록된 것이다. 정사의 경우 본기에는 황제가 내린 책서(策書), 조서(詔書), 칙서(勅書)의 원문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고, 열전에는 해당 인물의 상주(上奏) 및 그가 지은 문학작품의 전문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었는데, 이연수는 이 같은 부분들을 과감히 삭제하고 중요한 사실만을 채록하여 열거함으로써 요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본서는 송, 제, 양, 진의 네 왕조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량은 남조 네 정사를 합친 것의 절반에 불과하게 되었다.
남조 때 성립된 정사들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권질에 누락이 발생하고 원문의 일부가 산일된 것과 달리 본서는 성립 당시의 권질과 내용에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전하고 있다. 중국의 정사들 가운데 《사기(史記)》를 제외하고 본기를 기반으로 여러 왕조의 역사를 편년한 최초의 사서이기도 하다. 본서의 찬술 경위, 사료의 채록 원칙, 체제 상의 특징 등은 현행본 《북사》 권100에 수록된 저자의 서전에 상세하다.
판본의 경우, 당나라 때의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본서의 교정과 활자본의 간행은 북송 인종(仁宗) 천성(天聖)2년(1024)의 일이다. 《인대고사잔권(麟臺故事殘卷)》에 따르면 천성2년 6월, 황제가 본서와 《북사(北史)》, 《수서(隋書)》 등을 함께 교감할 것을 명했고, 천성4년(1026) 12월에 그 작업이 완료되었다. 이를 통해 이미 북송대 본서의 교정본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판본 역시 전하지 않는다. 원대에는 대덕(大德)년간에 구로(九路)에서 십칠사(十七史)를 분간했는데 그 가운데 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일명 원대덕본(元大德本)이라고 하는데 현재 전하는 본서의 판본은 이에 의거한 것이다. 명, 청시대 상숙(常熟) 모씨(毛氏)의 급고각(汲古閣)에서 간행한 십칠사(十七史),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일명 남감(南監)), 북경국자감(北京國子監)(일명 북감(北監))의 이십일사(二十一史), 무영전(武英殿)의 이십사사(二十四史)에 모두 본서가 수록되어 있고, 그 판본은 모두 원대덕본이다. 이후 민국시기에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이십사사(二十四史)의 결락을 다른 판본들과 대조하여 보충하고 영인(影印)한 일명 백납본(百衲本) 이십사사(二十四史)가 간행되었고, 본서 역시 이 백납본 이십사사에 수록되었다. 1975년에는 북경(北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이상의 판본들을 비교, 대조하여 원문을 교감하고, 표점한 점교본(點校本)이 간행되었고 오늘날에는 이 간행본이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다.
4. 내용
본서는 1권에서 3권이 송본기(宋本紀), 4권에서 5권이 제본기(齊本紀), 6권에서 8권이 양본기(梁本紀), 9권에서 10권이 진본기(陳本紀)로 구성되어 있다. 열전은 11권부터 시작하는데 11권과 12권이 송, 제, 양, 진의 황제의 후비전(后妃傳)이다. 이하 13권에서 69권까지는 송, 제, 양, 진으로 네 구분을 두고 각 조대에 속하는 종실제왕과 신료들의 열전을 편성했다. 70권 순리전(循吏傳)부터 77권 은행전(恩倖傳)까지는 왕조 단위의 구분 없이 네 왕조 인물들의 사적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78권과 79권은 외국전(外國傳)이다. 맨 마지막 80권에는 적신전(賊臣傳)을 설정하였는데 여기에는 양(梁)과 진(陳)대의 인물들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각 조대의 열전에 수록된 인물들의 사적과 그들이 실제로 사환했던 왕조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열전 말미에 그의 자손, 형제, 종족들의 열전까지 일괄적으로 첨부함으로써 실제로는 남조 제나 양에 속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적은 남조 송대 인물의 열전 내에 부기되었다. 이는 열전에 수록될 인물의 선정과 배치의 기준을 시대가 아닌 가문의 세계(世系)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본서의 열전은 국사(國史)가 아닌 가보(家譜)를 기록한 가전(家傳)의 형식을 띠게 되었고, 이는 남북조시대 왕조의 교체에 불구하고 지위와 실력을 유지했던 문벌귀족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5. 가치와 영향
본서는 남조의 사정사(四正史)를 요약했기 때문에 본서가 성립되고 나서 다른 정사들은 더 이상 읽히지 않게 되었다. 북송대에는 본서가 정사의 번잡한 부분은 삭제했으면서도 빠진 부분은 보충하여 ‘근세(近世)의 가사(佳史)’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본서가 《송서》의 기사를 채록하는 과정에서는 그 내용을 가장 많이 줄였지만, 《남제서》와 《양서》에 있어서는 요약보다는 오히려 정사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했다. 그리고 그 보충은 《송략(宋略)》, 《제춘추(齊春秋)》, 《양전(梁典)》 같은 남조 당시에 편찬된 사서들을 활용하였는데, 이들 문헌은 모두 현재에는 망실되었기 때문에 본서가 갖는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또한 《송서》, 《남제서》에서는 동시대에 병존했던 북위를 각각 삭로전(索虜傳), 위로전(魏虜傳)으로 편성하고, 남조와 북위와의 교섭기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왜곡했음에 비해 본서는 북위와의 교섭 기사를 본기 내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기존 정사의 결점을 보완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남조 정사의 단순 절록으로 볼 수 없으며, 남조 정사의 기사의 검토에 있어서 반드시 본서와의 비교, 대조가 요구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번잡한 것을 덜어내고 빠진 것을 보충함에 있어서는 원래의 사서보다 훨씬 낫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책(《남사》와 《북사》)만을 보니, 심약(沈約), 위수(魏收) 등이 지은 것들은 모두 유행하지 않는다.[刪煩補闕 過本史遠甚 今學者止觀其書 沈約魏收等所撰皆不行]” 〈조공무(晁公武),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
‧ “남, 북의 정사(正史)와 비교해 보면, 번잡하고 거친 말들이 없으니 생각건대 〈《삼국지(三國志)》를 지은〉 진수(陳壽) 이후에 이연수(李延壽)만이 그와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比於南北正史 無煩冗蕪穢之辭 竊謂陳壽之後 惟延壽可以亞之也]” 〈사마광(司馬光), 《사마온공집(司馬溫公集)》〉
(2) 색인어: 남사(南史), 이대사(李大師), 이연수(李延壽), 영호덕분(令狐德棻), 당(唐), 고종(高宗), 북사(北史), 서전(序傳)
(3) 참고문헌
‧ 南史 標點校勘本(中華書局)
‧ 南史全譯(二十五史全譯, 漢語大詞典出版社)
【양진성】